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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복현 2008/03/07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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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일제에 의해 옮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봅니다

    [성헌 칼럼니스트:고구려의 당시 수도였던 환도성은 현 길림성 집안이 아니라 하북성이 맞다고 하겠다. 집안에서 관구검 기공비가 발견되었다. 위나라 유주(북경)자사인 관구검이 북경 일대에서 현 집안으로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옥저(요녕성)로 달아나는 동천왕을 추격한 것이 아니고, 북경 쪽에서 하북성에 있던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옥저(요녕성) 땅으로 도망온 동천왕을 계속 추격해 길림성 집안까지 왔다고 봐야 그 순서가 맞고 행적이 맞는 것이다. ..고구려 때 황제비의 받침대(대석)을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분명 37톤의 무게를 오랫동안 견디도록 받침대를 크고 견고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만일 비를 세우고 120년 만에 이렇게 침하되었다면, 분명 후대의 왕 누군가가 제대로 다시 대석을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재의 대석은 너무 작고 하중을 못 견딜 정도로 부실하다보니 깨지고 망가진 것이다. . .집안 지역은 현재 우리 사학계에서는 부인하고 있지만 분명 고려의 영토였다. 그렇다면 고려의 사서에 이 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방은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조선의 영토는 동서이천리 남북사천리’라 했듯이 조선의 영토이기도 했는데, 설사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서간도를 개척할 당시 이렇게 큰 비가 우리 주민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조선의 사서에도 이 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호태왕비는 원래 집안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선생님의 견해처럼 엄청난 무게에 달하는 37톤의 무게를 견딜 크고 견고한 받침대없이 허술하게 만들었겠습니까? 일제가 왕검성이 북한의 평양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기위해 번조선의 수도이자 번조선의 왕검성을 함락시킨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하북성 창려지역의 돌비석을 북한 평양지역으로 갖다놓았는데, 북한 학자들이 명확히 돌자체가 성분상 북한의 돌이 아님을 과학적으로 밝힌 적이 있습니다.. 광개토태왕비 또한 그럴 요지가 충분합니다. 만주 집안지역의 1만5천기의 피라미드들은 고구려 유적지가 아니라, 배달국 시대와 단군조선시대의 유적지로 보아야 맞다고 봅니다. 고구려 무덤의 특징은 그림자체가 없는 피라미드 양식이 아니고 화려한 그림들로 치장된 무덤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집안지역은 고구려가 조상들의 유적지로 성스럽게 생각한 성지로 생각한 장소였다고 보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그래서 고구려이전의 유적지에 불과한 피라미드 무덤들을 가지고 마치 장수왕과 광개토태왕의 무덤인양 세뇌시켜온 만주지역의 장군총이네 태왕릉이네 하는건 식민사관의 왜곡이라고 보여지며, 장수왕과 광개토태왕의 무덤은 만주에 있지 않고 하북성 지역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서안지역의 대형 피라미드들은 만주 집안지역의 피라미드보다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소형 피라미드들이 군집한 만주 집안지역의 연대가 훨씬 앞선다고 보여 집니다. 소형에서 대형으로 발전하는 이치에서도 그렇고 또한 세계 피라미드 무덤양식의 기원(남방식 고인돌 무덤양식)이 되는 고인돌들이 밀집된 한반도에서 만주와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산된 한반도 문명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쥐나정부는 서안지역과 집안지역의 피라미드들에 대한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사유가 된다고 봅니다.
  • 독자 2008/03/0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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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혀지는 광개토태왕
    천년이나 감춰진 진실
    플러스코리아가 그 진실을 찾으셨군요.
    고맙습니다.
    진실은 승리한다는 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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