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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만주의 문명사적 위치와 21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동서간 문화교류와 인종의 이동이 있었다

문화부 | 기사입력 2008/07/08 [23:15]

한반도.만주의 문명사적 위치와 21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동서간 문화교류와 인종의 이동이 있었다

문화부 | 입력 : 2008/07/08 [23:15]
▲ 한반도 남부지역의 남방식 고인돌 무덤양식(왼쪽)이 피라미드 형태로 발전한 만주 홍산문명의 무덤양식(오른쪽)
한반도 남부지역의 남방식 고인돌양식이 원형이 되는 피라미드는 만주-서안-티벳-슈메르-이집트-마야-아즈텍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들 피라미드 문명의 주역은 바로 고대 한국인들임이 고고학적으로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이들 동방족의 고향은 어디인가? 바로 한반도와 만주지역이다. 한반도와 만주는 빗살무늬토기의 원조(한반도)이며, 무궁화의 고향(한반도)이며, 고인돌의 고향(한반도)이며, 편두의 고향(만주 송화강 지역)이다. 그리고 개방된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동에서 서로, 다시 서에서 동으로 문화가 교류되었고 인종의 이동이 있었다.
 
 예컨대, 이집트 피라미드 문명의 주역들에 대해 알아보면, 이집트의 조각상들과 두상들 가운데 서구학자들의 무관심으로 넘어가는 인물들이 있다.
 
위 이집트 왕조인들은 BC2,000~BC1,800년경의 인물들이다. 종족원으로 따지자면 그 어디에도 정확히 들어오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혼혈계다. 

그런데 아래 사진들은 당시 이집트의 평민들의 얼굴모양이다.  


이들에는 현재 이집트와 이디오피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아프리칸계와 아랍계 혼혈인도 포함된다. 

그런데 아래 사진의 얼굴들처럼 아주 다른 왕조인들이 있다. 이들은 바로 '티우'(Tiu)라는 먼 옛날 미스테리한 선조에 대한 전설을 갖고 있는 이집트 정복자들이다. Tiu(티우)는 이집트 창건의 전설적 인물이다. 

 
▲   티우왕조인들 - 얼굴모양이 이집트 원주민들이나 서양인들은 아니고 동양인들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티우 왕조인들에 대한 연구는 하나도 없다.  단지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종교개혁하려다 축출된 아케나톤의 친척정도로만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피라미드와 태양과의 관계성이 깊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구려의 '삼족오'도 태양속에 존재하는 불사조다. 단군이 목에 건 청동거울은 태양빛을 반사시켜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성을 알리는 상징이였다. 이 처럼 태양은 우리 한민족의 신앙사상의 상징이였던 것이다. '천부경'에도 "자기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태양을 우러러 꿰뚫어지게 본다"는 뜻으로써 "본심본 태양앙명(本心本 太陽昻明 )"이란 내용이 있을 정도로 '태양'은 우리 한민족이 추구하던 세계관이였다. 즉, 태양처럼 환하고 밝게 넓게 세상을 비추고 태양과 같은 마음의 사람들이 되자는 우주본성으로서의 광명의 빛을 추구하는 신앙의 상징이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동방족의 신앙 세계관의 본질은 태양은 그러한 우주본성으로서의 광명의 상징이지, 결코 인간을 지배하는 절대우상은 아니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고대 한국인들은 태양족이기도 했다.

▲   이집트 티우왕조의 제기용 그릇문양(왼쪽). 한국의 일목삼신어 부적문양(가운데) 서로 동일한 문양구조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 하단 사진은 티벳지역의 피라미드 모습
 
'티우'를 조상신으로 여기고 태양신을 유일하게 섬기던 이 왕조는 다음과 같은 제기용 그릇을 남겼다. 

이 물고기 문양은 Triqueta (트리케타)라고 불리는 물고기 상징으로 후대에 유럽 켈트의 성스러운 상징이고 나중에 크리스트교의 징표가 된다.

이 트리케타는 우리에게는 이를 일목삼신어라 부르는 전통부적이다. 이집트를 창건한 티우의 후예. 태양의 아들들. 그리고 우리 전통부적을 똑같이 갖고 있던 사람들. 이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

아래 사진은 이집트의 창조여신 하토르(Hathor)의 부조상이다. 얼굴모양이 넓적하고 쌍꺼풀이 없는 전형적인 동북(만주) 아시아적인 얼굴이다.  


위에는 만주 아무르인이 인용되었지만 한국인들 중에도 저러한 얼굴들은 흔하다아래 사진은 그 유명한 피라미드 석상이다. 전쟁때 포격맞아 코가 떨어져 있는 형태다.

▲  동북 아시아 몽골리안 얼굴의 스핑크스상 - 대부분 서양인들의 얼굴로 착각했을 석상

'스핑크스'는 코가 떨어져 나갔는데 얼굴모양이 사람(여성)이다. 그런데 광대뼈가 튀어 나온 동북아 여성의 얼굴이다. 몽골리안의 요소가 많은 얼굴이다. 

▲   이집트의 무궁화 여신상(히비아쿠스=하토르). 얼굴모양은 전형적인 동북 아시아인

고대 이집트인들은 [무궁화]를  달의 여신 [히비스쿠스]에게 바쳤다. 그래서 무궁화를 린네는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라고 불렀다. 달의 여신 히비스쿠스는 바로 [하토르]였다.

바로 이 무궁화를 이스라엘의 솔로몬왕은 "샤론의 장미"라고 불렀다.

 
그런데 무궁화의 원산지는 어디일까? 영어사전에는 '시리아쿠스'라고 나오니 중동의 '시리아'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무궁화의 원산지는 '한반도'다.  한국에는 여러 종류의 야생 무궁화가 널려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인들도 [무궁화는 한국인의 꽃]이라는 것을 고대부터 이야기해 왔다.
 
그 중 하나가 4천년 전부터 쓰여진 책이라는   고대 산해경(山海經)의 해외동경(海外東經)을 보면  한반도 중남부에 [군자국]이 있는데, 그 나라의 특징 중의 하나가 무궁화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君子國 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 해석하면, " 군자(君子: 위대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있는데  '격식을 갖춘 옷'을 입고  '격식을 갖춘 모자'를 쓰고 '격식을 갖춘 허리띠'를 두르고, 칼을 차고 다니고,  짐승을 기르고, 큰 호랑이 두마리를 부리는데, 그 사람들은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싸우지 않는다. (好讓不爭)  무궁화(薰華草: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무궁화의 원산지는 한반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윤복현 편집자 기자=출처]

1.동이문명의 고향, 한반도와 만주
 
한반도와 만주를 나누는 압록강과 두만강은 오늘날 한국과 중국 영토를 가르는 국경선이다. 그러나 이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국경’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과는 달리 두 강의 양쪽이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 쪽에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지리적으로도 압록강과 두만강은 단절의 선이 되기 어렵다. 강 폭이 좁은 곳은 작은 배 한 척으로도 쉽게 건널 수 있고, 가뭄이 들거나 얼음이 얼면 걸어서도 오고 갈 수가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그렇게 선사시대부터 정치적·문화적 장벽이 아니라 사람과 문화의 교류 통로 역할을 해왔다.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만주와 한반도의 선사시대 사들이 주로 사용했던 좀돌날과 같은 소형 석기와 이것을 만드는 데 이용된 쐐기 모양의 몸돌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모두 발견돼 두 지역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준다. 

만주와 한반도가 선사시대에 하나의 문화공동체였음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토기를 보면 표면에 문양을 눌러 새긴 것들이 주류다. 만주 지방의 토기들과 매우 닮았다. 특히 한반도 북부 지역의 토기는 요동반도 및 지린성 동남부 지역 토기와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와 만주 대부분 지역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새김무늬 토기는 황하 중류 유역 양샤오(仰韶) 문화의 채색토기 전통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반도와 만주가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명권이었음은 청동기 문명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중국의 중원 지역은 찬란한 청동문명이 발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에서 사용한 그릇은 주로 의례 활동에 사용된 예기(禮器)들로, 그 중에서도 청동 그릇을 대량으로 제작해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만주 지방에서 발견되는 청동기는 주로 소형의 개인적인 도구·무기·장신구다. 그리고 한반도의 청동기 종류도 만주것과 매우 비슷하다.
 
만주 지방에서 청동 야금술(冶金術)이 출현하게 된 것은 중국 북방의 초원지대를 따라 형성된 북방 청동문화의 독자적인 발전 결과였으며, 한반도의 청동야금술 역시 이러한 북방 지역 청동기 문화 전통의 일부이다. 북방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은 곡선의 칼날을 가진 청동 단검으로 ‘비파형 동검’ 또는 ‘요녕식 동검’이라고 불리며 예맥(濊貊) 문화권 또는 단군조선 문화권의 대표적 유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중국 중원 지역의 직선형 날을 가진 동검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한반도와 만주의 문화적 공통성은 또한 언어와 형질(形質)적 특성에서도 뚜렷하게 확인된다. 언어 계통상 중국어는 중국·티베트어족(Sino-Tibetan languages)에 속하고,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족 가운데 알타이어계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대 한국어는 부여·고구려·옥저·동예 등에서 사용한 북방 부여계어(夫餘系語)와 한반도 지역의 3한인 마한·변한·진한 등에서 사용한 남방 한계어(韓系語)가 변화 발전한 것으로, 늦어도 기원 전후의 시기에는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 공통의 언어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동북문명(=요하문명=홍산문명)은 환웅(한웅)님께서 문명을 밝히신 곳이고 고조선의 뿌리로 드러나고 있다.유물을 보면 동북문명은 약 6천년전에도 존재했던 것이고 이는 황하문명보다 천년 이상 빠르다. 황하문명도 동북문명(=요하문명=홍산문명)이 전해져서 이루어진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그러니 일부 중국인들이 고조선 등 만주역사에 그토록 욕심을 내는 것일 것이다.중국인들이 예로부터 호(胡) , 동호(東胡)라 불렀던 곳이 바로 이 동북문명.호복(胡福)이란 말은 [큰 행복]이라는 말이다.그만큼 옛날 중국인들은 [호(胡)문명(동북문명)]에 큰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할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만주 지방이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첫 계기는 언제부터일까? 기원전 3세기 초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 나라의 정치 세력이 허베이(河北) 북부의 연산(燕山) 지역을 넘어 확대되면서 만주 지역에 연나라의 군현(郡縣)이 설치된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연나라의 철기 문화, 밀폐 가마와 물레 사용에 의한 토기제작 기술, 목관(木棺)을 사용하는 매장 풍속 등이 만주 지역에 본격적으로 확산되며 한반도에도 유입된다. 중국과의 접촉이 오히려 각 지역 사회의 발전을 촉발하여 부여·고구려·옥저·동예·삼한 등의 정치적 발전을 초래하였다.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이후에도 만주의 대부분 지역은 여전히 독자성을 유지했던 것이다. 선사시대의 한반도와 만주는 이처럼 문화적·언어적·형질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만주를 한국고대사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하며 또 필요한 일이다. (박양진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미국 하바드대학 석사·박사 중국고고학 전공(만주 지역 발굴 다수 참여)
 

중국의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 등 3개 성(省)으로 이루어진 만주는 전체 넓이가 123만㎢에 이르는 방대한 땅이다. 한반도의 5배가 넘는 이 지역은 지금은 중국 영토지만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선사시대에는 유라시아 평원을 가로질러 한반도에 이르렀던 유목 민족의 기착지였고, 이들 중 일부가 한민족의 조상이 됐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는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 우리 민족의 고대 국가들이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다. 지금은 서로 별개의 지역으로 생각되는 한반도와 만주는 오랫동안 하나의 문화권으로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었던 것이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한족(漢族)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역사·문화 공간이었고, 그 상당 부분의 주역이 훗날 우리 민족으로 이어졌다.
 
최근 고구려사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갈등은 한국인의 고대사 인식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드러냈다. 20세기의 남북분단과 지역주의는 역사 인식의 폭마저 제한했고, 고대사 연구와 교육도 주로 한반도 남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사를 중국 변경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민족의 북방고대사(北方古代史), 특히 그동안 잊고 지냈던 만주 지역의 우리 역사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이제 우리는 만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우선 이곳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서 시작하자. 한반도의 북쪽에 놓인 이곳을 우리는 북방(北方)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만주는 지리적 개념을 넘지 못하고, ‘동북(東北)’은 중국 쪽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 지역이 중국 정부의 정치적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21세기 동북아 역사의 전개속에서 경제-문화적으로 다시 한반도와 가까워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만주에서 펼쳐졌던 우리 북방고대사에 대한 재인식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의 문제이기도 하다.  
 
2.화려했던 신석기시대

압록강 유역인 평안북도 미송리에서 나온 토기(土器)는 밑이 납작한 원통형 그릇에 지(之)자 무늬가 새겨져 있다. 청천강 유역의 세죽리에서 나온 그릇들도 같은 종류다. 이런 그릇들이 또 나오는 곳이 있다. 압록강 청천강에서 멀지 않은 중국 요동반도, 특히 단둥(丹東)과 다롄(大連) 지구에서 주로 발굴되는 토기가 바로 그렇다.
 
북한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미송리-샤오주산(小珠山) 유형’이라고 하여 북한과 만주에 걸쳐 동일한 문화를 가진 지역 단위를 설정하고 있다. 샤오주산은 요동반도 남쪽의 광루다오(廣鹿島)에 있는 곳으로 신석기 시대의 토기들이 대량 발견된 곳이다.
 
만주와 한반도는 신석기 중기가 되면 점차 새김무늬로, 그리고 후기로 가면서 무늬가 생략되는 토기무늬 변천의 흐름도 같다. 그리고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가 청동기 문화로 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용연리 유적의 문화 양상은 만주의 샤오주산(小珠山)·솽퉈즈(雙陀子)·단퉈즈(單陀子) 유적들과 대부분 일치한다.
 
이처럼 두만강·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의 북부와 만주가 같은 문화 변화 과정을 보이고 있는 사실에서 만주 신석기 문화를 만든 사람들과 한민족의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다. 만주에 무슨 독자적인 문명이 있었을까 생각하기 쉽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세계사 교과서를 비롯해, 대부분의 역사책 역시 동아시아에서 처음 문명이 시작된 곳은 중국 황허(黃河) 유역의 중원(中原) 지역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상식처럼 통용되는 이런 생각은 이제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만주는 그동안 중원 문화의 변방·후진 지역으로 여겨져왔지만, 1970년대 이후 만주 이곳 저곳에서 황허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도 우수한 문화가 잇따라 발견되면서 이 같은 통념과 역사책은 다시 쓰여야 할지 모른다. 기원전 7000년 무렵 시작된 만주 지역의 신석기 문화는 중원 지역의 문화와 뚜렷이 구별되면서도 양과 질 모두 전혀 손색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만주 지방의 신석기 문화 중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심양 부근 훙산(紅山)에서 발견된 기원전 3500년 무렵의 ‘훙산(紅山) 문화’다. 훙산문화의 유물 중 특히 중요한 것은 각종 옥기(玉器)들이다. 팔찌·구슬 등 장신구, 용 머리·거북·새·독수리 등의 모양을 한 제사용 도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정교함과 화려함은 보는 사람을 감탄하게 만든다.
 
훙산 문화 유적 중 가장 이름난 동산주이 유적의 제단(祭壇)은 중국 신석기 시대의 발굴 가운데 처음 발견된 대형 제사 건축물로, 길이 60m, 너비 40m의 대형 유적이다. 제단 안에서는 각종 옥기들과 흙으로 빚은 사람 모양 20여점, 대형 인물상 등이 출토되었다. 뉴허량 유적에서는 여신묘와 돌무지무덤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 두상(頭像)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과 정확한 비례, 그리고 전형적인 몽골로이드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유명하다. 이렇게 화려했던 만주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만들었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어디로 이동하였을까?

이 시기에는 오늘날의 여러 민족들과 연결지을 수 있는 주민 집단이 분명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가 청동기 문화로 넘어가는 시기의 유물·유적이 만주의 샤오주산 유적들과 대부분 일치하는 데서 보듯,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와 한반도는 유사한 문화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고도로 발전된 문화를 지녔던 한반도 북방의 선사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바로 우리 문화의 뿌리를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만주 지역의 선사시대 문화는 한반도뿐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는 만주가 북동쪽으로 흑룡강과 우수리강을 경계로 연해주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치치하얼(齊齊哈爾)의 앙앙시(昻昻溪) 문화와 미산(密山)의 신카이류(新開流) 문화는 각각 러시아에서는 노보뻬트로프카(Novopetrovka) 문화, 꼰돈(Kondon) 문화 또는 말리쉐보(Malyshevo) 문화로 불린다. 1930년대부터 만주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에 러시아 학자들이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연해주 지방의 신석기 문화인 보이즈만(Boysman)·글랏까야(Gladkaia)·자이싸노프카(Zaisanovka) 문화 등은 거의 그대로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 문화나 중국 지린성(吉林省) 용정(龍井) 지역의 금곡(金谷) 유적과 거의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선사시대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국경에 구애받지 말고 시야를 유연하고 넓게 가져야 한다.
 
‘만주’(滿洲·Manchuria)란 지명은 원래 오랫동안 이곳을 삶의 근거지로 하던 만주족에서 왔다. 만주족은 남방 퉁구스계 민족으로 역사적으로는 숙신(肅愼)·읍루( 婁)·물길(勿吉)·말갈(靺鞨)·여진(女眞) 등으로 불려왔다. 12세기 금(金) 나라를 세워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했으며, 17세기에 다시 후금(後金)을 세운 뒤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중국을 300년 가까이 지배했다. 현재 만주에는 만주족 외에 몽골족·조선족·회족(回族) 등이 살고 있지만 한족이 90%가 넘는 압도적 우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 한족은 대부분 청 왕조 시기, 그 중에서도 19세기 말 이후 만주로 이주했다.
 
중국 정부는 만주 대신 ‘둥베이(東北)’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이는 만주라는 이름이 이 지역이 독자성을 가진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만주는 실제로 오랫동안 독자성을 유지했으며 20세기에도 군벌(軍閥·장작림), 일본의 괴뢰국(만주국)으로 베이징 정부의 통제 밖에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통치권을 장악한 1949년 이후에도 ‘둥베이 인민정부’로 어느 정도 독자성을 유지하던 만주는 1953년 중앙정부가 이를 폐지하고 랴오닝·지린·헤이룽장의 3개 성으로 분할함으로써 중국의 정치구조 속으로 완전히 편입됐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북한과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각각 17명씩 참가한 공동 조사단을 구성하고, 내몽골·랴오닝·지린·헤이룽장 지역의 청동기시대 및 고구려·발해 유적을 답사하고 시굴과 발굴 조사를 공동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양쪽이 출토 유물의 해석에서 현저한 시각 차이를 노출하여 공동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북한은 1966년 ‘중국 동북지방의 유적 발굴 보고’라는 단행본을 독자적으로 출간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연구를 계속하여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확대하고, 다롄(大連)의 강상(崗上)과 러우상(樓上) 무덤을 고조선 지배층의 순장(殉葬) 무덤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등으로 자료 정리가 늦어진 중국은 30년 후인 1996년 ‘쌍타자와 강상(雙 子與崗上)’, 1997년 ‘육정산과 발해진(六頂山與渤海鎭)’을 각각 출간했다. 이 보고서에서 중국 학자들은 만주지방의 유적들이 국가 단계에 도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으며 강상과 러우상의 무덤은 혈연관계의 씨족 공동묘지였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계기로 진행되고 있는 한·중 역사 분쟁의 단초는 이미 30여년 전에 시작된 셈이다.
 
3. 청동기 문명과 고대국가의 출현
 

한민족이 세운 첫 번째 고대국가가 고조선(古朝鮮)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안다. 그러나 단군신화(檀君神話)로 우리에게 친숙한 그 고조선이 언제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는 고고학적으로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고조선의 영역과 성립시기 등은 베일에 싸여 있었지만, 지난 수십년 동안 만주지방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 결과 한반도 안에서 맴돌던 고조선에 대한 논의는 만주로 확대되었다.
 
고조선은 만주지방의 청동기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성립됐다.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늦어도 기원전 2000년 무렵 시작됐고 그 위치와 주체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눠볼 수 있다. 내몽골 동남부·랴오닝(遼寧) 서부의 동호(東胡) 집단, 랴오닝 중부·요동반도(遼東半島)·지린(吉林) 중부 및 남부지역의 예맥(濊貊) 집단, 지린 북부 및 헤이룽장지역의 숙신(肅愼) 집단이다.  만주 요동반도 남쪽 끝 다롄 부근에 있는 고조선 유적 러우상 무덤의 발굴 전 모습. 중국과 북한이 1960년대에 공동 발굴했지만 무덤의 성격을 둘러싸고 현저한 해석 차이를 보였다.

1960년대 북한 학자들은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인 패수(浿水)를 현재의 만리장성 남쪽의 난하( 河)로 해석함으로써 두 나라의 접경을 현재의 허베이(河北) 북부지역까지 확대하는 혁신적인 주장을 제기했고, 이러한 주장은 한국에서도 일부 학자들이 수용하고 있다.
 
한편 동호집단은 한(漢)나라 때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로 나뉘었는데 훗날 거란족으로 이어진다. 숙신은 한나라 때는 읍루( 婁), 남북조 시기에는 물길(勿吉), 수당(隋唐) 시기에는 말갈(靺鞨)로 불렸고 뒤의 만주족이다. 

고조선은 기원전 109년 막강한 한나라 무제(武帝)의 침공에 맞서 1년여 동안 대항할 수 있었던 군사력과 사회 조직을 갖춘 나라였다. 왕권을 중심으로 강력한 지배체제를 형성했으며, 법률 집행을 위한 강제력을 보유하였다. 돌무지 무덤, 돌널무덤, 고인돌 등 석재를 이용한 무덤들이 그 같은 사회체제의 유산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요동반도의 구릉지대와 지린성 동남부에서 120기 이상 발견된 북방식 탁자 모양의 고인돌은 한반도 안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거의 같은 형태로, 이 지역 문화와 집단이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고조선은 또 중국과 한반도 남부지역 사이의 장거리 교역을 통제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획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동반도 남단에서는 늦어도 기원전 1000년 경에는 벼농사를 실시했던 것으로 밝혀져 고조선 경제력의 바탕이 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조선에 이어 만주지방에 세워진 예맥 집단의 두 번째 고대국가는 부여(夫餘)로서 고구려(高句麗)로 가는 징검다리라고 할 수 있다.
 
유화부인과 주몽설화에서 보듯 고구려는 부여와 같은 종족이 세운 나라로 기원전 2세기 무렵 압록강 중류의 만주지역에 성립되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 동북지방의 두만강 유역에는 옥저(沃沮),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는 동예(東濊) 등의 예맥 집단이, 한반도 남부에는 마한.변한.진한 등 삼한이 정치적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 이들 집단은 처음에는 고조선의 영향 아래 있다가 고조선이 멸망한 후 고구려의 세력 아래 들어가게 됐다. 

4.북방 예맥족과 남방 韓族 합쳐 한민족 형성
 
오늘의 한민족(韓民族)은 북방의 예맥족(濊貊族=환인족=한웅족=단군족=부여=고구려=대진국)과 남방의 한족(韓族=마한)이 합쳐서 형성된 것이다. 만주 중부와 서남부, 한반도 북부에 살고 있던 예맥족은 다시 고조선을 세운 조선족과 부여·고구려·옥저·동예를 세운 부여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은 결국 기원후 5세기 말 고구려로 통일된다. 한편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했던 3한족(마한-변한-진한)은 독자적인 신석기 및 청동기 문화를 갖고 있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한반도의 마한·진한·변한 등 3개 집단으로 분립(分立)한 3한족은 결국 백제와 신라로 양분된다. 
 
예맥족과 한족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특히 기원전 2세기 말 중국에서 이주해 온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았긴 번조선의 준왕(準王)이 자신의 지지세력과 함께 한반도 남부로 이주한 후에는 두 집단이 뒤섞이게 됐다

▲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고구려 광개토태왕 관련 청동그릇. 중국의 왕조나 아시아 유목국가들를 포함한 동방세계 전체는 ‘고구려 세력권’이었다. 광개토왕의 20년에 걸친 사방(四方) 경략과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의 영역 다지기가 낳은 결과였다.
 
서기 400년 신라의 요청으로 광개토왕이 내려보낸 5만의 군대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신라의 수도 금성에 주둔군을 남겼다. 망국의 위기를 벗어난 신라의 왕과 그 일행이 직접 평양에 이르러 고구려왕에게 조공을 바친 것은 물론이다.
 

광개토왕이 세상을 떠난 1년 뒤 그 왕릉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청동 그릇이 신라 중상급 귀족의 무덤인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것이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을 증언한다.
 
서기 495년 만들어진 중원 고구려비에서 신라왕은 ‘동이매금(東夷寐錦)’으로 일컬어진다. ‘매금’이란 신라왕의 고유 칭호였던 ‘마립간’의 다른 표기이고, ‘동이’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신라를 보는 시각을 나타내는 용어다.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세계로, 그 중심을 고구려로 상정한 고구려인의 의식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혼합은 신라의 나당연맹을 통한 병합으로 1차 완성되고, 다시 고려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고 발해가 멸망한 후 고구려계 발해인들이 고려에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최종 완성된다.
 
이런 한민족의 형성 과정은 민족의 가장 뚜렷한 지표인 언어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어의 뿌리는 예맥족과 한족이 함께 사용하던 ‘부여 한조어(夫餘韓祖語)’로 이것이 발전한 고구려·백제·신라의 언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신라의 통합에 따라 경주 중심의 신라어로 통합된 언어는 고려 초기 한민족이 최종 완성된 후 개성 지방의 언어를 중심으로 집결된다.  

▲ 고인돌 지역과 난생신화(훌륭한 분이 알에서 태어난다는 것)지역이 일치.고인돌이 최소한 8천년 전 것들도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볼때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삼한 사람들)은 고조선 이전부터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이 바다길로 일본,동남아,인도 등에 진출하여 고인돌과 난생신화를 전했던 듯.그리고 오로지 [한반도-만주]지역만 [천손신화(하늘의 후손이라는 신화)]와 [난생신화]와 [고인돌]이 모두 있는 지역임을 볼 때 한민족이 문화의 중심 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5.오늘날의 만주

中 “소외된 만주, 골칫거리 될라” 개발 한창

日 만주침략위한 철도공사 20세기 전반 일본의 만주 침략은 철도 건설과 함께 진행됐다. 일본 기술자들은 하루에 4㎞의 속도로 철로를 깔았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회복해야할 간도

지금부터 100년 전 만주는 일본·러시아 등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러시아는 19세기 말부터 풍부한 인적자원과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남하 정책을 폈고, 일본은 곡물 및 지하자원의 보고인 만주를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 했다.
 
압록강, 두만강을 건넌 조선족에 한족(漢族)까지 몰려들면서 20세기의 만주는 원주민인 만주족과 몽골족 외에도 수많은 민족이 뒤섞여 사는 ‘복합민족구성체’가 됐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날 무렵 만주지역의 인구는 1841만명으로 중국 전체 인구 3억6815만명의 5%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된 한족의 만주 이주로 현재 지린·랴오닝·헤이룽장을 합친 동북 3성의 인구 비중은 1952년에는 전체 인구의 7.2%, 1985년에는 8.78%로 높아졌다가 2002년 말 현재는 8.34%(1억815만명)으로 약간 낮아졌다.
 
2000년도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중국 내 조선족 인구는 192만3400명. 이 가운데 120만명 정도가 지린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72만명 정도가 헤이룽장(30만명), 랴오닝(35만명), 그리고 기타 지역(7만명)에 흩어져 살고 있다.
 
조선족의 거주 집중도가 특히 높은 곳은 옌볜(延邊)자치주인데, 2000년도 조사결과 약 85만4000명이 살고 있다. 그러나 계속된 한족의 이주와 조선족의 한국 이주로 현재 조선족은 자치주 인구의 39.7%밖에 안 되며 한족이 57.4%를 차지해 ‘조선족자치주’라는 이름이 쑥스럽게 되어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의 정권을 장악한 후 만주 지역은 ‘동북(東北) 3성(省)으로 개칭됐다. 지린성의 창춘 제1자동차·지린 화학, 랴오닝성의 안산 철강·번시 제철·금주 석유화학단지, 헤이룽장성의 하얼빈 군수기지 등 대규모 국유기업들이 속속 들어서며 중화학공업이 중심을 이룬 이 지역은 70년대 말까지 중국 경제의 엔진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79년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홍콩과 가까운 동남쪽 지역의 경제특구들에 화교의 투자가 몰리고, 80년대 중반부터는 14개 연해도시가 대외 개방 혜택을 받는 와중에서도 동북지역은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90년대 중반 이후 동북지역과 화동·화남지역 간의 격차는 날로 확대되고 있다. 경쟁력이 없고 시장의 수요와 동떨어진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던 동북 3성의 국영기업들은 결국 국유기업 구조조정 조치를 맞게 된다. 근로자들은 철밥그릇이라고 생각했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체불임금 지급과 새 일자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게 된다. 여기서 ‘동베이현상’(東北現象)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한마디로 옛 만주지역은 중국의 고(高)성장의 축에서 소외된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도부는 동북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잊지 않고 않았다. 21세기 중국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는 동북지역의 산업구조를 현대적인 것으로 변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시의 아파트 공사 현장.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낙후 지역이었던 만주에서는 최근 정부의 주도 아래 대규모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동북지역 대개발사업’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이것은 2001년에 기안되어 2002년 9월 후진타오 신체제가 탄생한 공산당 제16기 대회에서 확정됐다. 이 사업은 그동안 침체됐던 랴오닝·헤이룽장·지린 등 옛 중화학공업기지를 재건함으로써 지나치게 경공업과 IT 위주로 치닫는 중국의 산업구조 왜곡을 시정하겠다는 것이 목표이다. 중국 정부는 2003년 10월 말 100대 프로젝트에 1차 투자자금 총 610억위안(약 9조원)을 투입했다.
 
물론 여기에는 비경제적 요인도 고려되었다. 한반도 장래가 불확실한 상황 아래서 어느날 북한이 붕괴되기라도 한다면 만주족과 조선족이 많고 낙후된 동북지역의 정치적 위험이 커질 것이다.
 
중국은 ▲미국이 한국을 등에 업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세력 범위를 확장하고 ▲원기를 회복한 러시아가 미국의 세력 팽창을 견제한다는 구실로 개입하고 ▲만주 지배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일본이 엔 차관과 경협 프로젝트를 구실로 만주 접근을 강화하는 상황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상황 인식과 관련, 중국 정부의 ‘동베이 꿍청’(東北工程)은 21세기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걸맞은 만주의 역사적 위상을 되찾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동북아지역 개발사업’이 옛 만주 경제의 영화를 재현시키려는 노력이라면 ‘동베이꿍청’은 홍콩 주권 환수와 마카오 주권 회복에 이어 마지막 남은 치욕의 역사적 잔재를 지우려는 시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 대진국(고려=발해)가 시작된 동모산. 첫 번째 도읍이었던 길림성 돈화시 부근 동모산의 모습

6.한(남북한)·中·러 학자와 공동조사 연구해야
 
북방사 연구를 한층 활성화하고 심화시키는 것은 또한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중심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한반도를 우리의 활동 무대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한민족의 활동 공간은 훨씬 넓어질 것이고, 그 일차적 대상은 만주를 비롯한 북방이 될 것이다. 비록 직접적인 영토는 아니더라도, 경제·문화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방사 연구와 교육은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을 포함한 북방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북방 지역의 민족들과 지속적으로 문물 교류를 하였고, 때로는 항쟁을 벌이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고자 할 때 북방사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의 북방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몹시 부족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분단이 됐고, 북방 지역이 공산화되면서 냉전체제하에서 북방 연구는 금기시됐다. 그렇다 보니 북방사 연구도 자연히 다른 분야에 비해 소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문제가 된 고구려사뿐만 아니라 북방 지역의 신석기 문화, 고조선사, 부여사, 발해사 등도 연구해야 한다. 또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북방 지역과의 관계사, 그리고 근현대 시기의 북방지역사까지도 두루 포함해야 할 것이다.
우선 북방 지역의 역사·문화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국내에 있는 것들부터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고, 이어 북한·중국·일본 등 외국에 있는 자료를 수집하여 추가해야 한다. 그리고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사와 관련된 연구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북방사, 북방관계사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북방 지역에 대한 현장조사가 중요하므로 북한·중국·러시아의 학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하고 연구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함께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공동의 역사인식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먼저 학자들의 견해 차이를 좁혀야 장기적으로 관련 국가 국민들이 공통의 인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평양에서 북한 학자들과 만나 이 문제에 대해 협의했는데 그들도 같은 인식을 하고 있었으며, 공동으로 이 문제에 대해 대처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과 정부가 북방사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란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우리 민족의 현재·미래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역사의식을 제대로 갖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우리 국민이 올바른 역사 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를 학교 교육에서 독립 교과로 편성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사회교육도 강화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우리가 지키고 가꾸지 않는다면 누가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7.김지하 ‘생명과 평화의 길’

“中, 고구려史 편입시도는 잃는게 더 많을 것”

평화!
삶 자체로부터 오는 참다운 평화가 아니라면 전쟁뿐이다. 거짓 평화란 없다. 우리는 내면으로부터 지극히 평화를 기리면서도 현실에 있어 아슬아슬한 목전의 전쟁에 부딪치고 있다. 전쟁에 대한 예감이나 담론 자체가 전쟁이요, 매일매일의 전쟁 논리가 곧 전쟁의 시작이다. 우리는 매일 매시간 평화를 외치면서도 실제에 있어 매일 매시간 전쟁에 접근하고 있다. 그것은 아메리카에 관련된 것이거나 일본에 대한 것이었고, 흔히는 북한에 관한 얘기였으나 지금은 그것이 중국이다.
 
중국!
먼 서양인들의 눈에는 한국과 얼추 비슷하면서도 엄연히 서로 다른 그 중국이 단순한 예감의 차원을 넘어 전쟁의 확실한 가능성의 한계 안으로 다가들었다. 중요한 것은 우선 상식화된 우리의 논리다.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니다.” “너와 나는 언제나 싸우는 것이니, 너와 나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이김으로써 상대를 흡수 통합한다.”
 
이미 이렇게 우리는 마음 안에서, 이야기 속에서, 사유 속에서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먼저 이 내면과 상식의 영역에서 평화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현실의 ‘악무한’(惡無限)인 전쟁으로부터 결코 탈출하지 못한다. 분명히 말한다.
 
 중국 지안시 환도산성 내에 펼쳐진 고구려 고분군. 기원 3년부터 427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안에는 광개토왕비와 장군총을 비롯하여 고구려 전성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탈출하지 못한다!
 
왜? 우선 동아시아는 그 자체의 독특한 문명적 ‘반대일치(反對一致)’ 안에 있다. 아직까지도 확실한 지역적인 경제공동체나 ‘시장합석(市場合席)’, 그리고 ‘호혜(互惠)의 망(網)’을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儒)·불(佛)·선(仙) 등의 청천백일 같은 전통가치는 뚜렷이 공유하고 있다.
 
어쩌면 ‘반대일치’가 아니라 ‘일치된 반대’일 수도 있고, 그런가 하면 문명 후반의 지리멸렬이 아니라 오히려 새 문명의 새파랗고 확실한 가능성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오늘의 진화론은 ‘군집(群集)의 개별화(個別化)’가 아니라 ‘개별성들 안에서의 얼룩덜룩한 군집화’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에서부터 제 길을 제대로 가지 않고 있음이다. 그 가장 명백한 국제적 오류는 중국에서부터 나온다. 민족적 패권주의나 중국제일주의가 곧 자기가 늘 지니고 있어야 할 문화대국으로서의 큰 포부, 큰 경륜을 애써 깨뜨리고 있음이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 자신의 소명과 경륜을 스스로 더럽히고 짓밟고 있으니―왈,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공정(工程)’에 대응하는 주변 민족들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 얼마 전에 만난 베트남 작가동맹 서기장 휴틴은 가라사대 “베트남은 작은 나라고, 중국은 큰 나라다. 양자 사이엔 프렌드십이 있을 뿐이다. 허허허.” 이 말을 반복하며 계속 웃고 있는 그 웃음에서 중국 민족이 동아시아 여러 민족에 가한 상흔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베트남의 그런 전술적 태도가 아닌 한국인의 눈시리도록 명백한 대응으로서의 네 가지 얘기를 한편 한숨, 또 한편 실소(失笑)로 낮게, 느리게 띄엄띄엄 말해주던 일이 생각난다.
 
“첫째, 중국인을 포함해서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이 다 참여하는 고대 아시아 문예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둘째, 미래의 새 문화를 창조하는 데에 장애물이 되는 관료주의에 대해 전 세계인이 참가하는 평화적인 문화대개벽이 일어나야 한다. 셋째, 우주 또는 지구생명학을 학제적(學際的) 차원에서 탐색하면서 전 세계가 참가하는 인간과 비인간 전부의 생명 공동 주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넷째, 이 세 가지 문화운동을 위해 문(文)·사(史)·철(哲)을 종합하는 새로운 문화이론이 불붙어야 한다. 우선 한국과 베트남 작가들이 선두에 서자.”
 
나는 지금 이 네 가지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섬뜩해진다.
 
혼자서 아시아 고대 문예부흥 역할에 핏대를 올리던 때의 그 가슴시린 외로움 곁에, 한민족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민족들과 함께 우리 고대를 살펴봤으면 한다. 긴급한 경제적 어려움 외에도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은 너무나 많다. 우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 할 동아시아 나름의 숙제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호혜망 등등. 나는 이 글을 다음의 말로 끝맺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사상이다. 동아시아가 한데 손잡고 위급한 세계사상사에 기여해야 할 부분은 역시 사상이다. 그러나 사상 문제가 바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현대의 특징인 것을 어쩌랴. 긴급한 것이다. [출처 한민족의 북방 고대사] 사진.그림편집/윤복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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