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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反正) 세계사 게재의 변(辯)- (69)

프랑스 혁명의 발단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4/08/26 [09:20]

반정(反正) 세계사 게재의 변(辯)- (69)

프랑스 혁명의 발단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4/08/26 [09:20]
 [민족/통일/역사=플러스 코리아타임즈-안재세] * 서세동점 이후 과대포장된 서양중심사관, 한민족 노예화를 획책한 일제식민사관, 화하독존의 대중화사관, 왜곡·축소·비하된 자멸사관(自蔑史觀)을 떨쳐버리고, 현생 인류 세계사의 중심에서 민족적 특성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한민족의 주체적 시각으로 세계사를 재정비하는 시도의 하나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더 많은 연구와 보충을 통한 보다 체계적인 세계사 골격 정비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 

3. 프랑스 혁명

  세계사상에 그 의미가 필요이상으로 과장되어 전해지고 있는 여러가지 사건들 중의 대표적인 것이 소위 프랑스혁명이다. 혁명이라는 용어가 걸맞지 않는 것은 산업혁명이나 후일의 러시아혁명과도 마찬가지인데, 프랑스혁명 이후 근 백여년간이나 뒤죽박죽이 된 난세 속에서 태어난 것은 별로 신통할 것도 없는 공화정이었을 뿐이었다. 유럽지방의 최강국이자 유럽지방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에서, 천여년간 파행적으로 유지되어 가던 왕정이 그 나마 막을 내리고, 그 실제 내용이 막연하기 그지없는 '자유·평등·박애'라는 구호만 요란하게 남았다. 그 구호는 그 후 숱한 몽상가들이 몽유병자처럼 중얼거리는 잠꼬대의 역할을 하게 되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서기 1788년의 프랑스는 여전히 유럽의 최강국이었고, 프랑스왕 루이 16세는 다소 우유부단하다는 평은 듣고 있었지만, 그래도 미합중국 독립전쟁을 원조하여 승리로 이끈 막강한 육·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숱한 프랑스의 철학자나 예술가 등이 전 유럽지방에 그 영향력을 깊이 미치고 있었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 수도 빠리는 유럽지방의 예술 및 사상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당시의 프랑스는 이미 15년간이나 일단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절대왕정이라는 용어가 풍기는 '강압적·폭압적'이라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프랑스는 유럽지방에서도 이미 가장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번영하는 나라였던 것이다. 프랑스의 개입 때문에 미주 식민지를 잃게 된 '민주주의적 입헌군주국'이라는 영국보다도 '절대왕정국가'인 프랑스가 오히려 미합중국의 자유사상을 더욱 높이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도 매우 역설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다만 프랑스와 큰 원수 사이가 되어 버린 영국섬의 음모가들은 유럽지방의 다른 모든 음흉한 정치가들보다도 더욱 더 프랑스 왕정의 약화를 기원하고 있었다.
▲ 들라크루아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7월 혁명의 마리안)     © 편집부

  미합중국 독립 전쟁에 참가하고 돌아온 많은 군인들 사이에서는 미합중국식의 '민주적' 독립형태야말로 모범적인 정부 형태라고 믿는 분위기가 상하간에 널리 퍼졌다. 원정군 사령관 라파이예트도 프랑스는 심각한 혼란을 거치지 않아도 미합중국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이 16세는 우유부단했다고는 하나 상식에 충실한 인물이었고, 폭압적인 군주는 아니었으며, 경건한 종교가 쪽에 가까왔다.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는 사치를 즐겼다고는 하지만 다른 나라의 왕족들보다 특별히 굉장한 사치를 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국고와 재정은 매우 줄어 있었지만 그 원인은 왕실의 사치 때문이 아니라 미합중국 독립전쟁에 터무니없이 막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럽지방 최대의 농업국이자 농산물 수출국인 프랑스가 미합중국 독립을 전후한 서기 1775년부터 갑작스런 불황에 빠지고 식량마저 부족하게 된 현상은 '자유의 국가'를 탄생시키기 위한 막대한 원조가 남긴 후유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는 유럽지방에서 가장 먼저 봉건제도가 이미 무너져 가고 있었고, 그에 반하여 십자군광란을 전후해서 왕권이 일찍부터 신장했는데, 왕들은 신흥 부르조아들의 경제력을 이용하여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해 갔다. 서기 1643년에 즉위한 루이 14세는 70여년간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여 '태양왕'으로 불리웠다. 강성하고 부유한 프랑스의 인구는 루이 14세가 사망한 서기 1715년에 1,500여만 명에 달했다. 그 후 다시 70여년간 유럽지방에서 제일가는 풍요를 누린 프랑스의 농업발전과 기타 경제적 성장에 의해, 서기 1789년의 프랑스 인구는 2,500여만 명으로 유럽지방 총인구의 16%에 달했다. 루이 14세 당시 프랑스인의 평군 수명이 21세였고 서기 1789년 당시의 수명도 27세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70여년 사이에 무려 70% 가까이 증가한 인구는 자연증가라기보다는 유럽지방 다른 곳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에 큰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사회적 이동이 가능한 사람들이란 두 말 할 것도 없이 상업자본가이거나, 품팔이 노동자, 또는 건축기술자(프리메이슨 : Free Mason)류의 특정기술직 종사자들이었다.

  아담스미스가 미합중국의 독립선언을 전후하여 발표한 국부론(國富論)에서 인간의 본질을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존재'로 규정하면서, 사리사욕의 억제를 통한 공익증진이 아닌 무한한 사리사욕 추구를 오히려 권장한 것은 유럽지방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한심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는가 하는 연민조차 느끼게 한다. 다분히 '있는 자'들의 논리를 대변한 듯한 국부론은 무지막지한 식민지 확보경쟁에 돌입해 가기 시작하던 유럽지방의 광기를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산업혁명 광란으로 유럽지방을 매연과, 폐수와, 극심한 빈부의 차에 의하여 발생한 처참한 빈민굴 등으로 썩어 들어가게 하고 있던 탐욕스런 자본가들은, 국부론이야말로 인도주의(人道主義;휴머니즘)에서 멀리 동떨어진 자신들의 볼썽사나운 처지를 찬란한 명예로 휘감아 줄 수 있는 최고의 성전(聖典)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올리버 트위스트와 성냥팔이 소녀를 양산해 내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던 자본가들은, 국부론 덕택에 하루아침에 갑자기 민중의 적이 아닌 국가의 수호자로 자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담스미스는 그의 모호하기 짝이 없는 '사리사욕 추구의 공익성'이라는 궤변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시장경제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이 자유경제 체제를 건전하게 지탱해 줄 것이라는 또 하나의 궤변을 첨가하기도 했다. 갖가지 용어로 채색된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만일 그 실체가 '인간의 건전한 이성'을 뜻한 것이었다면, 그 건전한 이성이란 것은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동물적 탐욕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이성과 탐욕이라는 전혀 공존이 불가능한 상반되는 개념을 뫼비우스의 고리처럼 꿰어 맞춘 귀걸이코걸이 식의 아담스미스 이론은, 그 후 이백여년 이상 전 세계를 공포와 전률과 공해가 뒤범벅된 혼돈의 벼랑끝으로 인도하는 둘도 없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리고 그처럼 전 유럽지방을 휩쓸기 시작한 자본주의 열풍은 유럽지방 최첨단을 자랑하던 프랑스의 부르조아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과대망상에 빠지기 시작한 신흥 부르조아들이 설쳐댄 신파극의 무대는 프랑스 시민혁명(부르조아혁명)이라는 대혼란의 서곡을 연출해 내었다.

  루이 14세 사망 이후 70여년간 프랑스의 상업은 대단히 번창했으며, 부유한 상인들은 귀족들의 토지를 매입하면서 급격히 세력이 커져 갔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귀족들은 몰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했으나, 부르조아들의 토지겸병은 급격히 증가하여 영주가 되는 부르조아들도 많아지게 되었다. 일찌기 루이 14세는 귀족들의 세력을 정치권력에서 배제하려고 부르조아 출신의 행정관료들을 많이 채용해서 왕권을 강화했으나, 루이 14세 사후에 귀족들이 다시 정치조직으로 대거 진출해 들어감에 따라서 부르조아적 관료들과의 마찰이 불가피해졌다. 미합중국에 대한 지원에 의해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루이 16세는 귀족들의 협조를 바랐으나 귀족들은 일반 국민들(제3신분)에게만 세금을 부담시키려고 했으므로 국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서기 1786년의 영·불 통상조약으로 영국산 공업제품을 수입하는 대신 프랑스의 농수산물들을 영국섬에 대량 수출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프랑스 국내에서는 오히려 곡물가격이 높이 올랐다. 그리고 서기 1785년 이후 발생한 수차례의 흉작에 의해 식량난은 더욱 심해졌다(식량난은 유럽의 다른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음). 소농민들은 소작료의 앙등으로 곤핍해졌고, 도시노동자들은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었고, 신흥 귀족이 된 부르조아들은 루이 15세가 일찌기 서기 1771년에 고등법원을 폐쇄해 버린 데 대해서 왕권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사람좋은 루이 16세가 즉위하자마자 고등법원을 부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고등법원은 더욱 왕정을 비판하고 나서는 치졸하고도 후안무치한 행위를 서슴치않고 있었다.

  이 고등법원제도는 매우 기묘한 제도였다. 소위 고등법원이라는 곳에서 법관의 지위를 얻기 위한 매관·매직이 합법화되어 있었고, 서기 16세기초부터는 아예 법관 지위가 세습되는 한편, '왕도 고등법원 재판관을 파면할 수 없다'는 원칙을 스스로 만들기도 했다. 말하자면 돈많은 자들이 귀족신분인 재판관이 될 수 있는 통로가 합법적으로 열려 있던 프랑스 사회의 특수성에 의하여, 매관매직을 위한 각종 뇌물이 공공연히 횡행하는 부패의 소굴이 바로 고등법원이라는 곳이었다. 그런 주제에 고등법원 내부에서는 반왕(反王)세력이 커가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루이 15세가 고등법원을 폐쇄시켜 버리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부왕과는 달리 여론을 존중한다는 입장에서 고등법원을 부활시켰던 것인데, 부르조아들은 그 기회를 다시는 놓치지 않으려 했고, 더욱 더 구제도(舊制度 ; Ancient regime)에 대한 비판을 일삼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마치 국민을 대표하는 듯한 묘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한편 귀족들은 대체로 상공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로 상공업에의 참여를 허용받게 되었다. 부르조아의 창조물인 자본주의경제구조에 적응하여 새로운 사회분위기에서도 귀족신분을 유지해 보려하는 경향이 커져 갔는데, 그것은 귀족들이 살아 남기 위한 자연발생적인 절충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군대의 장교직과 고위성직만은 귀족들이 장악하려 했는데, 루이 14세는 일찌기 그 직책에 부르조아들을 능력에 따라 대거 등용했으므로 마찰의 소지를 남기게 되었다. 귀족들과 신흥 부르조아들의 오랜 갈등은 드디어 엉뚱한 방향으로 터지게 되었다. 다음의 경구는 프랑스혁명의 본질을 잘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

 "혁명은 가난한 자들이 일으키는 게 아니라, 부유해진 자들의 실력이 무시되고 멸시당할 때, 그들이 모순된 제도를 타도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킨다."

  프랑스 사회가 국가재정의 혼란, 신분간의 갈등, 곡가앙등에 따른 서민생활의 파탄 등이 겹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기 1789년에 재무총감이던 네케르는,

 "프랑스는 전 유럽화폐의 거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

고 공언할 수 있었으며, 자본주의적인 발달도 크게 두드러지고 있었다. 문제는 국가의 재정이 거의 전적으로 서민에게 부담지워져 있었던 데 있었다. 돈많은 자들(부르조아들이건 귀족들이건)이 국가를 위한 부담을 지려 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는 어디에 원인이 있는가? 혁명 전야의 사회상황을 초래한 것은 바로 그처럼 무책임한 '있는 자들'의 태도였다.

 "돈은 다 어디에 있었는가?"

 - 이것이 바로 혁명의 본질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접근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의문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담스미스가 꿈꿨던 '보이지 않는 손'과는 그 의미가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광란에 다를 바 없는 혁명 전야는 그야말로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조종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구태여 시온의정서가 지적하듯이 '프리메이슨 등의 결사조직이 어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사건을 일으키지는 알았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왕정을 전복시켜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어떤 종류의 불순한 동기를 가진 음모자들은 분명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관용성이라던가 자비심이라던가 하는 것은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혁명광란의 조종자 및 그 지도자들과, 모든 순간마다 항상 타협과 관용의 정신에 충실하려고 했던 경건한 카톨릭교도 루이 16세와는 여러 부분에서 좋은 비교가 되었다. 그 논리와 실천상에 있어서 처음부터 커다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던 허울좋은 '자유·평등·박애'를 부르짖도록 계획한 자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그것은 혁명광란의 최대의 수혜자가 누구였던가(또는 어떤 집단이었던가)하는 결과를 살펴봄으로써 거꾸로 추리가 가능할 것으로 볼 수 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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