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고구려 정신

자주성과 주체성과 창조성으로 능동적인 국민과 민족이 되야 한다

윤명철 교수 | 기사입력 2008/04/21 [02:15]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고구려 정신

자주성과 주체성과 창조성으로 능동적인 국민과 민족이 되야 한다

윤명철 교수 | 입력 : 2008/04/21 [02:15]
▲  윤명철 교수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밀레니엄이라는 21세기를 맞아 엄청난 대 변혁의 폭풍 가운데서 휩쓸려 다니고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두에 걸쳐 개편된 세계질서가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진동과 큰 진폭으로 다시 재편되고 있다. 앞으로 몇년 간에 짜여진 기본틀은 인류의 장래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적으로 각 민족과 국가들의 50년 내지 100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그런데도 광범위하고 전면적인 세계화가 추진되고 新文明이 도래하는 현실을 맞이하면서도, 우리는 나아갈 座標를 설정하지 못한채 표류하고 있다. 안으로는 인간성을 잃어가고, 도덕적으로 황폐화 되며, 사회질서는 뿌리채 흔들리는 등 혼란이 심해지고 있다. 한편 밖으로는 세계질서에 대하여 어떻게 적응할까하는 對應論理가 성숙되지 못했다. 또한 정제되지 못한 외부문화가 범람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世界化(globalization)마져 이루지 못하고 있다.. 바야흐로 민족사의 최대위기이면서 동시에 도약할수 있는 호기이기도 한 매우 중대한 시기이다. 이러한 상황을 맞아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적합한 對應方法論을 만들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가치관을 만들고, 또 방향을 결정하는데 남의 눈을 통하고, 남의 입장에서 하였다. 다른 세계를 해석한 틀로 우리의 삶과 미래를 규정짓고, 남의 모범 답안지를 갖고, 우리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정답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한 집단을 기본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그 집단 스스로가 하는 것이 순리이다. 일을 주체가 해석을 하는 것은 名分으로나 實質로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야말로 모든 일을 같이 체험했고, 절실함을 느끼며, 또 집단의 지향점과 생각을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남의 생각을 흉내내고 남의 모델을 빌어서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비현실적일 가능성이 많으며,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도 미리 알 수 없다. 또한 다양한 실험과 치밀한 검증작업이 미흡하거나 생략되어 있으므로 실패할 확률이 그만큼 많아진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한 집단의 경험과 역사는 바로 主體集團의 言語와 생각을 바탕으로 해석해야하며, 문제의 해결방법 또한 스스로가 찾아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천 수백년 동안 종교 사상 이데올로기 등의 남의 이론과 모델을 빌어다 허겁지겁 전면적으로 적용하려는 서글픈 노력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결과적으로는 자기역사에서 마져 周邊部로 밀려나 傍觀者的인 태도로 살아왔다.

이러한 과거에 행해졌던 한계를 극복하고, 주어진 몇가지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한 모델을 우리 역사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에겐 남의 모델을 적용하고 유예기간을 갖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실을 고증하고 내용과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what)이고, 왜(why) 그렇게 되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어떻게(how) 해결하는가 하는 방법론을 추구하고, 제시하는 것도 중요한 사명이다. 역사학이야말로 경험과 실험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다. 이미 검증한 사건을 수단으로 삼음으로서 실패율이 적은 해결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숱한 역사과정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모델을 설정할 수가 있다. 때문에 역사학은 과거를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未來學인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를 통해서 우리민족의 자아(정체성,identity)를 찾고, 확립할 수 있다. 당면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21세기에 자주적인 역사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해야할 일은 많이 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1차적인 과제는 잊어버렸고, 잃어버렸던 민족의 자아를 찾고 회복하는 일이다. 개인에게 自我가 있듯이 민족에게도 自我가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하여, 사회가 사회답고, 민족이 민족답게 존재하기 위하여는 자신에 대한 自覺, 민족에 대한 자각이 투철해야 한다. 자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삶에 대해 자신감도 갖지못할 뿐 더러, 자존심도 약하고, 의미있게 살려는 노력도 게을리 한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민족은 항상 다른 민족과 구별되려고 하며, 경쟁의식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으므로 자아가 매우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에서 진보의 동력은 자아의식에서 부터 나온다. 자아의식이야 말로 사회를 밝게하고 민족과 역사를 진보시키는 에너지이다. 정체성이란 Harald Muller의 말처럼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류의 역사과정이 말해주듯이 민족자아의 상실은 사회와 역사발전의 왜곡을 가져오고, 내부의 인간들로 하여금 自由意志를 포기하고 非主體的인 삶을 살아가게 한다. 당연히 그 사회는 生命力과 진실을 잃어버리게 되고 인간성은 오염되며, 다른민족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런데 우리민족은 외세에 의하여 자주적인 역사발전이 오랫동안 저해당해왔고, 영토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다.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발전의 단계는 고구려의 멸망, 발해의 멸망으로 인하여 저지당했다. 그리고 만주일대에 뻗쳐있던 광활한 영토와 삶의 터전을 빼앗겨 버렸다. 영토의 상실이란 단순한 땅이나 자연환경의 손실이 아니다. 그 땅과 인연을 직접 간접으로 맺은 삶의 상실, 역사의 상실이다. 때문에 문화가 왜곡되거나 감추어져 왔을 뿐 만 아니라 자기문화를 현장체험을 할 기회마져 봉쇄당했다. 천여년 이상 우리는 잃어버린 땅에 삶의 흔적을 묻힐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흔적을 찾을 기회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또한 외부문화를 능동적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비자발적으로 수용했고, 외부문화에 수동적으로 편입되었다. 그 때문에 우리문화에 대한 자의식이 약할 뿐만 아니라 정체성(identity)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지 못한채 어정쩡하게 지내왔다. 특히 근대화가 시작되고, 현재 우리의 운명을 규정한 20세기는 주체적으로 맞이한 시대가 아니었다. 세계사의 조류에 흽쓸리고,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하여 피동적으로 강요받은 시대였다. 따라서 자기의 역사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해석을 할 기회가 적었다. 스스로를 비하하게 되었고, 왜곡된 문화를 강제로 수입당했을 뿐 만 아니라, 民族自我를 상실하였다. 그 결과 닥쳐온 현실을 능동적으로 극복할 수 없었으며 20세기를 맞이할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수도 없었다. 물론 지배계급에서는 開化運動, 自强運動 등을 추진하였고, 농민들은 동학농민혁명을 통해서 나름대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탁류를 거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식민지가 되었고, 민족이 분단되었으며, 급기야는 한국전쟁이라는 동족간의 살륙전이 벌어졌다. 이후에도 근대화를 비자발적으로 추진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독재정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역시 우리의 역사발전은 왜곡되어왔다.

이제 뒤늦게나마 역사를 정상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방법에는 총론적, 각론적으로 여러가지가 있다. 경제능력의 강화, 消費의 量을 증가시키는일, 합리적인 제도를 구비하는일 등 다양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토대가 되는 것은 우선 민족자존심을 회복하고, 역사의 주체는 바로 자신들이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일이다. 그러기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이라는 存在의 原根據를 탐구하고, 또 인식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민족의 고질적인 성격으로 알려져있는 강요받은 사대성, 주변성, 대국콤플렉스 등을 말끔히 해소하여야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역사에서 모델로서 본받을 자격을 갖춘 자의식이 강했던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는 자의식을 바탕으로 제국이 되었고, 문화적으로도 매우 성숙하였다. 바로 고구려이다. 고구려는 고조선과 부여를 이어받았다는 계승의식이 강하였고, 또 실제적으로도 그러하였으므로 건국한 출발부터 자의식이 강했다.

▲  고추모가 처음 고구리 터를 잡았다는 만주지역의 골본성 -  아래로 비류수가 흐른다
 
고구려인들은 해를 숭배하고, 자신들을 천손이라고 선언했다. 주몽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解慕漱 解夫婁 등의 부여계와 解明태자 解朱留王(3대 大武神王) 解憂(5대 모본왕,解愛婁라고도 함) 등 고구려의 초기왕족들은 이름이 解와 관련이 있었다. 이때 '解'는 물론 한자의 의미는 없고, 태양을 의미하는 우리 말이다. 각저총, 오호묘 등의 고분벽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는 三足烏는 태양을 상징하는 새이다.


고구려는 정복활동에서도 그러한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고주몽은 건국하자 마자 松讓의 沸流國을 정복한 다음에 多勿都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는 영토팽창이 고토회복 행위임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전성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영토를 확대하고 주변의 다양한 종족과 문화를 흡수해갔다. 그런데 북방과 동방의 새로 편입된 국민은 언어와 혈통이 다른 종족들이었다. 예를 들면 靺鞨은 고구려와는 언어와 풍속이 달랐다. 활동범주와 생활양식도 달랐다. 요하의 상류지역에는 契丹이 살고 있었고, 오랫동안 고구려와 요동을 둘러싸고 쟁패전을 벌이다가 광개토대왕 시대에 평정한 燕은 鮮卑族이 세운 나라들이었다. 장수왕시대에는 地豆于를 분할하려는 기도가 있었다. 이로 보아 동몽골지방의 유목종족들도 흡수하였다. 그외에도 남으로는 낙랑 등에 거주하고 있었던 漢族도 고구려의 주민이 되었다. 이렇게 多文化國家, 多種族的 國家가 되면서 고구려인들은 종족으로서 자아확인을 더욱 중요시했다. 또한 그것을 외부에 전파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고구려인들은 출발부터 천손(天孫)의식을 더욱 강조하였으며, 언제부터인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특히 광개토대왕이 죽고 나서 2년후인 414년에 세워진 거대한 기념물인 릉비는 높이가 6,39m에다 4면의 44행에 1775자가 음각되어 있다. 그 곳에는 광개토대왕이 생전에 이룩한 정복활동과 업적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형식미는 상징과 논리를 함유하고 있다. 그 장엄미를 내뿜고 흠모와 경외심을 일으키는 몸체 속에 고구려인의 언어로 역사관 및 세계관 등을 응축시켜 놓았다. 비는 자국민들에게는 물론 주변종족들에게 오랫동안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발전의 기본방향을 제시하므로서 '역사의 里程標' 내지 '민족의 座標' 역할을 하게 하였다.

▲ 고구려의 전성시대
이 비문에서 가장 의미있는 귀절은 '出自北扶餘天帝之子 母河伯女郞'로서 고구려가 天孫民族이라는 自己宣言이다. 비문은 이어지는 문장에서도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이라고 반복하여 천손임을 강조하면서 자존의식을 드높이고 있다. 비문보다 바로 전시기에 만들어진 牟頭婁塚의 묘지에는 시조가 '日月之子' 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그것이 그 시대에 보편적인 인식이었음을 알려준다. 건국신화에서도 건국자가 하늘과 땅 혹은 하늘과 물의 결합에 따라서 탄생된 존재임을 알려주고 있다. 고구려가 곧 우주, 혹은 세계의 중심이며, 하늘의 피를 받은 민족이라는 인식을 반영한다.


그 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충북충주시의 '中原高句麗碑' 등 당대 일부 사료에는 大(太?)王, 奴客 東夷寐錦 등의 표현이 있다.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나 國史 高句麗本紀를 인용한 三國遺事에서도 東明聖帝라고 하였으며, {隋書} 高麗傳에는 昭列帝라는 표현이 있다. 고구려는 그 외에도 '天王郞'(天王地神塚)이라는 표현 등 거룩하고 성스러운 용어들을 썼다. 李奎報가 쓴 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편에 실려있는 건국신화에서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는 하늘과 땅을 오고가며 정치를 했다. 주몽 또한 黃龍으로 표현되었다. 살아있을 때는 麒麟窟을 통해서 하늘을 오고가다가 죽을 때도 옥채찍 하나만을 남긴채 하늘로 올라갔다.

▲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묘실 천장 받침돌에 그려져있는 달의 신
 
고구려인들이 그린 고분의 중요한 벽화(五 墳 4호묘,5호묘)에는 해신과 달신이 우미하게 그려져 있고, 천정에는 황룡이 고결한 모습으로 그려져있다. 이때 해신과 달신이 단순한 신화에 나오는 伏羲와 여와가 아니라 주몽의 부모인 해신 解慕漱와 달신 柳花婦人을 상징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安岳3호분(북한에서는 美川王陵으로 보고 있다.)에는 큰 규모의 행렬도가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에 '성상번(聖上幡)'이란 글자가 쓰여진 깃발 등이 있다. 벽화내용 중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天孫民族이라는 고구려인들의 自意識과 그것을 확인하고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자신감은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영되어 있다.


▲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고구려 벽화 중 `해의 신
 
이러한 여러 가지 문화현상이나 고구려인들의 말, 역사활동을 볼 때 정체성과 자의식이 매우 강했음을 알수 있다. 이러한 자아의식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고구려인들로 하여금 넘실거리는 주체의식을 가지고 했고,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하였으며, 역사의 주인으로서 창의력과 강한 자유의지(free-will)를 갖게 하였던 것 같다. 특히 남에게 굴복하지 않는 저항정신 등은 민족의 발전과 자주성을 수호하는 고결한 행위로 나타났다. 늘 외세와 대결하면서 주로 民族戰爭을 치루어야 하는 고구려인들의 감동적인 전투과정, 아름다우면서도 긴장감 넘치고 치밀한 성벽구조 등은 그러한 자유의지를 느끼게 한다.


윤명철(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고구려 연구회 이사.해양문화 연구소 소장)
정재민 08/04/21 [18:57] 수정 삭제  
  해를 들고 있는게 아니라 그 옆에 달을 들고 있는 여자입니다. 달 안에 두꺼비가 있습니다. 해를 든 것은 옆에 짝으로 나온 남자입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지리산 노고단에 핀 진달래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