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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성도 폭격으로 무너져 내려

[나고야 여행기 2] 문화재파괴와 복원 사이에서

김병섭 기고 | 기사입력 2007/09/11 [09:52]

나고야성도 폭격으로 무너져 내려

[나고야 여행기 2] 문화재파괴와 복원 사이에서

김병섭 기고 | 입력 : 2007/09/11 [09:52]
 나고야성도 폭격으로 무너져 내려

[나고야 여행기 2] 문화재파괴와 복원 사이에서

작성일 : 9월 10일

5일 아침. 6시경 눈을 떴다. 어제 한 2시경에 잔 것 같다. 친구는 일어나자마자 씻고 회사로 향했다. 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일어나서 한 일이 설거지였다. 친구가 일주일 정도 밀린 설거지를 끝내고 아침 겸 점심으로 짜파게티를 끓여 먹었다.

나고야에 어떤 관광정보도 가지고 오지 않은 필자였다. 고작해야 나고야성이나 보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다. 어차피 나고야(名古屋)에는 몇 번 더 올 것이니까 천천히 보기로 하자. 숙소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들으니 나고야 근처에도 관광할 만한 곳이 많다고 한다. 이건 다음으로 미루자.

필자는 올해 초에도 나고야를 다녀간 적이 있었다. 사법시험에 붙은 친구가 한번도 외국에 나간 적이 없으니 이번에 꼭 한번 같이 가자고 하는 바람에... 설이 지난 다음 바로 일본으로 넘어 온 것이었다. 급박하게 비행기표를 구하다 보니 오사카(大阪)행 비행기는 없었고... 나고야로 오게 되었다. 나고야에 있는 친구도 보고 겸사겸사하자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었다. 여행을 같이 한 친구가 일본을 선택했던 이유는 필자가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알고, 비자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는 일정상 나고야를 들렸음에도 나고야성(名古屋城)을 밖에서만 보아야 했다. 귀국 비행기는 뛰어서 간신히 탈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었다.

성(城)은 21세기 들어서 단연 필자의 관심사항이었다. 우리나라 성을 찾다가 고구려 산성을 보러 만주까지 답사를 다녀온 바 있다. 화성의 영어표기를 두고 의문을 갖게 된 필자는 성에 대한 정의를 다시하게 되었으며, 단순한 영어표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역사학자와 일반 국민의 무지가 저런 영어표기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밀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이미 오래전부터 한 바 있다. [아래 관련 글 참조]

우리의 성은 일부 군사적 요새(fortress)나 궁성(palace)을 제외하면 대부분 성곽도시(wall city)이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 성은 영주의 집(castle)이다. 동양에서는 둘 다 城이므로 비교대상이 되지만, 서양과 비교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한다. 우리의 성은 유럽의 wall city와 일본의 성은 유럽의 castle과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도 우리와 같은 도시로서의 성, 그리고 우리의 고유한 성 형태인 산성(山城)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막부시대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도시로서의 성과 산성으로서의 성은 없어지고 영주의 집으로써의 성이 존재하게 되었다. 일본에도 백제시대 지어진 산성이 몇 군데 남아있다고 한다.

여기서 사족이지만 잠시 역사 이야기를 하자면 삼국시대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는 없었고, 이 일본의 섬들은 우리 한민족이 개척한 신천지였다. 그 중에서 백제에 의한 개척이 가장 왕성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왕 시절 백제는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는데 부여 계승을 표방한 것이다. 부여 계승을 표방한 나라에는 또한 고구려가 있다. 광개토태왕 비석에는 북부여를 계승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 두 나라가 부여를 계승했다면 신라는 조선(선비)을 계승한 나라다.

남해경 시대소리 발행인에 따르면 한민족의 역사는 이처럼 부여와 선비의 대립과 협력으로 구도가 나뉘어 진다고 한다. 사실 당나라의 지배세력이 선비족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삼국시대 말기 고구려(대륙 부여)-백제(반도 부여)-왜(열도 부여)와 당(대륙 선비)-신라(반도 선비)의 십자동맹 체제도 부여와 선비의 대립으로 분석이 가능하다.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를 일방적인 백제 우위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그건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반도 부여와 열도 부여는 혈연관계였기 때문에 서열에 따라 반도 부여가 위일 수도 있고 열도 부여가 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 반도에는 신라 중심의 역사, 즉 선비(조선) 중심의 역사가 남게 되었고, 부여의 적통을 가져간 열도 부여는 부여 중심의 역사를 기술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라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고대 한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부여-선비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이 두 책에서도 밝혀낼 수 없는 것이 있음은 분명하다.

사족이 길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이제 그 원한을 풀고 미래를 향해 같이 나가야 할 기로에 서 있다고 본다. 우리는 언제나 일본에게 퍼 주고 침략 당한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부여(일본)는 신라(한국)만 생각하면 치를 떤다. 속국이었던 신라가 백제 성왕의 목을 배어 금성(金城, 경주)의 길 한가운데 박아 놓고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한 그 치욕을 부여인들이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반도 부여를 멸망시켜 열도 부여인들이 다시는 갈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놓은 그 슬픔, 그리고 고향을 도망쳐 나와 열도로 가야했던 반도 부여인들의 그 원한. 우리는 긴 역사의 시각에서 볼 때 분명 이 점도 집고 넘어가야 한다. 이제는 서로의 원한과 치욕을 벗어던져야 할 시점이다. 그러하기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어야 하며, 이를 토대로 서로 간에 털건 털고 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나고야성은 역시 많이 파괴되어 있었다. 필자는 일본의 성을 모두 4군데 답사하였는데, 일본의 대표적 성이라 할 수 있는 오사카성과 나고야성은 모두 미군의 폭격으로 원래 모습을 상실하고 있었다. 현재 나고야성에서는 혼마루전(本丸御殿) 복원을 위한 기금 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

오사카성도 마찬가지이자만 이 곳 나고야성 천수각도 하나같이 시멘트 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수각이 마치 박물관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건 복원이라고 할 수 없다. 왜 이런 일을 한 것인가? 일본의 천수각 시멘트 복원을 보면 박정희 전대통령의 광화문 시멘트 복원은 그나마 애교스러워 보인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천수각은 오사카 사람들이나 나고야 사람들에게 있어 상징적인 존재인데, 이 상징물이 없다는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우선 빨리 겉모습만 완성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천수각 건립으로 인해 원래 모습을 찾을 길은 영령 없어진 것이다. 저 천수각을 없애고 저 자리에 원래 모습으로 어떻게 복원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광화문은 해체되어 단시 복원될 수 있었고, 지금 그 일이 진행 중인 것이다.

▲     © 동두천시민연대
 [사진 1] 천수각(天守閣) 앞에 빈 공간이 2차대전 때 소실된 혼마루전(本丸御殿) 터

우리가 복원(復原)이라는 말을 쓰려면 최소한 원래 모습에 근접하기 위해 노력했을 때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서울 시장 시절 청계천 복원은 복원이 아니라 이명박표 청계천 재건이라고 해야 정확한 것이다. 특히 복원 시 복원재료는 원래의 것과 같거나 원산지가 같아야 하며, 정 구할 수 없을 때에는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해야 한다.

▲     © 동두천시민연대
[사진 2] “관계자외 출입금지” 나고야성은 복원 및 정비 공사 중

지금 경복궁 복원이 한창이다. 그런데 기둥을 세울 나무를 구할 수 없어 미국에서 수입해 올지 모른다는 문화재청의 발표가 얼마 전에 있었다. 사실상 수입해 와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발표였던 것이다. 참 한심한 작태일 수 없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누구보다도 문화재를 사랑하고 문화재 복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을 텐데 지금 국민을 상대로 무슨 추태를 보이는 것인가?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南에 나무가 없다면, 北의 도움을 받아 백두산 인근 지역에서 나무를 공수해 오는 방법을 취하라고 지적한 바 있다. 北의 도움을 받으면 될 일을 미국제 나무로 쓰려는 저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南과 北의 문화재 복원 합작의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현재 금강산 신계사(神溪寺)는 남측의 대한불교조계종과 현대아산(주), 북측의 조선불교도연맹이 공동으로 복원을 하고 있다. 만약에 미국제 나무로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더 이상 경복궁이라 할 수 없다. 그건 단지 궁궐 테마파크일 뿐인 것이다. 도대체 양주에 있는 대장금 테마파크와 무엇이 다른 건가?

천수각 꼭대기에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시내가 훤히 보였다.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12년에 성을 세웠을 때는 보다 더 훤히 내려다 보였을 것이다. 시내 어디에서도 이 천수각이 보였을 것이다.

천수각은 일본도시의 랜드마크(land mark)다. 그러면 우리 도시의 랜드마크는 무엇일까? 바로 산이다. 일본도 산이 많은 나라이지만 도시 주변에서 산을 좀처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의 대다수 도시는 산을 끼고 형성되어 있다. 특히 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도시는 웬만해선 다 산을 끼고 형성되어 있다.

▲     © 동두천시민연대
[사진 3] 나고야성 천수각에서 내려다 본 나고야시내

왜 그런 것인가? 고구려 평양성 이후 평지와 산을 연결해서 성을 쌓은 평산성(平山城)은 우리 성에 있어 중요한 성으로 부각되었다. 적으로부터 방어가 유리하면서도 접근성도 두로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산 계곡에는 언제나 물이 흐르기 때문에 식수가 해결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개성이나 조선의 한성도 다 평산성이다. 또한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삶의 터전을 잡는 방법도 일조했음은 물론이다. 산의 남쪽 기슭에 터를 잡아 북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을 막았고, 지형을 이용하여 높은 곳에 집이 들어서니 자연히 랜드마크가 되었고, 평지에서는 농사를 지었다. 내 고향 동두천에서 원주민이 살던 곳, 지금은 미군기지가 들어 선 바로 그곳도 바로 이런 곳이었다.

며칠 선선했더니 오늘따라 날이 무더웠다. 땀을 닦으며 둘러보니 벌써 4시경, 이제 친구 집으로 간다. 친구 집에 가는 길에 역 주변 마트에 들러 요리재료를 구입했다. 저녁은 닭백숙이다. 예전에 집이 양계장을 해서 닭을 많이 먹었으나 요리를 한 적은 없었다. 냄비에 물을 집어넣고 마늘과 파를 집어넣었다. 사실 집어넣은 것이 마늘인지 확신할 수 없다. 아무리 마트를 뒤져봐도 한국에서 보아온 마늘은 보이질 않았다. 그냥 비슷한 것을 집어넣을 뿐이다. 그리고 닭을 집어넣었다. 일본에서는 닭을 한 마리를 통째 팔지 않는다. 부위별로 잘라서 포장된 것이 있을 뿐이다. 닭뿐만 아니라 고기도 부위별로 조금씩 포장되어 판다.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일 수도 있고, 무더운 날씨에 음식이 빨리 상하기 때문에 조금씩 구입하는 소비자층을 겨냥한 마케팅일 수도 있고, 일본의 문화일 수도 있다. 아무튼 옆에 고기를 쌓아두고 구워 먹는 맛은 느낄 수 없다. 어느 정도 닭이 익었다 판단이 들자 이제 대충 소금을 집어넣었다.

친구가 왔다. 사실 신칸센(新幹線)만 안 타고 왔어도 근사한데 가서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닭백숙에다 맥주를 마셨다. 그런대로 닭백숙이 맛이 있었다. 친구도 맛이 있다고 했다. 오늘 피곤해서 일을 잘 못했단다. 내일은 이 친구가 1년 만에 한국에 들어간다. 딸이 돌이기 때문이다. 내일 4시 비행기.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닭 외에 사온 고기도 버섯과 파를 집어넣어 볶아 안주를 만들었다. 새벽 2시가 넘어 잠이 들었다.

<추후 연재>

□ 태풍 한가운데에서 버스는 멈추고

   [나고야 여행기 3] 재해의 나라 일본을 경험하다.

[관련 글]

성(城)을 집이나 요새로 이해해서는 우리 역사를 지킬 수 없다. | 2005년 8월 25일 시대소리 기고

대학을 졸업할 무렵. 우리나라를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아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는데, 그 후로 우리나라엔 어떤 문화재가 있는지... 우리의 문화는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참 많은 궁금증이 생겨났다. 도시를 공부한다는 필자가 영국의 신도시인 밀턴케인즈의 조그마한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그 연구소 건물 중에 하나가 12세기 건물이라는 말에 웬 지 모를 부러움과 많은 문화재를 잃어버린 우리나라에 대한 섭섭함이 교차했었다. 신도시에 12세기 건물이라... 우리나라 신도시 한복판에 12세기 건물이 있는 곳이 있을까? 아무튼 그 때 느낀 그런 감정은 틈만 나면 남은 대학생활 동안 필자를 문화재를 찾아다니게 만들었다. 처음 방문한 곳은 화성이었다.

화성을 찾았을 때는 영하 20도의 겨울이었다.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친구와 화성을 돌면서 필자는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바로 화성의 영어 표기다. 우리의 성(城)을 영어로 어떻게 표기합니까?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하나 같이 다 castle로 대답을 한다. 필자도 물론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의 성(城)은 대부분 fortress로 표기되고 있다. 화성뿐만 서울 한성도 그렇고...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대부분 그러하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화성이 Hwaseong Fortress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세계문화유산에도 화성은 Hwaseong Fortress로 등록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화성을 우리가 발음하는 대로 그냥 Hwaseong으로 등록시키면 될 것을 fortress, 즉 화성은 요새라고 못 박아서 등록시킨 것이다. (참고로, 일본은 히메지성(姬路城)을 히메지성(姬路城)의 일본 발음인 Himeji-jo로 등록시켰다.)

화성 답사 이후, 필자는 우리나라의 여러 성(城)뿐만 아니라 만주의 고구려 산성과 일본의 성(城)도 답사하면서 성(城)에 대한 영어표기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우리의 삶과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출발점이며, 외국에 우리 민족의 참된 삶과 역사를 알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영사전을 보면, 성(城)은 영어로 fortress, wall(ed) city, castle로 표기된다. 즉 성(城)이 castle을 포함하고 있는 훨씬 넓은 개념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城)을 castle로 인식하게 된 원인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문화 정책 내지, 일본이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한자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추측한다. 일본의 성(城)은 castle이다. 일본의 성(城)은 유럽의 castle처럼 봉건영주의 집이다. 그러면 우리의 성(城)은 무엇인가? 우리의 성(城)은 일부 palace, 즉 궁성(예를 들어 신라의 월성)이나 일부 fortress, 즉 군사적인 요새(예를 들어 보루성)를 제외하곤 대부분 wall(ed) city, 즉 성곽도시(예를 들어 화성)를 의미한다. 우리에겐 castle은 없다.

한국의 어떤 저명한 성(城) 연구자가 얼마 전 펴낸 책에서도 우리의 성(城)을 유럽의 castle과 비교해서 설명했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정말 한심한 일이다. 어떻게 도시와 집을 비교할 수 있는가? 유럽의 castle이 봉건영주의 집이라면 당연히 우리도 이에 부합하는 귀족들의 기와집과 비교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우리의 서울 한성은 이미 없어져 버린 중세 시대 성곽도시 파리와 비교해야 하지 않겠나? 둘 다 똑 같이 성벽으로 에워싸인 수도였으니 말이다.

필자는 우리나라를 둘러보면서 성(城)에 대한 영어 표기를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잘못된 영어 표기는 외국인들이 우리 문화에 대해 오해를 사게 만든다. 우리의 성(城)은 그 쓰임에 따라 palace, fortress, wall(ed) city로 적절히 나뉘어서 표기되어야 한다. 경주를 방문했을 때 봤는데 신라의 월성이 castle로 표기되어 있었다. 임금이 봉건영주의 집에 살았다는 것인가? 당연히 월성은 palace로 표기되어야 한다. 중국의 자금성은 영어로 imperial palace of ming and ching dynasty로 표기되어 있다. 둘 다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살았던 곳이 아닌가? 그러면 당연히 월성은 palace로 표기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일부 소규모의 산성을 제외하곤 대부분 우리의 성(城)은 fortress가 아니라 wall(ed) city로 표기되어 한다. 특히 성(城) 안에 군사시설 외에 관아 등의 행정기관이 있다면 반듯이 wall(ed) city로 표기되어야 한다. 즉 도시로 파악되어야 한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 갈수록 도시는 행정기관이 있는 곳을 의미했다.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분노하면서 정작 서울 한성의 성벽이 fortress wall로 되어 있는 것에는 분노하지 않는다.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라 일컬어지는 오녀산성의 성벽은 city wall로 표기되어 있다. 해발 800m 산에 있는 성(城)을 도시로 이해하는 중국과 평지에 있고, 매일 서울 시민과 호흡하고 있는 서울을 요새로 이해하는 한국. 누가 역사 전쟁에서 승리할 것인가? 독일의 로텐부르크는 아름다운 중세 성곽도시(wall city)로 이해시키면서, 정작 우리의 낙안읍성은 요새 마을(fortress village)로 이해시키는 한국 정책당국자들과 역사학자들을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성(城)을 이해함에 있어 아무런 의심 없이 집(castle)으로 이해하는 대다수의 한국인들. 성(城)을 군사시설(fortress)로 이해하는 대다수의 한국 역사학자들. 이제 성(城)을 선조들의 삶의 공간(city)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 시각일 때만이 진정한 우리의 역사와 도시가 보일 것이고, 역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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