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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족(남방계'하'족)의 기원과 역사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 서서히 북상하여 중원까지 이동한 한족의 실체

문화부 | 기사입력 2008/04/07 [23:30]

중국 한족(남방계'하'족)의 기원과 역사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 서서히 북상하여 중원까지 이동한 한족의 실체

문화부 | 입력 : 2008/04/07 [23:30]
기원전 4000년, 하서주랑과 황토고원북부에 하족이 살고 있었고 진남관 중 일대에는 화족이 살고 있었다. 당시 회하이남과 한강(漢水-호북성에 있는 장강의 지류)류역에 치우라는 선인(先人)이 살고 있었다. 하족의 황제(중국의 조상.동이족 황제헌원이 하족의 우두머리가 되다)가 동쪽으로 진군하며, 화족의 염제신농(동이족으로 중국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다)를 전승한후 연맹을 달성하게 된다. 화와 하 이 두족이 점차 융합하여 화하족을 이룬다.  그리고 이후 화하족과 기타민족이 동화, 융합되여 한나라때에 이르면서 "한족"이라 불렀다. 따라서 화.하족 중 동이족에 속하는 염제신농의 화족이 북방 알타이어 민족이라고 볼 때 현재 중국어가 된 남방계 언어를 사용한 하족이 고대 동이족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한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인종학상 [몽골로이드]라는 동일 민족이나, 언어.문화적으로는 고대 동이족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민족이 바로 [하족]이다.

 
현재 중국은 13억으로 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민족이기도 하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청나라가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유럽에서 공부를 하고 민주주의 의식을 가진 진녹수.손문.모택동 등이 중심이 되어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국가를 만들자는 신문화의 기치아래 결국 기득권세력을 대변한 장개석의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중국 인민대중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은 모택동의 공산화를 통하여 이룩한 국가다. 따라서 중국의 동북공정이란 사회주의를 떠나 당연한 귀결이며, 자신이 혈통적으로 한족이라는 생각을 가진 정치인들이라면 일본의 극우세력처럼 정부시책에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협력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민족에 대한 백과사전을 찾아보면[고대 화하족(華夏族)과 기타 민족이 장기간에 걸쳐 점차 융합되어 이루어진 종족으로, 최초의 선조는 전설 속에 나오는 황제(黃帝)이다. 중국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황허 강[黃河], 양쯔 강[揚子江], 주장 강[珠江] 유역과 쑹랴오[松遼] 평원에 주로 모여 살고 있다. 역사상 황허 강으로부터 양쯔·주장 강 유역으로 몇 차례 남하가 있었다. 쓰촨 성[四川省], 산둥 성[山東省], 장쑤 성[江蘇省], 광둥 성[廣東省], 허난 성[河南省], 허베이 성[河北省], 후베이 성[湖北省], 안후이 성[安徽省] 등에 주로 밀집해 있다. 인구는 9억 3,670만 3,824명(1982)으로 중국 총인구의 93.3%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그 수효가 가장 많은 민족이다. 언어는 시노티베트어족에 속하며, 여러 종의 방언을 가지고 있다.한족은 진(秦)·한(漢) 시기에 형성되었다(일설에는 명말청초 또는 1840년 이후에 형성되었다고 함)]라고 소개되어 있다.

인종학상 몽골로이드에 속하나 언어는 알타이어족이 아닌 남방계통의 한장어(티벳어 계통)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고대사에서 하남성 지역에 속하며, 황하강 중류의 앙소문화의 후예들을 전통적으로 화하족이라고 한다. 이들이 동일한 황인종들임에도 불구하고 북방 알타이어족들과 언어와는 다른 유럽언어구조와 동일한 남방계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들이 북방 유목민족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북상하여 중원 깊숙이 유입된 민족이라 볼 수 있다. 화하족은 본래 북방 동이족과 문화양식이 다르다. 예컨대 동이족이 온돌문화라면 화하족은 침대문화다.

채색토기가 특징인 앙소문화는, 감숙, 섬서, 하남성 서북지역을 포함하는 위수-황하 유역을 따라, 대략 기원전 5000년경에 출현하여 2,000여 년간 지속되었다.
이 앙소문화는, 서부 아시아로부터 중앙 아시아의 초원과 산맥을 가로질러, 하서주랑을 통과 해 중국대륙에 도달 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앙소문화 지역에서 사용되던 원시 한장어(漢藏語) 계통 언어가 마침내는 전 중국대륙의 모든 언어를 대체하게 끔 되었다. 만다린(普通話)은 비록 구조적으로 상당히 알타이어화가 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장어 계통 언어인 것이다.

▲ ▲ 중원지역은 본래 동이족들의 터전이다
따라서 중국문명을 구분하자면 하남성과 하북성을 포괄하는 황하문명권에 속하는 황하강 중류의 앙소문화는 인종상 몽골로이드에 속하나 언어학상으로는 북방의 알타이어족이 아닌 남방의 '하'족 문화가 꽃 피운 지역이고, 몽골로이드 인종에 알타이어족인 동이족과 가까운 지역인 황하문명은 요서지역의 홍산문명에서 기원했으니, 중국문명의 근원은 동이문명이고, 민족을 구분하자면 황하강 중류에 거주하며, 남방계통의 언어를 사용한 몽골로이드 인종을 중국의 한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동일한 몽골로이드 인종들이나, 이러한 한족과 동이족간의 역사와 문화의 우월감을 따지기 위해 한족은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동북공정이란 이름하에 역사왜곡을, 한국은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동북공정에 대해 정당한 싸움을 하고 있다 본다. 이에 중국정부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상호 협력과 교류로 아시아 번영을 위한 동반자적 관계로 나가야 한다고 본다.

얼마전 13억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漢族)이 실제 조사 결과 '유전학적으론 현존하지 않는 제3의 혈통'으로 나타났다. '한족은 혈통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라는 통설이 학술연구로 밝혀졌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 없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15일 보도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DNA 연구 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셰 교수는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질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다'고 생각돼 왔으나 이는 특정 시기의 한족을 주변의 다른 종족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지역적 구분일 뿐"이라면서 "이젠 한족을 그렇게 지역적으로 따져 정의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BC 11세기 현재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수도를 정한 서주(西周)는 한족 정권에 속하지만, 그 이후인 춘추전국시대에 같은 지역에 세워졌고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나라는 소수민족인 '서융(西戎:서쪽 오랑캐=한족들의 비하어)'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주로 현재의 산시(山西) 남부와 장쑤(江蘇)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서북부 등의 소수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으나,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은 또 자신들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주장하지만 연구 결과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도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치부해 왔던 '북적(北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다.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는 모두 현재의 간쑤성과 산시(陝西)성에 걸쳐 있는 황토 고원지역으로 이 두 곳 모두 한족의 본거지가 아닌 것은 물론 주요 거주지역도 아니라는 얘기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오히려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한 객가족(客家族)이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이들의 고어(古語), 풍속 및 습관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원인"이라고 강조했다. (고대 한족들은 북방 알타이어계 동이족들에 중국지배로 인해 남부로 밀려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 알타이어족이 아닌 영어구조의 언어를 사용하며 중국대륙으로 유입된 고대 소수의 한족에 대해 알아 본다.

중국을 영어로 표기하는 CHINA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에서 온다. 이 ‘진’ 도 따지고 보면 흉노계열의 서이족이다. 지나족이 중국으로 들어온 것은 불과 수천년 밖에 안된다.

 
▲  [지나족의 동남아와 중국남부 도착]중국 복단대학교 인류학센터
 
중국 복단대 인류학 연구센터 이휘박사는 지나족이 중국남부로 들어온 때가 지금으로부터 5천~6천년전이라 밝힌다. 지금 중국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지나족은 겨우 그때 중국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당시는 만주 서부(요녕)의 환웅홍산배달문명이 이미 찬란하게 꽃을 치우고 있을 때다.

그런데 대만대학의 서량지(徐亮之)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4천여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동이(東夷)족이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지나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하였다.

서량지 교수는 지나족 중국에 온 것이 4천여년 전이라 보고 있다. 중국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 『중국사(中國史)』에서 "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등 지방은 본래 묘족(동이족)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의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는 『중국사』에서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의 중류와 하류에 살았으며, 지나족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고 주장한다.

이렇게 중국과 소련의 학자들이 지나족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불과 4천년전 정도이고 그 전의 중국대륙은 동이족(고대한민족)의 활동무대였다고 말하고 있다.

 
동이족(고대한민족)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던 [주나라] 때까지의 중국은 영토는 작았지만 수준이 있었고 공자도 항상 자신이 [고인(古人)]의 가르침을 배운다고 했다. [한나라] 이후의 중국은 쉽게 말해서 좀 뭐하게 말하자면 가짜 중국이다. 미개한 지나족이 대거 유입되면서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진짜 중국의 전통]이 많이 무너져버렸다. 고대 중국의 전통은 현 중국인들보다 오히려 현 한국인들과 가깝다.

혈통도 그렇고 정신문화도 그렇다. [논어]에 보면 [공자]는 [이상적인 인간] 즉 군자(君子)가 되어야 한다고 늘 설파하면서 구이(九夷 =동이(東夷):고대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 한다.

고대한국과 고대중국은 한 뿌리였는데 즉 고대중국사는 범 고대 한국사였는데 대강 [한나라] 이후의 중국은 이러한 전통이 많이 무너졌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도 : 베이징 (북경, 北京)

인구 및 면적 : 1,284,303,705명 (2002) / 9,600,000 ㎢

언어 : 중국어

환율 : 1 = 139.27원(2008.04.07 매매기준)

통화 : 인민폐 (RMB) / 원 (元), 각 (角=毛), 분 (分) (1元=10角=100分)

[양소문화]

1921년에 허난 성[河南省] 몐츠 현[澠 池縣] 양사오에서 발견되었다. 산시 성[陝西省] 웨이허 강[渭河] 유역, 산시 성[山西省] 서남부와 허난 성 서부의 협장(狹長) 지대에 주로 분포한다. 서쪽으로는 간쑤 성[甘肅省]과 칭하이 성[靑海省]의 접경지역까지 이르고, 동쪽은 징한 철도[京漢鐵道]의 연선(沿線)까지 미치며, 북쪽으로는 내몽골의 허타오[河套] 지구까지, 남쪽은 한수이 강[漢水]의 중류까지 이른다. 동서로 약 1,000㎞에 달하며, 남북으로도 거의 1,000㎞에 이른다. 탄소동위원소법 측정에 의한 연대는 대략 BC5000~3000년으로 밝혀졌다. 삽·도끼·자귀·끌·칼·화살촉·물레와 같은 비교적 발달한 간석기가 있으며, 뗀석기로는 돌칼과 반상기(盤狀器)·맷돌·숫돌 등이 있다. 농업이 비교적 발달하여 조와 기장을 재배했고, 주로 돼지를 사육했으며 수렵·어로·채집에 종사했다. 토기는 대개 이조반축법(泥條盤築法)을 써서 만들었으며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었다. 취사용구 및 시설로는 솥·시루·부뚜막·항아리 등이 있고 물그릇으로는 입이 작고 바닥이 뾰족한 것, 입이 작고 바닥이 편평한 것, 표주박 모양의 병, 마늘 모양의 주전자 등이 있다. 식기로는 주발·사발·잔 등이 있고 저장용기로는 접시·항아리·단지·독 등이 있다. 양사오 문화는 무늬가 그려진 채도(彩陶)가 특징이며, 따라서 채도문화라고도 부른다. 촌락의 유적지 중에서 린퉁[臨潼] 창자이[姜寨]의 촌락에 100여 채가량이 있는데, 5개 조가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고 있다. 사방에는 도랑이 둘러쳐 있어서 당시의 비교적 엄밀했던 씨족공동체제도를 반영하고 있다. 양사오 문화 초기에는 집단 합장과 동성(同性) 합장이 성행했고 몇 백 명이 함께 매장되었으며, 머리는 서쪽을 향하게 해서 질서 있게 안치했다. 각 묘지의 규모와 수장품은 차이가 별로 없었으나, 여자의 수장품이 남자보다 약간 많았다. 이는 당시가 모계사회였음을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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