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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산동성에서 당태종 '형' 전사시키다(4)

蓬萊에 산재해 있는 연개소문 관련 전적지는 단순한 '고사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자세해

플러스코리아 | 기사입력 2009/12/15 [13:56]

연개소문,산동성에서 당태종 '형' 전사시키다(4)

蓬萊에 산재해 있는 연개소문 관련 전적지는 단순한 '고사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자세해

플러스코리아 | 입력 : 2009/12/15 [13:56]
본 기사는 '우리역사교육원(기사하단 배너참조)‘의 도움을 받아 추적중인 중국내에 있는 연개소문 관련 유적지 중 그 네번째로 중국 산동성 봉래(蓬萊)에 남겨진 전적 유적지를 소개한다. 내용이 길어 일부만 소개하는데, 관련 사이트는 현재 접속이 불가능하다. 

* 사이트 주소 : http://www.shandongok.com/web/sdgs/2003-10/1067065295.html
* 소재지 : 산동성 봉래(蓬萊) 일대
* 유적지 : 연개소문의 군사가 당태종의 형을 전사시킨 대왕묘(大王廟) 등


봉래(蓬萊)의 당태종(唐太宗) 전설(傳說)
* 唐太宗在蓬萊的傳說
 
▲ 산동성 봉래시 위치 및 연개소문 전적지 지도     ©플러스코리아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 정관18년(644년), 당태종 이세민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친히 고구려를 치기 위해 봉래의 남쪽 산 마을(가전촌)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행운이 있어 황제를 태운 가마를 볼 수 있었다. 

당시 고구려 연개소문은 당태종의 동정(東征)소식을 접한 후에 그를 막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왔다. 백성들과 당군은 가전촌 동 2리 되는 마을(호가구촌護駕溝村)에 황제의 가마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 후 당군은 마을에 집결하여 남쪽 고산에 진을 치고 고산 아래에서 연개소문 군사와 싸웠다. 연개소문 군사들은 크게 패한 후 도망가 고산 북쪽 약 15 리쯤 되는 곳에 진을 치고 병마를 정비하고 더불어 병영의 주위에 흙으로 성과 담을 쌓았다. 후에 사람들은 그 성을 고성(古城)이라 했다. 

후에 성의 동쪽 마을은 고성동촌으로, 남쪽은 묘(苗)씨 성들이 많이 살아 고성묘가촌(古城苗家村)으로, 성의 서쪽은 이씨가 많아 고성이가촌(古城李家村)으로 불리어졌다.


▲ (연개소문 관련지도) 태상이가, 대구이가     ©플러스코리아

 
당태종의 형이 있었는데 산 아래의 마을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켰는데 장(張)씨 성이 많아 참마장가(站馬張家)라 불렸다. 당태종의 형은 연개소문의 병사들과 싸우다 죽었다. 당태종은 참마장가의 남쪽에 사당을 세우고 대왕묘(大王廟)라 하고 그를 기렸다.
 (중략)

▲ (연개소문 관련지도) 장가     ©플러스코리아


태종이 고산 정상에 진을 치고 있는 동안에 물이 없어 굉장히 초조해 하다가 허리에 찬 보검을 빼서 바위를 내려치니 칼이 반자나 들어갔고 갈라진 틈으로 칼을 타고 샘물이 솟았다. 

물은 끊임없이 나왔고 후인들이 일검천(一劍泉)이라 했으며 지금도 줄지 않고 나오고 있다. 한 번은 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송가촌 서산을 지나던 중 병마가 지치고 피곤하여 쉬도록 명한 뒤 창을 힘껏 던지니 긴 창이 멀지 않은 곳에 박혔는데, 그 때에 거기에서 샘물이 솟아나 관병이 기뻐하여 돌로 1 m 정도의 물굽이(우물)을 만들어 인마가 마시게 되니 인마만(人馬灣)이라 했다.
(중략)

태종은 군사를 거느리고 산에서 내려와 북상하여 마을의 북쪽 2리 되는 곳에서 연개소문의 병사와 싸웠는데 연개소문군이 대패하였다.
(중략)

태종은 조선도(造船圖)를 얻은 후에 병사를 거느리고 용산을 떠나 현의 성에 이르러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하였다. 그 때 남왕촌 동북 5 리의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날도 저물고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숙가부촌(宿駕埠村)이라 했다.


▲ (연개소문 관련지도) 봉래시 숙가보     ©플러스코리아


다음 날 현의 성을 떠나 멀지 않은 곳에 행차를 하였는데 그 때 연개소문은 당태종이 이 길을 지나갈 것을 미리 알고 부근에 가마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있었는데, 이 곳은 란가당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때는 밤이 깊고 바람과 비까지 더해져서 태종은 연개소문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태종은 현의 성 남쪽 묘산의 아래의 개울에 몸을 숨겼다. 이 곳은 왕구촌(王溝村)이라 한다.

날이 밝아 비 갠 후에 태종은 가마를 정비하고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현의 서남쪽의 강을 건너다가 태종의 가마가 홀연히 물 속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 곳은 락가하(落駕河)라 한다.
(중략)
 
▲ 봉래시 연개소문 관련 지명 종합도     ©플러스코리아
 
이상이 산동성 봉래(蓬萊)에 남겨진 당태종과 연개소문의 전쟁관련 유적지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고사들 중에 당태종이 고구려 연개소문에 패에 도주하였다는 기록을 여러 번 소개한 바 있지만, 현지에 당태종의 형이 고구려 연개소문의 병사에 의해 전사 하였다는 구체적인 고사가 남아있다는 것은 놀라운 기록이다. 고사에 나오는 마을이름도 현재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하는 것은 신기할 따름이다.

일부 민족사학자들에 의하면 산동성은 고대 배달국 14대 치우한웅이 도읍한 ‘청구’ 땅이라 주장하는데, 치우한웅을 시조로 모시는 ‘묘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묘가촌(苗家村)’이 현재도 있다고 하니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단순히 현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이토록 자세하다면 전설을 떠나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연구해 보아야 한다. 실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 다음에야 이토록 자세히 전해질 수 있을까? 

봉래지역을 여행하는 분들이 있다면 본 기사를 참고하여 현지의 연개소문 전적지를 찾아보는 일도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도대체 연개소문의 흔적은 중국 대륙내 어디까지 나타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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