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길 역사소설 옥전여왕(玉田女王)] 연합회의 10회
살을 에일 것 같던 된바람이 차츰 기가 꺾이자 그 틈새를 타고 샛바람이 끼어들었다. 이제 계절은 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대가야의 가실왕은 가야연합회의를 개최하기로 하고 각 가야의 왕들을 소집하였다.
가야 연합은 대가야를 필두로 열두 국의 나라가 독립하여 나름대로의 국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가실왕의 친서가 전해지자 다라국, 졸마국, 신반하국, 탁기탄국, 길손국, 사이기국, 자타국, 탁순국, 안라국, 고차국, 금관국에서 왕과 대신, 장군들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속속 상가라도로 모여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라와의 전투에서의 많은 전사자와 군비 손실 그리고 다라국 문룡 왕자의 전사로 인해 표정들이 밝지 못했다.
연합회의는 가야맹주국의 왕인 가실왕의 주재로 시작되었다.
“금번 신라와의 일전에서 패한 것을 심히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이번에야말로 전기 가야에서 패한 굴욕을 설욕하고, 잃었던 옛 가야의 영화를 되찾고 싶었는데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처지를 한탄하며 마냥 한 자리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승세를 탄 신라가 언제 또 군사력을 동원하여 우리 가야를 향해 창 뿌리를 겨누어 올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야제국 여러 왕들은 소강상태에 머물고 있는 이때 군사력을 더욱 증강하고, 연합의 단합을 도모하여 언제 어느 때 신라가 도발하더라도 쾌히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가실왕은 자리에 모인 가야연합의 왕들에게 가야의 합심과 군사력을 증대 줄것을 힘주어 말하였다.
“이번 연합군의 패인은 병력이나 무기의 열세 때문에 패한 것이 아닙니다. 성왕의 죽음이나 환산성의 패배 모두가 정보부족 그리고 안온한 정신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 여겨지옵니다. 구진베루는 백제군이 여러 번 공격하여 빼앗으려 하였으나 실패한 신라군의 요새였고, 미묘한 지형적 형국으로 둘려져 있는 곳이므로 그곳에 대한 경계의 끈을 놓지 말아야했었습니다. 선발대를 풀어 적의 동태를 미리 파악하고, 전투 병력을 소수라도 배치해 놓았더라면 성왕의 죽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삼년산성으로 전군을 동원하여 쳐들어 갈 때도 신라군의 움직임을 조금이나마 눈치 채거나 첨병으로 하여금 적의 동태를 추적 하였었더라면 구천강가 한복판에 노출되어 무차별 적의 화살에 맞아 죽거나 복병에 의해 기습당하여 일방적으로 쫒기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두를 돌이켜보면 이번 전투의 패배는 불을 보듯 명확한 것입니다. 적의 동태를 살피지 않고, 계획성 없이 독단적인 판단만으로 어찌 전투에 이길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기 참석하신 여러분들께서는 이 점을 각별히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산성 전투에 연합군 좌장으로 문룡 왕자를 도와 싸웠던 신렬 장군이 일어나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이번 전투의 패배는 군사력이 아니라 전술의 패배였음을 역설 하였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신렬장군의 이야기에 모두 고개를 숙이고 이번 전투의 패인에 가슴 아파하였다.
“성왕의 죽음이나 문룡 왕자의 전사나 우리 모두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일을 거울삼아 성급한 판단이나 일시적 감정으로 사태를 그르치는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실왕이 좌중을 둘러보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이 기회에 커다란 사찰을 세워 전사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왕생극락하기를 빌어줌이 산 자들이 할 일이 아닌가 사료되옵니다.”
이번 전쟁에 전사자를 가장 많이 낸 사이기국의 의령왕이 일어나 전쟁터에서 회생당한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큰 도랑을 지을 것을 제안하였다.
“우방국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바친 왜군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킨메이 천황에게도 애도의 친서를 보냄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길손국의 단성왕도 왜에 대한 예의로 흠명천황에게 친서를 보낼 것을 제의 하였다.
“옳으신 말씀들입니다. 전쟁의 후유증이 크기는 하지만 여기 모이신 가야제국의 여러 국왕들과 가야를 이끌어 가시는 고위관리들의 의견을 모아 하루 빨리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가실왕은 가야제국 왕들의 의견을 골고루 수렴하여 전쟁 패배의 후유증을 떨쳐버리고 가야제국의 중흥을 위해 매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가야제국의 회의는 당장 발에 떨어진 국가 안위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라국 한지왕께서 붕어 하셨고 대를 이을 문룡 왕자님도 전장에서 전사하셨습니다. 이제 다라국은 주인 없는 나라가 되어 허공에 뜨게 되었는데 장차 다라국의 사직을 어떻게 보존 하여야 하겠습니까?”
탁순국의 창원왕이 일어나 한꺼번에 두 주인을 잃은 다라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주위의 왕들에게 자신의 소견을 털어 놓았다. 창원왕은 자신의 둘째 서정공주와 문룡 왕자와의 혼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우리 졸마국에서는 다라국 백성들의 한숨소리가 귀에 드려오고 있습니다. 다라국에 하루 빨리 주인이 나타나 백성들의 탄식을 어루만져 예전의 평화스럽던 나라로 되돌려 놓아 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졸마국 함양왕은 다라국의 현재 상황이 매우 위축되어 있고, 절망적이라고 말하였다.
“잠시나마 병천왕께서 다라국을 잘 이끌어 오셨으니 그대로 다라국의 왕위를 이어가심이 어떠하신지요?” 가실왕이 한지왕의 서거 후 다라국을 무난하게 섭정해 왔던 병천왕에게 계속해서 다라국의 왕으로 남아줄 것을 권하였다.
“아니옵니다. 짐은 나이가 들어 나라를 이끌 힘도 없사옵고, 그동안의 국사에 매달리느라 심신이 매우 지쳐 있사옵니다. 이제 고향에 돌아가 산천과 벗하며 여생을 조용히 마치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망이옵니다.”
한지왕의 아우인 병천왕은 왕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그렇담 어찌해야 좋소? 한지왕에게는 아들이 문룡왕자 하나뿐이었는데 후사를 내세울 사람이 없으니.........?” 가실왕을 비롯한 주위의 왕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야제국의 여러 왕들에게는 훌륭한 왕자가 많으니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다라국을 맡기심이 어떠하온지요?”
신반하국의 초계왕이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도 그리 그른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민간에서도 후사가 없으면 양자를 데려오지 않습니까.”
옆에 있던 탁기탄국의 영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이옵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한지왕께서 아드님은 문룡 왕자 한 분을 두셨으나 슬하에 세 명의 공주님을 남기셨습니다.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의 세 공주님은 일찍이 백제나 신라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습득하였고, 무예도 어느 남자 못지않은 기량을 갖춘 씩씩하고 기개 넘치는 낭자들이옵니다. 이 세 공주님 중 한 분을 선택하여 선왕의 대를 잇게 함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병천왕은 왕자대신 공주를 왕으로 내세울 것을 피력하였다.
“공주를 ........?”
좌중에 모인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병천왕을 바라보았다. 가야 역사상 이제껏 여왕이 등극한 예는 없을뿐더러 누구도 그런 생각을 가져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세분 중 어느 한 분이 왕이 되시더라도 어느 남자 분 못지않게 선정을 베풀어 나갈 것으로 사료됩니다.”
병천왕이 힘주어 말하였다,
“하지만 가야 역사상 여인이 왕이 된 바는 없질 않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판국으로 강력한 군주가 필요한 터인데 연약한 여인이 왕이 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지 않을까요?”
고차국 고성왕이 고개를 저으며 여왕 등극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빗방울이 바위를 뚫습니다. 오히려 부드러움으로 슬픔에 빠진 백성들을 어루만진다면 다라국은 훨씬 빠르게 예전의 화평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병천왕은 자신의 주장을 역설하였지만 좌중 여기저기에 부당하다는 목소리가 더 많이 새어 나왔다. “자, 이제 그만들 하세요. 다라국 사정은 병천왕이 제일 잘 아실테고, 공주가 왕으로 등극한다는 것도 새롭고, 참신한 착상이란 생각이 듭니다. 꼭 남자만이 왕이 되라는 법도 없질 않습니까? 병천왕께서는 세 공주 중 어느 공주를 왕으로 모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가실왕은 소란스러운 좌중을 진정시키며 병천왕의 말을 두둔하고 나섰다.
“제 복안으로는 이제 방년 십팔세인 막내 목연 공주를 마음에 두고 있사옵니다.”
병천왕은 건강하고 영명하며 매사에 적극적인 셋째 목연공주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이왕지사 말이 나왔으니 병천왕께서는 온 나라 백성들에게 왕의 탄생을 알리고, 빠른 시일 안에 즉위식을 거행하도록 준비하세요. 좌중의 여러분들도 다라국 새 왕의 탄생을 축하하도록 합시다.“
가실왕이 파안대소를 터트리며 즐거워하자, 이제까지 고개를 갸웃하던 사람 모두가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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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문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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