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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지금까지 엉터리 역사를 배워왔다?

[충격]상고사학회의 '신라사 정역에 대한 고찰' 강연을 듣고

김선태 취재칼럼 | 기사입력 2009/01/08 [12:09]

'신라사' 지금까지 엉터리 역사를 배워왔다?

[충격]상고사학회의 '신라사 정역에 대한 고찰' 강연을 듣고

김선태 취재칼럼 | 입력 : 2009/01/08 [12:09]
▲ 강연장을 가들 매운 관중들     ©김선태

 
2009년 1월 6일 13시 대한민국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신라사 정역에 대한 고찰[新羅史 正譯에 對한 考察]' 강연회(신라사의 정역, 신라의 비밀 역사에 대해 밝힌다)는 250석의 자리가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채워졌다.
 
 접수부에 등록을 하자 오늘 강의할 내용을 인쇄한 소책자와[삼국사기 신라본기] 정역본<번역450쪽+원문143쪽>, 신라원전정역[정역본]<번역 333쪽+원본86쪽>이라는 두 권의 정성이 깃들은 학술서적을 함께 주었다. 사단법인 상고사학회(회장 이중재(78)님이 직접 장장 2시간 30분이나 강의 계속하였고 청중들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와 너무 다른 이야기에 놀라고 흥분하기 까지 하였다.
 
▲ 참가자들에게 배부된 귀중한 서적들     © 김선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사실들을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다면서 지적한 내용은, 신라의 영토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의 화북 지역 이었고, 경주가 신라의 도읍이 아니라 왕건이 경순왕에게 장녀 낙랑공주를 배필로 주어서 경사스러운 땅에서 편안하게 살라고 해서 <경주>라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오늘 강연의 주제는 [신라사]에 대한 정역<바른 번역>에 대한 고찰이다. 그렇다면 신라사가 지금까지 잘 못 번역 되어 오고 있다는 주장인 것 같아서 관심이 갔다. 인터넷 광고를 보고 달려간 강연은 내가 기대 했던 것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어서 우선 실망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가 시작되기 30분전에 도착을 하였지만 벌써 자리가 거의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학술 강연장을 찾아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정성이 들어간 저술은 거의 100% 판매를 하였지 이렇게 나누어 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귀중한 서적을 나누어 받고 나니 거의 죄송해서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시간이 남아서 미리 오늘 강의하실 내용을 일일이 뜯어보았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오늘 강연의 요지를 인쇄한 소책자는 완독을 할 수 있었다.

우선 이 강연에서 듣게 될 신라사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신라사가 아니었다.
우선 박혁거세라는 시조부터 틀리다는 얘기였다. 본래 시조는 김씨이었는데 김부식이 김씨의 명예를 생각하여서 삼국사기를 집필하던 그 당시까지 있지도 않았던 성씨인 박씨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신라는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가 아니다. 경주는 신라의 서울이 아니었다. 등이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었다. 
 
▲ 강연 요지를 담은 소책자     © 김선태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개강식에서는 상고사학회 이중재회장의 인사말과 함께 진태하 교수, 김선동 국회문광위원, 정두언 국회문광위원, 신세훈 시인협회회장, 김경동 대전법원장의 인사가 있었다. 이렇게 주요 내빈만으로도 오늘의 모임이 보통 스쳐 지나가는 그런 모임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한 시 정각에 시작된 강연회의 개회식은 한 시간여를 계속 되었다.
잠시 쉴 시간을 주고 나서 진행 된 강연은 80을 바라보는 이중재 회장님의 힘차고 열성에 들뜬 목소리가 강당을 꽝꽝 울리고 넘쳐 났다. 강당이 너무 좁아서 어디론가 더 넓은 세계로 퍼져 나가고 싶다는 듯 울려 퍼지는 소리는 강연 중에 걸려온 집사람에게서 “누가 싸우는 소리가 나네요. 조심하세요.” 할 정도로 힘차게 울려 퍼졌다.

강연이 시작 될 무렵엔 강당은 가득 채워졌고, 여기저기 서 있는 분들과 뒷자리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은 분들도 눈에 띄었다.

강연은 신라의 건국부터 시작 되었는데, 신라의 위치가 황허강의 중류 지방에 있는 6촌이었고, 신라의 혈통은 소호금천씨가 시조이고, 황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아직 내가 직접 읽어보지 못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분명하게 기록 되어 있는 사실을 잘 못 가르치고 있다는 주장을 들으면서 내가 40여년을 교사로 가르치면서 사기를 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강의를 맡아주신 이중재 상고사학회 회장님     © 김선태


나는 오늘 이 강연을 들은 다음에 오늘 주신 신라본기와 신라원전정역을 차분하게 읽으면서 정말 우리의 역사가 어떤 것인데 이렇게 다른 주장이 나오는지를 밝혀 보려고 마음먹었다.

강연은 내내 신라의 영토가 중국의 중앙부에 위치하였으며, 신라의 도읍지는 지금의 경주가 아니고, 지금의 경주는 왕건에게 나라를 헌납한 경순왕에게 왕건은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배필로 주어서 정승공을 삼고 1천석의 녹봉을 주어서 편안하게 살라고 하여서 보낸 곳이란다. 그래서 慶事스런 고을에서 잘 지내라는 뜻으로 慶州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12권 경순왕 편>에 적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경주는 신라의 도읍지가 아니다. 그래서 신라 56왕 중에 경주에 있는 왕릉은 35개 뿐이고, 이것도 중궁에서 몰래 이묘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강연을 듣는 내내 나는 어쩜 이렇게 다른 역사가 있단 말인가? 내가 지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지금까지 속아서 헛것을 배우고 가르쳐 왔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듣다보니 골치가 지근거리고 내 자신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중엔 정말 내가 무슨 소릴ㄹ 듣고 잇는지 조차 모를 만큼 혼란스러웠던 하루 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차분하게 내 자신이 직접 찾아 읽어 가면서 이문은 풀어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kbs보도 동영상 보기=  상고사학회 "신라 수도는 중국 서부"


[이 기사는 [NEWStory makes History - 서울포스트.seoulpost.co.kr]의 허락을  받고 보도함을 밝힙니다.]


자료 09/01/08 [16:01] 수정 삭제  
  [신라의 흉노족]






▲문무왕릉비 조각에 새겨진 의문의 글자‘투후’
경주 대능원의 황남대총이나 문무왕비문.삼국사기.한단고기는 신라의 흉노족에 대해 자세히 증명하고 기록하고 있는 증거자료들이다. 중국북부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흉노족은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붙잡힌 흉노 휴도왕의 장자 김일제가 한무제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자, 투후국 왕(투후)까지 된다. 세력이 커지자 김왕망과 김알제세력은 한나라에 쿠테타로 권력을 잡고 10년간 버티다가 다시 한족들에게 권력을 찬탈당해 결국 한반도로 망명함..이들이 김씨왕족들......문헌과 유적유물들이 증명하고 있다.한반도3한 중 마한의 진왕에게 조공을 바친 진한에서 출발하는 신라는 본래 주인이 진시황에게 붙잡혀 고된 노역에서 망명한 진한사람들과 부여에서 망명온 박혁거세 세력이다(후한서-동이열전,삼국지 위지 동이전,한단고기), 마지막에 망명한 흉노족 김씨왕족들이 나중에 쿠테타로 이들을 몰아내고 신라권력을 잡는 것이다.
고구려의 속국-신라
부정할 수 없는 광개토태왕비문은 다음과 같이 역사적 사실을 증언한다"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 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고증자료]신라.가야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왜를 동남아로 비정하는 코메디를 연출하지마라! 왜는 [한단고기]에도 지금의 일본열도라고 기록하고 있다.왜를 동남아로 비정하면 당연히 신라도 중국으로 비정되면서 문헌해석의 오류가 생기고 역사판도가 개판된다.[유물: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태왕 제사용 청동그릇]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명확히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400년 신라의 요청으로 광개토왕이 내려보낸 5만의 군대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신라의 수도 금성에 주둔군을 남겼다. 망국의 위기를 벗어난 신라의 왕과 그 일행이 직접 평양에 이르러 고구려왕에게 조공을 바친 것은 물론이다. 광개토태왕이 세상을 떠난 1년 뒤 그 왕릉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청동 그릇이 신라 중상급 귀족의 무덤인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것이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을 증언한다. 서 기 495년 만들어진 중원 고구려비에서 신라왕은 ‘동이매금(東夷寐錦)’으로 일컬어진다. ‘매금’이란 신라왕의 고유 칭호였던 ‘마립간’의 다른 표기이고, ‘동이’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신라를 보는 시각을 나타내는 용어다.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세계로, 그 중심을 고구려로 상정한 고구려인의 의식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자료] kbs역사추적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태조는 박혁거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문무왕릉 비문에는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 역시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무왕릉비 조각에 새겨진 의문의 글자‘투후’2.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



문무왕릉 비문에 기록된 ‘투후’. 한서에 의하면 투후는 한나라에 포로로 잡힌 흉노족의 태자 김일제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문무왕과 같은 김씨였다. 그는 한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고 한무제에 의해 투후로 임명되었던 실존 인물로 밝혀졌다.



▲김일제묘3. 비문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들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전7엽> <투후><전7엽><15대조 성한왕>등 암호 같은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바로 문무왕의 15대조인 성한왕과 흉노왕의 태자였던 투후 김일제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암호들이다.



▲문무왕릉비문의 탁본
▲무위시 김일제 석상4. 김알지는 정말 금궤에서 태어났을까?



계림의 금궤 짝에서 돌연 등장하는 신라 김씨 시조 김알지. 정말 신라 김씨는 흉노족이다. 초기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과 흉노족 무덤은 모두 적석 목곽분이라는 동일 양식이고 동일한 오르도스형 흉노 동복(솥)이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됐다.



▲적석목곽분





▲국립경주박물관의 문무왕릉비 하단석

1.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성한왕은 누구인가?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제천지윤 전7엽’이라는 암호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서 ‘투후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자손이라는 뜻. 그리고 ‘7엽’은 일곱 개의 잎사귀, 즉 7대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15대조 성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대능원2. 흉노족 문화와 신라 문화의 유사성.



신라의 문화와 풍습은 북방기마민족 흉노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금은의 나라’로 표현되어 있다. 황금 숭배는 유목 민족의 특징이다. 또 신라 김씨 무덤과 흉노족 무덤양식은 적석목곽분으로 동일하다. 흉노의 근거지에서 발견된 ‘동복(청동 솥)’ 역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다.



▲경주출토 기마인물형 토기
▲김해.경주출토 흉노동복3. 투후 김일제의 나라 투국



중국에서 김(金)씨는 흉노계를 상징하는 성씨와 같다. 중국의 김씨는 대부분 투후 김일제를 시조로 모시는 흉노족.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 입구에는 이곳이 김일제의 투국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투국성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투후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 주민들은 투국성을 김성(金成), 금성이라고 한다. 조림사업이 시작되면서 숲으로 바뀐 이 일대 지하에 투후국의 흉노족이 ‘금성’이라 부르던 성이 있었다. 김일제의 성을 딴 투후국의 ‘금성’과 신라의 수도 ‘금성’ 두 이름이 일치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산동성 하택시 투국의 옛성
4. 신라 김씨왕조는 이주민이 세운 나라  



왕망의 신나라에서 사용되던 ‘화천’이 출토된다. 이것이 발견된 지역은 중국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무역로와 거의 일치한다. 중국왕망의 난에 가담했던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은 왕망의 피살과 함께 뿔뿔이 흩어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 역사서에는 대륙의 정세가 급변할 때마다 북방의 이주민이 한반도 남단 경상도 지역인 진한 땅으로 이주해왔다는 기록이 여럿 등장한다.



▲흉노족의 나라 신나라가 주조한 화폐-화천 5. 성한왕은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



문무왕의 15대조는 김알지의 아들 세한이다. 추사 김정희가 비문의 내용을 집대성한 <해동비고>에 보면 문무왕비문에 기록된 성한왕은 바로 ‘김알지’라는 기록이 나온다. 비문의 성한왕에 대한 묘사는 김알지의 설화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분석된다. 성한왕은 바로 신라 김 씨 시조 김알지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에서 이주해온 김 씨가 세력을 형성하고 이주민에 불과했던 김 씨들이 최초의 왕인 미추왕을 배출한다. 문무왕에 이르러서는 흉노계 선비족 당나라와 손잡고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 패권을 장악한다.



▲해동비고

신라만의 통일을 달성하고 대당전쟁마저 승리한 문무왕. 그의 비문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석탈해가 사라지고 성한왕만이 존재한다. 신라는 이제 김씨 단독 왕국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바로 문무왕릉비문인 셈이다. 신라김씨왕족의 자신감은 신라김씨 시조 성한왕과 더불어 흉노 태자 투후 김일제까지 자신들의 뿌리가 닿음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신들의 실체를 문무왕비문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명백한 유물인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가 신라의 패자로 성장해간 비밀을 담고 있는 고대사의 블랙박스였다.
천추태후 09/01/08 [17:43] 수정 삭제  
 

김왕망과 함께 전한을 무너뜨리고 개국한 신나라가 10년후 멸망하자 한나라의 멸족이 두려워 산동을 걸쳐 해양루트를 따라 한반도 남부 김해.경주지역으로 들어온 흉노족 김일제 후손들(가야.신라 왕족)은 만주와 한반도의 토착민들(동이족)로 구성된 고구려.백제인들의 무덤양식(고구려.백제:한반도 남방식 고인돌양식의 적석총/신라 김씨왕족:유라시아 유목민의 적석목곽분)이나 문화자체(신라는 고조선의 옛 부족 중의 하나인 흉노의 갈래이다. 신라 김씨왕족은 초기에는 스키타이 황금문화이고, 같은 혈족인 고구려.백제,일본은 부여계 어족이며 부여계 문화다)가 차이가 난다.

일례로 신라의 금관은 백제의 그것과 약간 다르다. 나갈 출자 문양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흉노의 스키타이 문명의 상징이다. 사슴뿔 문양인 것이다.신라 김씨왕족의 무덤인 황남대총의 유물들이 증명하듯 상이하게 중앙 아시아적인 요소가 강하였으며, 신라 김씨왕족의 경우 중앙 아시아 투르크인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 그러한 고고학적 증거자료는 경주 김씨왕족의 무덤들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투르크인들의 석상들이 증명한다.
유국재 09/01/09 [00:35] 수정 삭제  
  문무왕 비문의 비밀은 투후 김일제가 신라김씨의 원류라는 것을 나타낸 일종의 김씨 왕실족보겸 중화덕에 잘먹고 잘살았다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문무왕 비문의 요지는 중화정권과 신라김씨는 알고보니 일가친척이라는 말과 같다는뜻이다. 투후 김일제가 한무제의 제후였던 것처럼 신라김씨도 중화 의 제후국이라는 중화 칭송비 성격이 강하다. 게다가 예식진 묘비명에서 밝혔듯이 신라가야왜의 김씨들은 더이상 가면을 써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같은 김일제 후손인데도 왜 가야가 신라보다 더 강성했는지? 그리고 왜 일본 천왕가는 중국한반도에 대해서 그토록 노략질이 심했는지 미스테리로 남는다. 한국의 신라김씨만 어벙하게 1400년을 이어오고 있다.

1.에이디 400년 신라김씨는 민족 감정이 없었다. 예맥부여의 나라에 중화적인 흉노의 왕이 들어섰을 뿐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천손의 자손이 아니라 한무제의 제후였고 왕망의 신나라에서 당파싸움에 밀려서 산동반도에서 배타고 망명한 정권이었을 뿐이다. 중화된 흉노왕자 김일제는 아늑한 보금자리를 원했을 뿐이다. 김춘추의 대동강 원산만은 김춘추씨의 생각이 아니라 김일제및 그 무리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왜 만주나 연해주로 진출할 생각을 못했을까? 아마도 만주나 연해주의 막강한 예맥부여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의 제국들은 단군조선 북부여 고구려 발해 백제의 제국을 잉태하였고 산물과 바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가히 만주를 지배한자가 천하를 지배할수가 있었다.

2.김일제 무리는 신라가야가 아니라 요동을 병탄하는 모험을 감행했어야 했다. 요동정권이 틀어쥐고 있지만 요동을 석권하면 산동반도며 낙랑 평양 서울마한 목포를 한바뀌 돌아서 대마도를 거쳐서 일본으로 직행할수가 있다. 한반도도 요동반도보다 더 큰 반도 국가인데 신라는 한반도를 거머쥔뒤에도 초원의 푸른늑대 기질을 발휘하지도 못했고 중화의 은덕에 감사한다는 후손들이 보면 오해를 살만한 부끄러운 작태를 보이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 스탭을 마구잡이로 누비고 다닌 초원의 늑대는 사라지고 중화의 따뜻한 아랫묵에서 성장한 썩은 늑대가 한반도 동남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후손들에게 씻지못할 영토 축소라는 유산을 남겨주고야 말았다.

사료 09/01/09 [02:29] 수정 삭제  
  [신라기사관련 중국의 양서 원문]梁書 新羅者 其先本辰韓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 秦人避役 來適馬韓(另條見前) 馬韓 割其東界居之 辰韓始有六國 稍分為十二 新羅其一也 其國在百濟 東南 東濵大海 南北與句驪 百濟接 魏時 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 斯羅(南史同) 國小 不能 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名 募秦(按 南史 通志 太平御覽 皆作姓慕 名秦 通考 引梁史 亦同且云 未詳 易姓之由 新羅 金姓相承已久 不應于梁時 忽稱 姓慕 考 中國人本稱秦人 此慕秦二字 當為書語 非姓名也) 始使使 隨百濟 奉方物『양서(梁書) 』에는 “신라는 본래 그 선조가 진한辰韓이다. 진한辰韓은 또한 진한秦韓으로도 부른다. {양나라와} 서로 만리가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진秦나라 사람들이 부역을 피해 마한(다른조에서 이미 보았다)에 찾아오자, 마한은 그 사람들에게 동쪽땅을 떼어 주어 살게 하였다. 진한辰韓은 처음에 6개국이었는데 점차 갈라져 12개국이 되었다. 신라는 그 중 하나이다. 그 나라(신라)는 백제의 동남에 있다. 동쪽 끝은 대해이다. 남과 북은 고구려 백제와 접한다. 위魏나라 때는 신로, 송宋나라 때는 신라 혹은 사라(남사와 같다)로 불렀다. 나라가 작아서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빙할 수 없었다. 보통普通 2년 이름이 인 왕(살피건대 남사 통지 태평어람 모두 성이 , 이름이 으로 기록되어 있다.  통고 通考 에는 양사梁史를 인용하면서 ‘또한 이와 같다’ 라고 하였는데, 성이 바뀐 연유를 자세히 모르겠다. 신라는 씨가 왕위를 계승한지 오래되었는데, 양나라에 이르러 갑자기 성을 이라 하니, 고찰해 보건대 중국인을 본래 진인秦人이라 부르는데 이 두 글자는  책에서 그렇게 되어 있으나 당연히  성명은 아니다)이 처음으로 백제를 따라 사신과 방물을 보냈다.”고 되어 있다.

[양서]에 기록된 신라관련기사는 [후한서-동이열전]한반도3한이 존재할 당시에 기록된 [삼국 위지 동이지전][한단고기]내용과 같다. 즉, 중국에서 진시황의 노역을 피하여 중국에서 한반도 지역으로 도망온 단군조선의 진한유민들을 마한이 수용하여 마한동쪽인 경상도지역에 살도록 해 주었으며, 진한6촌이 성장하여 12개의 나라(지금의 읍단위)로 발전했는데, 그 속에 신라 흉노족이 들어 있다는 내용이며, 결국 부여의 박혁거세를 왕으로 내세운 진한으로 출발한 신라는 흉노족 김씨왕족에게 왕권이 넘어갔다는 내용이다.
대칸 09/01/12 [14:14] 수정 삭제  
  강의시 배포된 책을(3권) 구입하거나, 받아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일 회신 kanmkan@naver.com
광릉숲 김창호 09/07/22 [14:13] 수정 삭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 바랍니다.
몽고학생 20/01/10 [19:31] 수정 삭제  
  대한민국 신라혈통은 휸노족들의 노예 흉노부족들이 맞습니다. 우리 국가에선 이것이 정통입니다. 중국역사도 가르킵니다 대한민국 동부권에 존재했던 신라는 휸노족들의 노예 흉노민족들이 맞습니다 DNA도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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