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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우는 고문 휴우증에 쓰러졌다!!"

[확인 인터뷰] 한국정치 거목의 아들 최제완이 전하는 "아버지와 나"

이광표 기자 | 기사입력 2008/01/26 [00:11]

"최형우는 고문 휴우증에 쓰러졌다!!"

[확인 인터뷰] 한국정치 거목의 아들 최제완이 전하는 "아버지와 나"

이광표 기자 | 입력 : 2008/01/26 [00:11]
최형우 전 장관의 아들 제완씨 "대선출마 준비중이던 아버지의 뇌졸증은 고문 때문이었다"

최근 아버지 대를 이어 정치계 입문을 시도하는 자재들이 늘고 있어 주목되고 있는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이가 있다. 바로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의 아들 최제완씨이다. 그의 아버지 최 전 장관은 지난 1997년,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쓰러져 아직까지 투병 중에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대를 이어 정치인을 꿈꾸는 최제완씨에게 아버지는 매우 큰 존재로 남아있다. 지금은 투병 중에 있어 남들처럼 말씀도 못하지만 아직도 그에게 아버지는 거대한 산과 같다. 그리고 현실정치로 뛰어들려고 하는 지금도 아버지는 조언자이자 버팀목이다.
이런 그가 전하는 아버지 이야기와 정치인으로서의 꿈을 진솔하게 들어봤다.

다음은 최제완과의 일문일답이다.
- 투병중인 최 전 장관의 안부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아버지 얘기 좀 해달라.
▲고 최형우 전의원과 그의 아들인 최제완     ©유장훈 기자

▲ 올해로 아버지가 투병을 시작한지 10년이 됐다. 아버지가 쓰러졌을 당시 나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기에 매우 놀랐었고, 슬픔에 잠겼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픈 기억도 많다. 나는 1971년생으로 유신정권이 들어섰을 때 태어난 셈이다.

아버지도 정치를 일찍 시작하셔 36세에 초선 의원이 되셨는데, 당시 나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고, 몸이 혹사되는 것도 모른 채 아버지를 돕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던 어머니로 인해 8개월만에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있지 않아 유신정권에 저항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행됐고, 갓난아이 시절을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보내며 심한 폐렴과 후유증으로 수술을 두번이나 받아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피해를 많이 봤지만, 아버지를 원망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분명한 정치철학을 존경하며 나의 정치적 신념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어린시절을 회상해보면, '정치'와 우리 가족, 그리고 나와의 끈질긴 '굴레'는 계속되어왔다.

아버지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 7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하셨다. 내가 코흘리개였던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는 식당일을 하러 길거리로 나섰다. 나는 당시 왜 어머니가 고된 일을 하시는지, 왜 집으로는 정보과 형사들이 찾아오는지 알 수 없었다. 한때 '왜 우리 가족은 평탄하게 살지 못할까?'하는 회의감에 젖은 적도 있었고, 유학길에 올랐을 때는 아버지를 음해하려는 이들의 부정입학 공작에도 휩싸여 힘든 나날을 보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것이 나의 운명임을 받아들였고, 내 의지로 세상을 개척해야 겠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어린 시절 지켜봤던 정치에 대한 회의가 어느 순간 욕심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못 이룬 꿈 위해 현실정치에 뛰어든 아들 제완씨…"소신있는 정치하고 싶다"

- 최 전 장관이 문민정부 시절, 내무부 장관을 지내고 대선 출마까지 계획 중인 상황에서 뇌졸중이 찾아와 쓰러진 것으로 안다. 힘든 시간을 보내진 않았나?
 
▲최형우 장관의 단란한 한때 모습.    ©유장훈 기자
▲ 1997년 3월, 내가 미국에 있을때, 아버님이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버님은 건강한 분이셨다. 평생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새벽운동을 하시던 분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말에 믿기 질 않았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소식에 절망했지만,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던 건 당시 대선 출마를 생각중이시던 아버지를 향해 일부에서 지나친 권력욕심에 무리가 찾아와 쓰러졌다는 말까지 나왔던 것이다.

이제와 처음 밝히는 일이지만, 당시 독일까지 가서 아버지의 진료를 부탁했는데, 학계에서 저명한 의사였던 당시의 독일 의사가 "둔탁한 무언가에 맞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순간 내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야당 시절 받은 고문이 병을 불러온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이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밀려오는 공허감을 잊기 위해 단순 노동을 탖아 나서기도 했다. 얼마 후 절치부심 끝에 미국에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게 됐고, 쓰러져 계신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모질게 마음을 다잡고 최선을 다했고, 아버지의 정치 역정을 생각하며 당당하게 살아왔다. 이제는 사업도 정상궤도에 올라왔고, 사업을 하면서 아버지의 정치적 투지와 불굴의 의지가 어디서 나왔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 사업도 성공했고,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걸었던 정치를 하려는 이유는 뭔가?   

▲최제완이 쓴 '아버지의 이름으로'   ©유장훈 기자
▲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통해 어깨너머로 정치를 배웠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통해 배웠던 가르침은 지금 내 정치관의 토양이 됐다. 많은 정치인들이 소신을 분명히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역량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로부터 배운 가르침이다.

어린시절 아버지는 집 문을 항상 개방해놨다. 당시 집을 찾아오는 손님 중에는 민원을 들고 오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삶이 보장되지 않은 비참한 민초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기도 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정치에 대한 욕심을 키우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가 보여준 소신 있는 정치를 하고 싶다. 오늘날 민주화와 산업화는 지나갔지만, 소신있는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훌륭한 정치지도자는 옳다고 믿는 '신념'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나, 체코의 하벨 전 대통령, 리콴유 전 싱가폴 총리,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등은 모두 소신을 지킴으로써 지지를 얻은 지도자였다.

거기에 더불어 미래지향적이고 글로벌 시대에 맞는 서비스 정치를 구현하고 싶다.

이제는 경제정치가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고 있다. 더 이상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서 갈등과 반목을 자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연행과 감금으로 고생하던 정치인으로 기억…"정치는 내 숙명" 

▲뇌졸증으로 투병 중인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과 그의 아들 최제완씨.     © 이광표 기자

- 정치인으로 결코 평탄하지 많은 않았던 아버지가 있었기에 주위의 걱정도 있지 않았나?

▲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용기를 많이 주신다. 주위 분들도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 뜻을 이어 정치할 것을 권유했다. 아버지가 이루고자 했던 남은 숙제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어머니가 직접 정치를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버지보다 강하게,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어미니야말로 아버지의 뜻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됐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간호가 더 중요하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처음에 나는 자식된 도리로서 아버지 뜻을 이어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가 못 다 이룬 일을 한다는 것이 내 숙명처럼 여겨졌다. 미국의 엘고어 시니어의 아들이 엘고어 이듯이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기로 결심했고, 더욱이 쓰러지기 전 아버지도 나에게 각별히 "제완아 네가 정치를 해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잊을 수 없다.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켰지만, 뜻을 펴지 못하고 정계를 떠나신 아버지를 이어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고 싶다.

내 아내도 처음에는 정치판이라는 전장에 뛰어들어 무거운 책임감과 짐만 떠 안게 될까봐 걱정했지만, 이제는 확고히 결심했다면 금뱃지나 달려고 거들먹거리지 말고, 좋은 정책을 가지고 훌륭한 정치인이 되어달라고 응원해주기도 한다.

성공한 사업가에서 성공한 정치인 꿈꾸다…"아버지의 꿈 나의 꿈 모두 이루고 싶다"

- 투병 중에 있는 아버지는 처음에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

▲최제완     ©유장훈 기자
▲ 사업이 궤도에 오른 후부터, 나는 언젠가 아버지께 내 소망을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해왔다. 지난해 봄으로 기억된다. 따뜻한 햇볕 아래 정원에서 나는 아버지께 "저는 이제 사업도 궤도에 오르고 했으니 이제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윽고 내 손을 잡더니, 와락 어깨를 끌어안고 큰 목소리로 "응, 그래, 그래"하시며 온 몸에 힘을 주고 계셨다.

감동하신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는 "집안에서 누군가 나를 이어 나라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일할 자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은근히 나를 지목해 오신 터였다.

나는 '아버지, 꼭 도와주세요"라고 큰 소리로 말씀드리며 아버지를 더욱 힘차게 끌어안았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쓰러지신 후에도 피나는 재활 노력을 기울였다. 아마도 그동안 속내를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허허벌판에서 아버지의 도움 없이 맨 손으로 사업의 길로 뛰어든 자식이 얼마나 불안하고 애처로웠겠는가. 그런 아들이 장성해서 당당히 아버지 앞에서 당신의 못 다한 뜻을 이루겠다고 말씀드리는 순간,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웃으셨다.

- 아버지의 꿈도 대신 이뤄줘야겠지만, 자신의 꿈도 궁금하다.

▲ 얼마 전 아버지와 나의 이야기를 담은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책을 발간하고,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 당시 아버지는 자신의 길을 이어가겠다고 밝힌 나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지금도 너무 기뻐하신다. 남들처럼 말씀도 잘 못하시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중학교 시절, 나는 어렴풋이 '아버님은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하실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힘든 시절을 보내며 사업에 정진해 성공도 맛 봤지만,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최형우의 아들'이라는 존재 의식이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평생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소신을 굽히지 않으셨다. 과연 누가 엄혹한 독재 정권시절에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겠는가? 오직 당신의 신념과 국민의 힘을 믿으며 꿈을 키워오셨고, 그 꿈을 이루셨다. 하지만 독재정권이 물러난 이후에도 훌륭한 정치지도자가 되기 위한 아버지의 꿈은 그치지 않았다.

 나 역시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위해 소신 있는 정치와, 늘 낮은 자세를 견지하고 국민을 섬기며, 글로벌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정치인을 꿈꾸고 있다. 그것이 아버지가 평생 쌓아오신 꿈과 내가 새로이 꿈꾸는 것들이다.  pyoyoyo@naver.com
 

[제휴=브레이크뉴스] http://www.breaknews.com/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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