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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헤헤 2010/04/25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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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러스 코리아는 뭐하는 곳인지.. 삐딱선에 주관성이 매우강한
    정도를 벗어난 사람들기고로 구성된 방병역 윤복현씨 모두 역사스페셜 게시판에서 욕먹고사는 분들인데.. 원고료는 얼마나 주나요? 윤복현씨. 나도한번 글좀 써볼까? 플러스코리아 사장이 자선사업가는 아닌지.. 골때리는 곳이네..ㅋㅋ 신라김씨가 한동안 김씨를 사용하지못하고 법흥왕때와서 다시 사용한 이유는 그들이 신나라멸망후 숨어지내야했기에 목숨보존 차원에서 성씨를 숨길수밖에 없었고 이후 신라에 들어와 주도권을 장악하기까지 성씨 사용흔적이 보이지않음. 국사를 편찬한 거칠부나 우산국을 점령한 지증왕때의 이사부의 경우를 통해보아도 그러함 거칠부나 이사부모두 김씨 이사부는 내물왕의 4대손이라함. 이럴경우 이사부 거칠부와 같이 법흥왕의 어릴때 이름또한 순수한 이름이란걸 알수있다. 모진은 성이 포함이 안된 순수한 이름인것. 법흥왕때 김씨를 다시 사용한건 영토확장을 통해 중국과의 외교루트가 생겨나면서 부터임.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군신관계였기에 외교문서상 신라왕의 격을 낮추어 불러야했기에 신라왕의 이름을 밝힐수밖에 없었던것. 삼국사기기록에 성모명진은 책부원구를 저술한 중국인이 모진이란 이름이 순수한 이름임에도 중국식이름인걸로 착각한걸로 봐야함. 모진에서 김원종으로의 개명은 바로 순수한 이름만 사용하던 관행에서 성과 이름을 함께 쓰게 됨에 따라 성이 포함된 이름에 맞게 자연스러울 필요가 있었기에 개명한걸로 봐야..


    악플은 사절함ㅋㅋ
  • 바른역사 2010/04/2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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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연구의 도움 안 되는 사학세력들
    식민사관=동북공정사관=신라사관..애네들은 전혀 민족사연구에 도움이 안 되는 사학세력이라 할 수 있다. 저 기사처럼 명확히 고증자료를 제시해도 비난하는 자들이 역사열등감에 사로 잡힌 일본.지나국.신라론자들이다.
  • ㅋㅋㅋㅋ 2010/04/2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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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럼 왜구실체들도 선비족이네.
    선비족나라=수.당.신라.가야.왜...ㅋㅋ..오로지 칼들고 설치고 다니는 넘들~ㅋㅋ~~애네들은 총칼만 들면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무뇌들~민황후를 살해한 넘들도 이러한 호전적인 선비왜구넘들이였다.ㅋ
  • 신라사관론자들사절 2010/04/2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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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역사스폐셜 게시판에서 윤복현 욕하는 자들은
    kbs역사스폐셜 게시판에서 윤복현 욕하는 자들은 신라가 최고라는 무개념 신라사관론자들하고 매우 주관적인 역사인식에 사로 잡힌 자들임..ㅋㅋ..윤복현의 역사논리는 고증사료에 입각한 매우 객관적인 역사인식이라 할 수 있음
  • 헤헤헤 2010/04/2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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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세명 전부 윤복현씨인듯한데.. 난 신라 사관자 아님
    대당김씨부인묘비, 문무왕비문, 김씨가 성씨를 숨길수밖에 없었던 이유, 김알지후손인 이사부,거칠부,스키타이와 유사하게 나온 신라추암동고분의 유골DNA,가 김씨흉노설의 명확한 증거임,북방계유물과 고분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 돌팔이말을 곧이 곧대로 수용한 윤복현씨야 말로. 객관성이 없음. 법흥황 이전 김씨가 김이라는 성씨를 사용하지않을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신나라멸망후 목숨보존차원이었다는데.. 법흥왕이전 이사부 거칠부의 경우를 보더라도 모진이란 성이 포함안된 순수한 이름임을 알수있슴

  • 기본을너무모른다 2010/04/27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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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적석목곽분 시기가 4-5세기다
    4-5세기면 초원에서는 흉노족이 사라지고 선비족이 주인이 된 시기다.4-5세기면 선비족이 흉노족을 흡수했으니 흉노라고 인식할 수 있으나,초원의 주인은 선비족이 분명하다.경주지역 적석목곽분은 왕족무덤이 분명한 것이고, 김일제는 흉노족인데,기원전에 한무제에게 투항하여 한족화된 흉노족으로 그 후손이 김알지세력으로 신나라가 망하자 산동지역에서 배타고 한반도남부로 들어와 가야.신라를 형성한 세력인 것이고, 경주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인 모용선비족이 혈통적으로 보면 초원세력이니 만큼 김일제 성씨로 개명할 수도 있다.
  • 바로알자 2010/04/27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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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김씨성은 한나라 한무제가 하사한 성씨
    흉노왕 아들 김일제가 한무제에게 투항하다 열심으로 충성하니 넘 이뻐서 하사한 성씨
  • dna가스키타이 2010/04/28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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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na가 스키타이로 나왔으면 게임오버다.
    신라추암동고분의 주인공 역시 김씨, 추암동고분이 모든걸 말해준다. 추암동고분은 6세기 것이기에 김씨가 흉노에서 출발했다라는걸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흉노의 민족구성은 여러갈래이지만 왕족은 스키타이계라는건 흉노시대 미라가 말해준다. 6세기추암동고분의 dna가 선비기원설이 돌팔이의 엉터리 상상물 이란걸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
    모진의 성이 모씨이면 이사부는 이씨이고 거칠부는 거씨?
    ㅋㅋ 그리고 울진봉평비에 나오는 다른 모자 쓰는 사람관직은 왜 낮은가?
    모는 그냥 이름이란증거. 법흥왕때의 법흥왕과 같은 뿌리인 사람의 관직이 그리낮을리가 없지. 봉평비에 모라는 글자가 들어간 사람은 법흥왕과는 씨가 다른 사람이라는 결정적 증거이다.

    봉평비에 나오는 모라는 글자가 들어가지않은 사람들중 관직이 높은 사람의 성이 법흥왕과 다르다는것도 이상하지않은가. 법흥왕때라면 골품제가 거의 확립되어간 시기인데 법흥왕과 같은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높은관직을 가질수없다는 얘기다. 봉평비에 거론된 사람들 모두 성이 포함되지않은 이름만쓰여졌다는걸 알수있다.
  • 손가락아파서 추천이 29개? 2010/04/28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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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복현 손가락근육 .. 근육힘이 29로구나
    혼자 추천클릭 29번씩이나 하니 힘들지?
  • 문헌고증과 고고학 2010/04/3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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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종으로 개명한 법흥왕이름은 본래 모진맞다(선비모용씨다)
    법흥왕 때까지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김)으로 기록한 사례는 없다.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적고 있기는 법흥왕을 뒤이은 진흥왕 때부터이다. 《남사(南史)》.《통지(通志)》.《태평어람(太平御覽)》 등에서는 모두 성이 '모(慕)'요 이름은 '진(秦)'이라 썼고, 《통고(通考)》에서는 《양사(梁史)》를 인용하였기 때문에 역시 똑 같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권 법흥왕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법흥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원종이다. 『책부원구란 옛 책에는 성은 募(모), 이름은 泰(태)라 했는데, 태는 삼국유사 王曆(왕력)에는 秦(진)이라 돼 있다』 지증왕의 원자로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요,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法興王立, 諱原宗『冊府元龜, 姓募名泰, 泰, 遺事王曆作秦』,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 保刀夫人)>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천마총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밖에서 보면 높이 12.7m의 거대한 원형 봉분이고 내부는 나무 관 위로 돌을 쌓아 만든 전형적인 북방 유목민들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

    경주 황남동 고분군 일대를 정비, 정화하여 대릉원(大陵苑)이라 이름 지은 고분공원 안 서북쪽에 위치한 고분으로 원래 경주155호 분이라고 불려왔던 밑지름 47m, 높이 12.7m의 원형분(圓形墳)이다. 1973년에 발굴되었는데 무덤 내부에서 금관, 금제과대, 요패(腰佩), 팔지, 반지, 목걸이, 환두대도(換頭大刀), 금제조익형관식(金製鳥翼形冠飾)과 금제접형관식(金製蝶形冠飾), 금동모(金銅帽), 금동제경갑(金銅製脛甲) 등의 유물과 이외에도 많은 칠기와 그릇 등이 발견되었다.

    4세기 이후 등장한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시베리아 샤먼문화의 원형인 신라금관이 증명하듯이 인류학자들이 세계 샤먼문화의 시원지라고 규정하고 있는 동북아 시베리아 지역의 북방 유목민족인 선비족이다. 김해.일본열도지역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신라권력에서 소외당하고 추방당한 선비세력이다.

    선비족은 북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많은 흉노인들을 흡수하여 흉노계 선비족으로 형성되었다. 물론, 한족화된 김일제 흉노세력은 선비족이 신라에 유입되기 전 후한의 멸족을 피하여 산동지역에서 해로를 통하여 한반도 동남부 지역으로 들어와 김일제 남동생 후손 김수로는 가야를 개국하고, 김일제 후손 김알지세력은 신라세력를 형성하고 있있다. 고구려군에 쫓긴 선비족이 신라땅으로 들어와 등에 업은 세력이 김알지 세력이고 법흥왕때부터 김씨 성으로 바꾸고 김알지 후손행세를 한 셈이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조상의 성씨를 김씨로 바꾸고 김씨 행세를 하고 있는 모씨 후손들은 명확히 알도록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어야 한다.

    신라 김씨왕조는 김알지세력을 등에 업고 석씨 왕조를 몰아내고 신라권력을 장악한 선비족 모씨(모용씨)다. 신라 김씨왕조의 조상은 모씨 성을 가진 선비족인 것이다. 그 결정적 근거자료들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김씨로 성을 바꾼 법흥왕이전의 신라 왕들은 선비족 모용씨였다!


    [문헌자료]신라 김씨왕이 선비족 모용씨였다는 결정적 문헌은 있을 수 없다. 金씨왕들은 기존의 신라인들과 힘을 합쳐 새 나라를 건설하는 입장이었던 만큼 「우리는 대대로 신라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는 기록을 남기는 게 정상이지 「원래는 모용 선비였는데 석씨 임금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남길 리 만무하다.

    하지만 金씨왕의 기원이 모용선비임을 알게 해주는 약간의 단서는 있다. <사진8-신라 지배층의 얼굴> 신라 법흥왕에게는 두 개의 姓(성)과 이름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권 법흥왕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법흥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원종이다. 『책부원구란 옛 책에는 성은 募(모), 이름은 泰(태)라 했는데, 태는 삼국유사 王曆(왕력)에는 秦(진)이라 돼 있다』 지증왕의 원자로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요,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法興王立, 諱原宗『冊府元龜, 姓募名泰, 泰, 遺事王曆作秦』,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 保刀夫人)>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그 뒤 이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募(모)」 이름을 「泰(태)」로 기록하고 있다. 秦과 泰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국역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다.

    1988년 경북 울진군 봉평리에서 발견된 「봉평 신라비」는 법흥왕 즉위 11년, 서기 524년에 세운 비석이다. 여기서는 법흥왕을 「牟卽智(모즉지)」로 적고 있으니 牟는 성이요 卽은 이름 智는 존칭이다. <사진9-봉평신라비>

    봉평 신라비에는 모두 35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임금 모즉지를 비롯해 葛文王(갈문왕:신라 왕족) 牟心智(모심지), 비문을 적은 牟珍斯利公(모진사리공), 비문을 조각한 牟利智(모리지) 등 4명의 이름이 「牟」로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牟」를 姓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姓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했다면 이렇게 여러 사람이 같은 글자로 시작할 리 없다.

    봉평 신라비의 법흥왕 성명 「牟卽(모즉)」은 중국 역사서의 慕秦≒募秦(모진)과 비교할 때 글자 모양은 다르지만 발음은 「모(MO)」로 동일하다. 삼국시대의 경우 인명이나 지명을 표기할 때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한자가 넘나들면서 쓰이는 경우가 흔하다.

    한 예로 가야를 加耶, 伽倻 또는 加羅(가라), 駕洛(가락)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 역사서의 慕秦과 봉평 신라비의 牟卽 또한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중국 역사서와 봉평 신라비가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봉평 신라비를 세운 524년까지는 법흥왕이 「미스터 김(Mr. KIM)」이 아니라 「미스터 모(Mr. MO)」였다는 사실이다.

    또 법흥왕은 지증왕의 큰아들로서 신라 金씨 왕조의 뚜렷한 자손이니, 결국 법흥왕 이전까지의 신라 金씨 왕들의 姓이 상식과는 달리 「모(MO)」였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법흥왕 때까지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김)으로 기록한 사례는 없다.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적고 있기는 법흥왕을 뒤이은 진흥왕 때부터이다.




    《만주원류고》 권4, 부족4에는 신라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양서(梁書)》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 ......그 나라(신라)는 백제의 동남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에 가까이 있고 남과 북은 고구려와 백제와 접해 있다. 위(魏)나라 때에는 신로(新盧)라고 하고, 송(宋)나라 때는 신라(新羅) 혹은 사로(斯盧)라고 하였는데 나라가 작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외국에 사신을 통하지 못하다가 보통(普通) 2년(521)에 이름이 "모진(募秦)"이라는 왕이 처음으로 백제의 사신을 따라가서 방물을 바치도록 하였다."(졸저, 《만주원류고》, 152쪽 참조)

    이 책의 편자들은 여기의 모진(慕秦)에 관하여 안어의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생각건대, 《남사(南史)》.《통지(通志)》.《태평어람(太平御覽)》 등에서는 모두 성이 '모(慕)'요 이름은 '진(秦)'이라 썼고, 《통고(通考)》에서는 《양사(梁史)》를 인용하였기 때문에 역시 똑 같다. 또한 성씨가 바뀐 이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의 이름은 "원종(原宗)이요, 지증왕의 원자(元子)"라고 하였다. 그리고 원종에 대해 주석하기를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성이 모(慕)요, 이름이 태(泰)라 한다"라고 하였다.(《삼국사기》, 권제4)

    진흥왕이 在位(재위) 25년(서기 564년) 北齊(북제)에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 역사서 北齊書(북제서)는 신라왕의 성명을 「金眞興(김진흥)」으로 적고 있다. 중국 史書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씨로 기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또 隨書(수서)에서 「수나라 문제 14년(서기 594년, 신라 진평왕 16년) 신라왕 金眞平(김진평)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는 등 564년 이후에는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분명히 적고 있다.
  • 반민족사대매족신라 2010/05/04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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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왕조는 흉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신라왕조는 흉노(훈족)와 무관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흉노를 들먹이는 것은 신라사관론자들의 열등의식을 반영하는 것이고, 문제는 유라시아 초원을 지배한 스키타이.흉노를 아무리 뛰워도 자신들 스스로는 한반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외세에 밀붙어 국민학살을 통해서라도 한반도남부의 주인으로 군림하겠다는 야비하고 비굴한 노예근성이 문제라는 것이다.그것이 경주지역으로 유입된 소수의 선비족들의 독점.비굴.사대유전인자들의 계승이라는 것이다.역사와 하늘은 반드시 자업자득 사필귀정 인과응보 원리에 따라 심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근데 2010/05/1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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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동복이라는 것은 부여의 것이라고 밝혀졌읍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의 것이 김해에서 발견되었죠..이것은 만주에서 부터 한반도 전역에 이르기 까지 동질한 문화권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고구려가 초기에 흉노와 연합해서 한을 공격한 것을 보면 같은 부류였다고 보입니다. 또한 선비는 흉노의 한 갈래이니 당연히 같은 족속이죠. 같은 족속이라도 원수가 지면 사이가 나빠집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부여에서 나왔지만, 철천지 원수였죠. 문제는 선비고 흉노고 간에 신라 때의 비굴한 사대주의 근성이 아직까지 이어온다는 것이죠. 이런 자들은 고구려,백제에도 적지 않았죠
  • 감사 감사 2010/06/0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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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체적인 증거자료제시까지 좋은 역사기사자료입니다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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