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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 대무신왕 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

임동주서울대초빙교수 | 기사입력 2009/02/22 [15:17]

전쟁의 신 대무신왕 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

임동주서울대초빙교수 | 입력 : 2009/02/22 [15:17]
 
전쟁의 신(神) 대무신왕-

고구려 유리왕의 셋째 아들인 대무신왕(大武神王)은 그 특이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재위기간 중에 숙적(宿敵이었던 부여의 대소왕을 죽였고 정복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여 이웃의 여러 나라를 병합했다.

그는 어떤 왕이었길래 승승장구 고구려가 대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을까? 무예가 뛰어났던 것일까?
물론 주몽처럼 활을 잘 쏘았다면 전투에서 유리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세일즈에 귀재(鬼才)라고 해서 모두 다 기업 경영에 재능이 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기업 수장(首將)의 덕목은 상품 하나를 더 파는 것보다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사업 전략과 위기관리에도 빈틈이 없는데 있다.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왕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군사들과 백성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리더십과 지혜로움일 것이다.

김부식은‘삼국사기’에서 대무신왕을 ‘큰 지략이 있었다’고 했다. ‘삼국사기’를 보면 그것이 결코 과찬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무신왕 3년에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던 부여왕 대소가 기이한 선물을 보내온다. 머리는 하나에 몸은 둘인데 색깔은 붉은 까마귀였다. 부여의 사신은 대소왕이 고구려와 부여를 아우를 징조라는 해석도 덧붙여 전한다. 고도의 심리전인 셈이다.
만약 여기서 호통이나 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소문이 퍼져 민심이 크게 흔들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급박한 순간에 대무신왕은 신하들과 토론을 벌여 반박 논리를 이끌어낸다.

“원래 까마귀의 색인 검은색은 북방(부여)을 가르키지만 지금은 붉게 변해서 남방(고구려)의 색이 되었다. 게다가 붉은 까마귀는 길조로 치는데 부여에서 우리에게 왔으니 양국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는 것 아니냐?”

대소왕은 주(周나라 무(武)왕이 은(殷)나라를 칠 때 붉은 까마귀가 나타나 승리했다는 고사(古事)를 빌어 고구려의 기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대무신왕은 음양오행의 방위색 관념에 따라 거꾸로 해석하여 대소왕의 코를 납작하게 했다.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도 대무신왕은 간단한 꾀로 물리친다. 왕은 위나암성에 들어가 성문을 닫고 수십일 동안 농성했다. 한나라 군사는 성 안에 물이 귀할 거라 예상하고 포위를 풀지 않았다.
이 때 대무신왕은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적장에게 보내 성 안에 물이 충분하다는 것을 보였다. 식량이 바닥난 한군은 크게 놀라 겁을 먹고 즉시 퇴각했다. 왕은 좌원까지 추격해 이들을 몰살 시켰다. 삼국사기는 “한군 10명 중 8-9명이 죽었으니 살아 돌아간 자가 드물었다.” 라고 당시 고구려군의 위용을 서술했다.

두 가지 에피소드는 대무신왕이 위기 때마다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음을 보여준다. 현재 경영의 구루로 존경받는 하워드 가드너는 “훌륭한 리더십은 창의적인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대무신왕은 자신이 뛰어난 지략을 갖고 있었지만 언제나 신하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이끄는 현명한 군왕이었다. 오늘날도 잘 나가는 기업은 수평적인 토론 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반면 CEO들의 고집불통 리더십은 기업을 도산에 이르게도 한다. 예를 들면 리콜이 발생했을 때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하니 진정한 리더십의 요소로 德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대무신왕의 경영은 덕의 리더십이었다. 왕은 즉위한지 5년 되는 해에 부여와의 전쟁에서 대소왕을 죽였으나 부여군의 반격으로 많은 군사를 잃는다. 이때  왕은 자신의 과욕으로 피해를 많이 입었음을 시인하고 전몰자 가족을 위문했다. ‘삼국사기’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왕의 덕에 감격하여 너도나도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를 원했다.’

이렇게 덕의 리더십을 발휘하니 해를 넘기지 않아 사람들이 귀부(歸附)하기 시작했다. 부여 대소왕이 죽자 그 사촌 동생이 민호 만여 명을 이끌고 투항해 오기도 했다. 대무신왕은 항상 소국을 정벌할 때 백성들을 상대로 노략질을 못하게 했다. 그러자 이웃 나라의 왕들이 차례로 나라를 바쳤다. 이미 백성들의 마음이 대무신왕에게로 기울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완벽한 리더십에도 흠은 있다. 김부식은 ‘사론’에서 대무신왕은 모함하는 말만 믿고 아들 호동왕자를 죽게 했으니 어질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사연은 이렇다.
 
낙랑왕 최리는 놀러온 호동이 고구려 왕자임을 알고 자신의 딸 낙랑공주와 정략적으로 결혼시킨다. 호동은 낙랑공주를 사주하여 적의 침입을 알리는 자명고 북과 피리를 부서뜨리게 한다. 이로 말미암아 호동은 낙랑국을 정복할 수 있었다.
둘째 왕비의 아들인 호동이 낙랑을 정복한 공로로 태자로 봉해질까 안달을 하던 첫째 왕비는 “호동이 나에게 음행(淫行)하려고 한다”고 왕에게 모함한다.
이에 호동은“내가 변명을 하면 어머니의 악행을 드러내어 부왕에게 근심을 끼치게 된다. 비록 생모는 아니지만 어머니인데 불효를 하는 셈이다.”고 말하고 조용히 자결한다.
 
김부식은 이에 대해 “자고로 부모의 작은 매는 맞을지언정 큰 매는 피해야 한다.”고 하며 호동의 경솔한 행동을 크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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