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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과 요서의 구분은 현 산서성 분하"

요동군과 요서군은 한서지리지에 명기되어 있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4/21 [14:37]

"요동과 요서의 구분은 현 산서성 분하"

요동군과 요서군은 한서지리지에 명기되어 있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04/21 [14:37]
본 글은 원래 3부작으로 기획되었으나 장문이라 (5부)로 나뉘어 연재되겠습니다. 

(1부) 식민사학계의 잘못된 이론과 민족사학자의 이론
(2부) 역사동호인들의 이상한 요동.요서 이론
(3부)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현 산서성 분하
(4부) 안시성, 환도산성, 평양성이 있는 요동은 어디?
(5부) 당태종이 빠진 요택으로 본 요수는 어디인가?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현 산서성 분하로 보인다. 그 이유는 한서지리지에 요동군과 요서군에 대해 분명히 언급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서에 숱하게 등장하는 요동과 요서라는 지명은 바로 한서지리지에 언급된 요동군과 요서군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1. 우선 ‘요동’이란 단어는 어떤 한 지명이 아닌 당시 고구려를 통칭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즉 수양제나 당태종이 사용한 ‘요동정벌’이란 단어는 ‘고구려정벌’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고구려의 도읍이 바로 이 요동군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서를 읽을 때 고구려 전체를 나타내는 요동이라는 단어와 한 지명을 나타내는 요동을 정확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2. 고구려 때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분명 요수(遼水)가 맞다. 그러나 당시 요수는 현 요녕성 요하가 아니라, 당시 압록수(鴨淥水)나 대요수(大遼水) 또는 시대에 따라 마자수(马訾水)나 당취수(唐就水)로 불렸던 산서성에 있는 현 분하(汾河)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현 분하는 산서성 북부에서 발원해 산서성을 동서로 가르면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면서 산서성의 주요 도시인 태원시와 평요현과 임분시의 서쪽을 지나, 현 후마시 부근에서 다른 강과 합쳐져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화염산 남부를 흐르다 하진시에서 황하로 들어가는 산서성의 주 강이다.

결론적으로 요서는 산서성 남부의 서쪽인 운성시 영제시 일대를 의미하고, 요동은 산서성 남부의 동쪽인 임분분지 일대를 의미한다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원래 기준이 요녕성 요하가 아닌 산서성 분하이므로, 식민사학계가 국내성으로 비정한 현 길림성 집안과 평양성으로 비정한 대동강 평양이 거짓 이론이라는 것이 명확해 진다. 따라서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과 평양성과 환도산성과 안시성도 산서성 남부에서 찾아야 옳을 것이다.

▲  산서성은 고구려와 단군조선의 핵심 강역이었다.

과연 필자의 결론이 맞는지 하나하나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선 ‘한서지리지’와 ‘신당서 동이열전’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한서지리지의 기록
위 고구려의 초기 강역인 유주를 한서지리지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유주는 12개 군으로 형성된 행정구역이었다. 이미 (1부)에서 7개 군에 대한 원문을 언급했으므로 (3부)에서는 요서군과 요동군에 대해서만 다시 한번 언급하기로 한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영지에 고죽성이 있다)。莽曰令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당취수=마자수=압록수)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辽东郡 요동군) 秦置。属幽州。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襄平(양평)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대요수)出塞外,南至安市(안시)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辽阳(요양)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한서지리지에 언급된 유주의 지명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과 인터넷 자료로 하나하나 검색해 들어가면 아래와 같이 비정할 수 있다. (지명 비정에 있어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다)

거용, 창평, 탁록 등의 (상곡군)은 산서성 운성시 염지 부근의 해주(海州) 일대
대갈석산이 있는 (우북평군)은 운성시 예성(芮城)시 일대
천주가 있는 (어양군)은 연나라의 수도로 하남성 일대
요산, 요수, 대요수, 마자수, 서안평 등이 언급된 (현토군)은 임분시의 서부 
패수, 수성, 대방 등의 지명이 있는 (낙랑군)은 운성시 동부와 심수(沁水) 사이 
 
▲ 현재 지도에 그려져 있는 운성시에 있는 포주진과 해주진. 포주진에는 포주고성 유적지가 아직도 있고, 해주는 치우천황의 탁록이 있는 상곡군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위 요서군과 요동군의 위치는 아래와 같이 비정할 수 있다.
고죽성, 비여(=노룡) 등이 있는 (요서군)은 운성시 서부 영제(永濟)시 포주(蒲州) 일대 
양평, 대요수, 안시, 요양, 서안평 등이 있는 (요동군)은 분하 동쪽 임분시 일대

위와 같이 지리 비정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한서지리지의 기록에 유주의 1개 군인 요서군(遼西郡)의 영지(令支)에 고죽성(孤竹城)이 있다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고죽성은 청절지사(淸節志士)인 백이.숙제의 나라였던 고죽국이 있던 성이다. 
 
▲  유주의 7개 군을 지도로 그리면 위와 같다. 이 지리비정은 약간의 오차가 있을 뿐 반론의 여지는 없다고 본다.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은 어디인가?  

백이.숙제는 고죽국의 두 왕자로 부왕이 죽자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 고죽국을 떠나게 된다. B.C 1122년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은나라의 마지막 "주왕"이 미인 달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은나라의 서쪽 땅을 지키던 제후였던 "무왕"이 정권전복을 위해 수도를 향해 군사 5만을 동원하여 공격해 들어간다. 즉 군사쿠데타였던 것이다.

이때 고죽국의 왕자인 백이와 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아버지가 죽었음에도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전쟁을 하려 하니 어찌 효(孝)라 할 수 있으며, 신하가 임금을 죽이려 하니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하며 눈물로 만류를 권유한다. 그러나 무왕은 맹진(하남성 황하 남쪽에 있는 도시)에서 황하를 건너 쳐들어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다.

백이와 숙제는 인륜을 저버린 주무왕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며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죽는다.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백이.숙제를 청절지사(淸節志士)로 높이 칭송하게 된다.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가 그동안 우리 고대사의 최대 미스테리 중의 하나였다.
 
▲   동이족 즉 우리의 조상이었던 고죽국의 두 왕자 백이와 숙제

사기 권26 봉선서 제6의 주에 따르면, “(정의) 괄지지에는 고죽 옛 성이 평주 노룡현 남쪽 십리에 있다. 은나라 때의 고죽국이다. ((正義)括地志云 孤竹古城在平州盧龍縣南一十里 殷時孤竹國也”라는 기록이 있고, 수서 권67 열전 배구전(裴矩傳)에는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으로 주나라 때 기자에게 봉해진 곳이다 (高麗之地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于箕子)”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기록은 고죽국이 있던 곳을 주나라 때 기자에게 봉해진 곳이라는 기록인데, 기자는 단군조선과 주나라의 중간지점에 살았다고 보면 되므로 고죽국의 위치가 밝혀지면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강역도 저절로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고죽국이 있던 지역은 과연 어디일까?

중국에서는 이러한 고죽국이 있던 노룡을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라고 한다. 그리고 북경과 심양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변에는 “하북성 노룡현은 백이.숙제의 고향 (河北盧龍 夷齊故里)”라는 입간판을 세워놓고 공개적으로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노룡현은 명나라 영락제가 역사 왜곡을 위해 지명을 조작한 도시라는 것이 중국 기록에 엄연히 나와 있다.

▲   북경-심양간 고속도로변에 세워진 역사왜곡용 입간판. 이 간판은 산서성 영제시에 세워져야 역사적 사실과 맞다
▲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는 비석. 중국은 이 비석이 있는 산을 수양산이라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
▲  '이제고향;이라는 비석이 있는 10m 높이의 동네 뒷산. 고사리는 커녕 동네 개들의 개똥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기 권61 백이열전 제1 에 따르면 “집해에서 마융이 말하길, 수양산은 하동 포판 화산의 북에 있으며 하곡지중(강이 꺾이는 곳)에 있다 (集解 馬融曰:「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고 분명히 기록이 되어 있다. 옛날 섬서성에서는 산서성을 하동(河東)으로 불렀다. 그리고 물길이 꺾이는 곳은 어디인가?
 
▲   청나라 때 만든 지도인 대청광여도에도 황하 굴곡 지점에 수양산과 백이.숙제의 묘가 그려져 있다.


청나라 때 작성된 대청광여도에도 산서성 최남단 황하 굴곡 지점에 백이.숙제의 묘와 수양산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현재 중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현대 지도에도 백이.숙제의 묘와 고죽성(孤竹城)이 있던 포주(蒲州=蒲阪 포판)가 명확히 명기되어 있다.

현재 유적지로 남아 있는 포주고성(蒲州古城)이 고죽성이 있던 옛 성터로 보인다. 위 한서지리지 요서군의 한 지명인 고죽성이 있던 영지(令支)의 현 지명은 산서성 운성시에 속해 있는 영제시(永濟市)이다. 따라서 황하까지가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는 것을 백이.숙제의 묘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  현재 지도에도 백이.숙제의 묘와 포주가 그려져 있다. 초록색 글씨로 작게 보이는 것을 크게 타이핑했다.
▲  현재 지도를 보고 찾아가 발견한 백이.숙제의 묘. 이곳이 바로 고죽국의 땅이며 유주 요서군이 있던 지역이다.  
▲ 영제시 백이.숙제의 묘 옆의 지명은 수양이다. 이유는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백이.숙제의 무덤이 있는 요서군의 위치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고죽국의 두 왕자 백이.숙제의 무덤이 얼마 전 필자에 의해 산서성 영제시에서 발견됨으로서 한서지리지 요서군의 위치가 산서성 운성시 영제시라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지금까지 동아시아 역사학계의 기존 이론을 깨는 즉 우리 역사의 진실을 찾는 쾌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백이.숙제의 묘가 산서성 황하 굴곡지점인 산서성 영제시에서 발견됨으로서 이 나라 식민사학계가 주장하고 있는  “요서는 현 요녕성 요하 서쪽”이라는 통념은 거짓이라는 것이 백일하에 밝혀졌다. 그리고 대부분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요서는 요하 서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옛날 요하는 하북성 난하”라는 이론도 이제는 접을 때가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민족사학임을 사칭하는 일부 네티즌들의 엉터리 주장인 “요서는 산서성 태행산맥에 있는 요(遼)라는 지명을 기준으로 그 서쪽의 중국대륙 전부가 요서이다”라는 근거 없는 엉터리 이론을 폐기처분할 때가 되었다.

요서군은 한서지리지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듯이 76,000호에 인구 약 35만 정도의 1개 군이다. 이런 요서를 일부 네티즌처럼 산서성을 포함한 중국 대륙 전체의 서쪽으로 비정하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비정이 아닐 수 없다.
 
누구든 앞으로 역사를 논하면서 지리비정을 할 때 아무렇게나  자기 생각대로 임의대로 주장하지 말고 고대사서의 기록을 차분히 읽어보고 그 근거를 가지고 지리비정을 했으면 하는 게 필자의 바램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일개 개인의 노리개 감이 아니며 역사에는 조상의 혼과 민족정신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 영제시 포주진에 아직도 남아있는 포주고성은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성의 유적지로 보인다.
▲  3,000여년 전의 유적으로 보이는 포주고성은 고죽국의 유적 임에 틀림없다. 멀지 않은 곳에 백이.숙제의 묘가 있다.

▲ 산서성 남부에 있어야 할 요서군이 엉뚱한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어져 왔다. 이제는 역사 강역을 바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곧 (4부)가 이어집니다.
대칸 09/04/21 [16:38] 수정 삭제  
  그렇다면 북경도 고구려의 유적이랄 수 있는데 주변의 수와 당을 맞이한 고구려 성을
소개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물론 고구려성의 특성인 치와 해자(사항에 따라 틀리겠지요)가 있는...옛 자료나 성터라도..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성 훈 09/04/21 [22:16] 수정 삭제  
  수양제와 당태종과의 전쟁은 산서성 남부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그래서 북경과 수.당 전쟁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따라서 산서성에는 많은 옛 고성들이 북경 주변에는 별로 없습니다. 나중에 평요고성을 설명하면서 치와 해자에 대해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asdfa 09/04/21 [23:00] 수정 삭제  
  중국 문화대혁명때 사람의 담이 얼마나 크면 땅의 수확량이 얼마나 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성훈님의 담이 좀 작은것 같습니다.광동성이나 광서성 같은데 가서 둘치면전체중국땅이 다 고구려 땅이 될턴데
무식한 놈은 봤지만 이렇게 무식한 놈은 첨이고
낮가죽 두꺼운 놈을 봤지만 이렇게 두꺼운 놈도 첨이다.
이놈의 나라는 개나 소나 다 글을 쓰지 법으로 미친놈은 글을 쓰지 말게해야 하는데
김성겸 09/04/22 [20:05] 수정 삭제  
  지금의 "북경"과 "당산"간에 고구리의 초도{동도}가 있었고
"북경" 서방 인근인 "회래"지경에 고구리의 서도가 장수대제가 평양대성으로 이도할 때까지 고구리의 주도성이었음을 알게 되면,
성훈 님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얘기는 하시기 곤란할 것입니다.....
성훈 09/04/22 [23:48] 수정 삭제  
  한서지리지와 신당서 열전 동이에 나오는 기록의 지명을 고죽국 왕자인 백이.숙제의 묘가 밝혀주었고, 게다가 포주고성이라는 유적지와 수양이라는 지명과 대청광여도와 현대 지도까지 근거가 있는데도, 믿지 못하고 엉뚱한 주장을 하시는 분들은 역사를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북경 근처에 고구려의 도읍을 갖다 놓으면 역사 기록이 절대로 안 맞습니다. 김성겸선생님 미안합니다만 고정 관념을 버리셔야 될듯 합니다. 이미 왜곡된 중국 지도로만 역사의 지명을 비정하면 역사의 톱니바퀴가 절대로 맞을 수가 없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본인의 자유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동도 서도 이론을 자꾸 들먹거리면 전 김성겸선생님을 다시 평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김성겸 09/04/23 [12:39] 수정 삭제  
  성 훈 선생님;
저에 대한 평가는 선생님의 손 안에 있을 것이나,
안타깝기는 서로가 매일반일 것입니다.

제가 보내드렸던 파산 부산 부산과 그 이전 기록 부산을 잊지 않으셨으면 하며,
전대의 구리읍{현} 구리성과 후대의 구리천제국 등에 대한 고려도 반추하시고,
어떠한 "한서지리지도" "한서"본기보다 앞설 수는 없을 것이며 역시 조작으로 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입니다. 예단은 금물일 것입니다....

힘들여 하셨던 귀한 일 중에
혹여 발을 잘 못 디딘 곳이 없으신지 주변에 널린 것이 함정들이니 매번 주의하시리라
생각할 것입니다.
나중에 추모경이 출간되거든 제 판단이 아닌 굵은 글자들을 일별하여 주시기만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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