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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유라시아와 미대륙을 호령하던 강대국이었다

영토는 요동에 자리잡고 동서 6 천리, 바다를 건너야 신라와 백제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06/15 [10:44]

고구려는 유라시아와 미대륙을 호령하던 강대국이었다

영토는 요동에 자리잡고 동서 6 천리, 바다를 건너야 신라와 백제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 입력 : 2015/06/15 [10:44]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김종문] 배달겨레에게 있어 강하고 위대한 나라로 기억되는 廣開土太王(광개토태왕)의 高句麗(고구려)는 현재의 세계사에서는 南北(남북)의 韓半島(한반도)인 朝鮮半島(조선반도) 북쪽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나라이다. 그러나 역사기록들에 고구려를 찾아보면 사실은 전혀 반대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조기사:  '몽골', 17세기까지 1만리 떨어진 북해 근처에 있었다
[참조기사:  [고지도]몽골과 미대륙 사이에 '요동반도'가 있었다

高句麗(고구려)는 遼東半島(요동반도)에 있었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제21권 경사문(經史門)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지금 이 문예의 말로 상고하면 고구려가 비록 요수의 동서를 모두 차지했다 하더라도 지방이 수천 에 불과했고 만약 또 요수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해도 천여 리 지방에 지나지 않았다."

高句麗(고구려)는 遼水(요수)의 동서를 모두 차지했다. 즉 遼東半島(요동반도)를 모두 차지했다는 말이다. 원래의 遼東半島는 현재는 North Pacific(북태평양)북부와 Bering Sea(베링해)에 있었다. 고지도상에 遼東半島는 현지형에서 동서 사천리 남북 삼천리에 가까웠다.

땅의 크기로는 KOREA한반도(남북 이천리 동서 오백리)의 12배 정도의 크기로 그리 큰 지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遼東半島(요동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와 한반도(미대륙)의 연결지역이다. 그래서 遼(요나라), 元(원나라), 明(명나라), 淸(청나라)등 천하를 호령하고자 했던 나라들이 차지하고자 힘썼고 차지했던 나라들은 뜻을 이뤘다. 그래서 요수를 모두 차지했다는 거창한 수식을 했던 것이다. 그러한 遼東半島(요동반도)는 高句麗(고구려)의 땅이었다.

▲  조작된 6세기경의 삼국지도.  1: 高句麗(고구려), 2: 百濟(백제), 3: 新羅(신라)   신당서 고구려전에 따르면 遼東半島(요동반도)에 있었던 高句麗(고구려) 에서 백제를 가려면 배를 타고 南(남)쪽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현재의 국사에서 백제는 고구려의 수도인 압록강변의 평양에서 남동쪽에 있었다. 신라를 갈 때에는 인접한 국가이기에 배를 타지 않고 남하하면 되며 배를 탄다 하더라고 동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백제처럼 남동쪽으로 가면 된다. 현재의 韓半島(한반도)는 高句麗(고구려)에서 百濟(백제)를 가려면 바다건너 南(남)쪽 新羅(신라)를 가려면 바다건너 東(동)쪽으로 가야 한다는 역사기록과 불 일치한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고구려에서 신라를 가려면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야 했다.

新唐書(신당서) 高麗傳(고구려전)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高麗(고구려)는 본래 扶餘(부여)의 別種(별종)이다. 지역은 동으로 바다를 넘어 新羅(신라)에 이르고, 남으로 또한 바다를 건너 百濟(백제)에 이르고, 서북으로 遼水(요수)를 건너 營州(영주)와 접하며, 북쪽은 靺鞨(말갈)이다.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

高句麗(고구려)에서 東(동)으로 바다를 넘어 新羅(신라)에 이른다? 고구려가 신라를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기록을 현재의 국사와 한반도에 대입해보면 전혀 불일치 함을 알 수 있다.

新唐書(신당서) 高麗傳(고구려전)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위치는 현재의 한반도와는 완전이 불일치 한다. 삼국의 위치는 원래의 한반도인 미대륙을 한반도로 보고 蒙古(몽고)를 기준으로 지명들을 재배치해야 설명이 가능하다.
 
▲ 1531 Orontius Fineus  1: MONGAL(몽골, 蒙古), 2: 遼東半島(요동반도), 3: 浿水(패수), 4: 遼水(요수)  수당시대 고구려는 遼東半島(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高句麗(고구려)에서 동으로 바다를 넘어 미대륙에 新羅(신라)에 이르고, 남으로 또한 바다를 건너 東亞細亞(동아세아)에 백제에 이르고, 서북으로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하며, 북쪽은 말갈(靺鞨)에 닿았다. 高句麗(고구려)는 遼東半島(요동반도)를 중심으로 亞細亞(아세아)와 미대륙을 호령하였던 것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高句麗(고구려)의 遼東半島(요동반도)는 현재의 North Pacific(북태평양)북부와 Bering Sea(베링해)에 있었으며 新羅(신라)는 美大陸(미대륙)에 있었다
 
長安(장안)과 平壤(평양)은 五千里(오천리) 거리

현재의 世界史(세계사)에서 高句麗(고구려)는 좁디좁은 南北(남북)의 韓半島(한반도)인 朝鮮半島(조선반도)에 있었던 나라였다고 조작 기록해 놓았다. 형제국들인 작고 힘없는 百濟(백제)와 新羅(신라)를 괴롭히면서 隋(수나라) 唐(당나라)처럼 힘센 나라들에는 소리도 못 내던 나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사는 실제와 전혀 다른 소설들이다.

高句麗(고구려)는 遼東半島(요동반도)를 차지하고 四海(사해)를 압박하던 강대국이었던 것이다.

新唐書(신당서) 高麗傳(고구려전)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그 임금은 平壤城(평양성)에 거하는데 이 성을 또한 長安城(장안성)이라고도 하며, 漢(한)의 樂浪郡(낙랑군)이었다. 京師(경사)로부터 5천 리 떨어져 있고,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은 浿水(패수)에 연해 있는데, 왕이 그 좌측에 궁궐을 수축하였다.또한 國內城(국내성)과 漢城(한성)이 있는데 別都(별도)라 한다.
"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 隨山 屈繚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

高句麗(고구려) 長安(장안)은 唐(당나라) 장안에서 5천리(2799km) 떨어져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의 지명은 당시의 中國(중국)이었던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과 동일하였다

현재의 세계사에서 唐(당나라) 長安(장안)인 中共(중공)의 陝西省(산서성) 西安市(서안시)와 高句麗(고구려) 長安(장안)이 있었다는 鴨綠江(압록강) 동쪽의 거리는 1700km정도로 5천리(2799km)에는 한참을 못 미치는 삼천리(1679km)정도의 거리이다. 원래의 장안이 아닐뿐더러 현재의 압록강과도 거리가 맞지 않는 것이다.

唐(당나라)의 1리는 559.8m(中國歷史地名大辭典, 鹽英哲, 凌雲書房,1980에 의함)이다.

▲ A: 현재의 長安(장안)과 平壤(평양), B: 원래의 장안과 평양  현재의 장안과 압록강의 거리는 1725km정도로 약 삼천리(1679km)가량이 된다. 압록강에 평양이 가까이 있었다고 볼 때 역사기록상에 5천리라는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 1700년 이전에 영문고지도들의 대부분은 MONGAL(몽골, 蒙古)을 Bering Strait(베링해협)서쪽 北海(북해)인근에 표기하였다. 蒙古(몽골)을 기준으로 長安(장안)의 예상위치와 白頭山(백두산)의 서남쪽 平壤(평양)의 예상위치의 거리는 2800km가 넘으므로 오천리(2799km )거리를 충족한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高句麗(고구려)의 영토는 동서 6 천리, 遼西(요서)는 高句麗의 영토였다.

高句麗(고구려)의 강역은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 391~412) 長壽王(장수왕, 394년~491)시기 최대의 강역이었으며 서쪽으로 遼河(요하)를 건너 2천리인 遼西(요서)지역을 지배하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 고구려강역고(高句麗疆域考) 중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들어 있다.

《북사》에는,
“동쪽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은 요하(遼河)를 건너 2천 리에 이르고, 남쪽은 백제에 접하고, 북쪽은 말갈에 접하여 1천 리나 뻗쳤다.”

《후주서(後周書)》에는,
“주몽(朱蒙)의 후손 연(璉)이 비로소 후위(後魏)와 우호를 맺었으며, 그 땅은 동쪽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은 요하(遼河)를 건너고, 남쪽은 백제에 접하고, 북쪽은 말갈 요동 현도 등 수십 성(城)을 인접하여 모두 관사(官司)를 두었다.”

《수서(隋書)》에는,
“동서는2천 리, 남북은 1천 리이며, 수(隋) 때에 이르러서는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 리였다.”

高句麗(고구려)의 강역은 건국초기부터 급격하게 증가하다가 曹魏(조위, 220~265) 시대에 이르러 남북의 땅이 점점 줄어들어서 겨우 1천여 리에 불과하였다. 그러다 서방의 국가들이 분열되어 전쟁으로 피폐해지면 틈을 타 영토를 확장시키곤 하였다.

高句麗(고구려)는 전성기인 5, 6세기에 서쪽으로 遼河(요하)를 건너 2천리까지 강역이었다, 遼河(요하)의 서쪽은 遼西(요서)를 말하며 동쪽은 遼東(요동)이라 하였다. 遼東(요동)의 형상은 半島(반도)여서 遼東半島(요동반도)라고 하였다. 

長安(장안)은 高句麗(고구려)의 首都(수도)였다.

新唐書(신당서) 高麗傳(고구려전)에 遼東半島(요동반도)의 동쪽에 平壤(평양)과 唐(당나라)의 長安(장안)은 5천리의 거리였다. 遼東半島(요동반도)의 크기는 동서 수 천리로 최소 3, 4천리의 크기였다. 遼河(요하)서쪽 2천리의 遼西(요서)지역에는 唐(당나라)의 長安(장안)이 포함된다. 

전성기의 高句麗(고구려)는 遼西(요서)지역을 수백년간 지배하였던 것이며 長安(장안)은 원래 高句麗(고구려)의 수도였던 것이다. 
 
▲  16세기 영문고지도들로 그린 지형 1: 浿水(패수), 2: 鴨綠江(압록강). 3: 遼河(요하) 隋(수나라)시기 遼東半島(요동반도)의 高句麗(고구려)는  동으로 바다를 넘어 신라에 이르고, 남으로 또한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요하(遼河)를 건너 2천리까지 강역이었다. 북쪽은 말갈(靺鞨)에 닿았다. 高句麗(고구려)는 遼東半島(요동반도)를 중심으로 亞細亞(아세아)와 미대륙을 호령하던 강대국이었던 것이다. 隋(수나라)시기 동서 6천리의 강역을 표시해보면 당나라의 장안은 고구려의 강역으로 나온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수도가 동일하게 장안인 것은 당나라의 장안이 원래는 고구려의 수도중 하나였기 때문인 것이다. 당나라와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숨기기 위하여 고구려도 수도인 평양을 장안이라 불렀다고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역사를 조작하는 것을 春秋筆法(춘추필법)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중국(나라의 중심)이라 불리던 나라들은 역사기록들에 자국을 높이려 애를 썼다. 그 결과 수많은 역사기록들은 충돌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오랑캐라 불리던 나라들에 대해서는 폄하의 기록들을 남기기에 열심이었다. 

高句麗(고구려)가 동서 6천리의 광대한 지역을 다스렸다는 기록들은 현재의 국사와 세계사가 거짓소설들임을 알기에 충분하다.

현재의 세계사에 高句麗(고구려)는 南北(남북)의 韓半島(한반도)인 朝鮮半島(조선반도)에 약소국으로 조작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실제의 高句麗(고구려)는 遼東半島(요동반도)에 자리를 잡고 유라시아와 미대륙을 호령하던 강대국이었던 것이다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의 말발굽 자국은 유라시아와 미대륙 곳곳에 새겨졌을 것이다. 
영문고지도들을 공부하다 우연히 고지도들의 중요지명들이 이동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후 현재의 중요지명들의 위치가 세계사조작을 위하여 이동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2년여간 지명이동사례들을 탐구하여 정리하였습니다. 2014년 7월부터 고지도조작의 사례들을 모은 ‘고지도의 진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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