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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사랑으로 낳은 삼족오

때론 가슴이 찢어지는 눈물이 흐를지라도 이별이란 그 사람을 죽도록..

윤복현 기자 | 기사입력 2008/04/02 [18:27]

천년사랑으로 낳은 삼족오

때론 가슴이 찢어지는 눈물이 흐를지라도 이별이란 그 사람을 죽도록..

윤복현 기자 | 입력 : 2008/04/02 [18:27]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끝이 없는

무한한 생명수를 부여 주는 두 사람의 사랑으로
굳건한 반석위에 고구려의 기초가 되는 골본성을 쌓다...
무한한 샘줄기로 생명수를 부여주는 사랑을 하여라..
기초가 튼튼한 반석위에 사랑과 국가의 토대를 세워라..
기반이 약하면 공들여 천년을 쌓는다해도
순간에 무너지는 모래성에 불과하리니....

만주지역 골본(忽本)에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 6대 단군 고무서의 외동딸 “소서노(召西奴)”라는 공주가 살고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번조선 일대와 북부여의 서쪽변방을 한나라가 자꾸 침략을 하자,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여 북부여 5대 단군에 오르니 바로 동명성왕이라는 고두막한(칸.간.안)이다.

그러나, 소서노(召西奴)는 우태(동부여를 세운 해모수의 후손 해부루의 서손庶孫)와 결혼하여 나중에 고추모의 아들 유리 때문에 왕위를 빼앗기게 되는 비류(沸流)라는 아들을 두었다. 온조와 비류의 출생설에 대한 문헌기록들의 내용은 상이한데, 중국문헌의 경우 비류의 아버지로 볼 수 있는 ‘구태=우태’라는 이름을 내세운 백제를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고추모의 아들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중국문헌의 내용은 온조와 잠시 결별했던 비류백제를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온조는 소서노가 재혼한 고추모와 낳은 아들로 추정, 만약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태와 소서노로 동일하다면 초기에 온조와 비류가 각기 결별하여 중국대륙과 한반도에 나라를 건국할 수 없으며, 온조 또한 비류와 함께 고구려에 저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추모의 아들 온조는 고추모에게 양보한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한반도 중부로 이주하여 온조백제를 건국했다고 보아야 한다. 소서노가 남편 구태(우태=부여.고구리의 관직명=비류가 구태의 아들이였기 때문에 중국문헌은 구태백제로 기술하고 있다)가 일찍 세상을 하직하여 청상과부로 살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그녀앞에 동부여의 왕자들의 추격으로부터 도피해 온 고추모라는 젊은 청년이 불쑥 나타났다. 고추모 또한 집안출신이 장난이 아니다. 즉, 고추모는 ‘하백’이 의미하듯이 몽골과 만주를 잇는 비류수 줄기를 따라 교역를 하는 무역상의 딸인 어머니 유화와 북부여을 건국한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의 손자인 불리진의 아들로 해모수의 손자였던 것이다. 고추모가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출생배경은 북부여를 건국한 단군조선의 제후국 ‘고리국(고구려의 기원)’의 종실이였던 해모수 손자 고모수(혹은 불리지)가 어느 날 지역을 순행하다가 고운 유화을 발견하고 몇 일간 머무르면서 두 사람은 결국 정분을 나누게 되고 고모수는 기약도 없이 떠나게 된다. 씨만 뿌리고 바람처럼 사라졌다고나 할까? 그러나 고모수의 씨뿌림이 한민족사에 있어 운명을 바꾸는 일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고모수 집안으로 보면 해모수의 손자에 해당하는 고추모는 서자에 불과한 몸이다.

그러나 서자들은 어머니와 함께 언제나 강인했고 꿈을 실현한다. 환국을 떠나 멀리 동쪽으로 이동하여 신시배달국을 건국한 한웅도 환인의 서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 아무튼 가족.친척 등 대부분 같은 혈통들이 마을을 이루던 당시 씨족사회에서 성문란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였다. 분노한 유화의 아버지는 임신한 아이의 애비를 묻게 되고 유화는 고모수 왕이라고 말한다. 고추모의 외할아버지는 고모수에게 사람을 보내 딸을 데려 가라고 한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서 끊임없이 흘러야 한다구...

만약 약속한 날짜에 딸을 데려가지 않으면 가문에 먹칠을 한 근본을 모르는 딸 유화를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사랑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결국, 고모수는 유화를 데리고 간다. 그러나, 고모수가 죽은 후 유화가 주몽을 데리고 아마 친정으로 여겨지는 서란[=만주 길림성 영길현 서북 나목강 지류인 잡분강가 추정] 으로 다시 돌아 왔다는 것으로 보아 유화는 고모수의 본부인이 아니고 후첩정도로 보인다. 본 부인이라면 서란으로 돌아와서 살 리가 없다. 본 부인과의 트러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모수의 집을 떠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모는 외가집에서 성장하여 청소년기 되자, 아들의 장래를 걱정해야 하는 어머니 유화로서는 아버지 고모수와 혈족이기도 하는 동부여를 택한 것 같다. 외할아버지는 싸준  재물을 가지고 말이다. 동부여에 도착한 유화는 미모가 출중하고 재산까지 많다보니 동부여의 금와왕은 후첩으로 삼아 동부여 왕궁에서 살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뒤에는 동부여 황후와 대소 등의 태자들의 음해와 살인이 도사리고 있었다.
 
고추모에게는 동부여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처럼 떠나야만 했던 땅이 된다. 고추모는 할아버지 해모수의 피를 타고났기 때문에 인물이 출중하고 용맹스럽고 능력이 출중하니 금방 사람들이 알아 보고 고두막한 세력으로 부터 북부여를 빼앗긴 동부여로서는 강한 왕이 필요했기에 해모수의 손자이기도 한 고추모가 알게 모르게 금와왕은 물론이고 동부여 백성들의 환영과 지지를 받고 있었다. 지혜로운 유화부인은 아들이 금와왕의 태자들에게 일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일찍감치 태자들에게 추모는 태자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아들 고추모를 보호하기위해 금와왕에게 부탁을 하여 관가 말지기로 일하게 했다. 말지기하면서 함께 일했던 오이.마리.협보 등과도 평생 동지들이 되었고, 예씨 부인과도 눈이 맞아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갈수록 고추모의 인기는 급상승하게 되고 그와 더불어 동부여 태자들의 시기질투는 날이 갈수록 높아 갈 수 밖에 없었다. 죽이지 않고서는 하루라도 마음편할 날이 없는 존재가 바로 고추모였던 것이다.  

▲ '주몽'에서 예씨 부인역으로 출연했던 송지효씨 
고추모도 유화도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어머니 유화는 참으로 지혜로운 여성이였다. [삼국사기]기록에는 아들을 태우고 먼 길을 떠나는데 필요한 우량한 말을 평소에 미리 골라 의도적으로 혀에 바늘을 찔러 허약하게 만든 후에 그 말을 타고 가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머니 유화와 예씨 부인과의 기약없는 만남을 뒤로 하고 사내 대장부가 민족를 위해 말을 달리게 된다.
 
고추모를 죽여야만 안심이 되는 동부여 태자들도 마치 출애급한 이스라엘 민족을 뒤쫓듯이 추격한다. 엄리대수가 눈에 보인다. 엄리대수만 건너면 된다. 홍해가 보인다. 홍해만 건너면 된다. 뒤에는 엄청난 이집트 군대와 동부여 군대가 추격해 온다. 이를 어이할 것인가? 오로지 하늘에 의지해야 한다. 하느님 저희를 정녕 버리실 겁니까? 저희가 하느님을 위해 필요하다면 알아서 해 주십시요. 저희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하느님의 아들 천자가 아닙니까?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한 기도만이 하늘에 닿는다고 했던가! 그때서야 홍해가 크게 갈라진다. 그 때서야 물고기와 거북이가 건너갈 수 있는 길을 만든다. 하느님은 그 사람의 진심을 보기 때문이다.
 
고추모 세력이 엄리대수를 건너는 설화는 1천여년 이상이 넘은 시기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넜다는 설화가 너무 비슷하지 않는가! 그것은 부여와 고구려가 하느님을 섬기는 단군족의 직계후손이기 때문이다. 단군족은 그러한 설화를 조상대대로부터 전해 들으며 알타이에서 만주까지 청동문명을 가지고 들어온 북방 유목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타이와 팔레스틴 북부지역과는 그리 멀지 않는 거리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 팔레스틴까지 역사지평이 넓혀지는 일이다. 아무튼 무사히 건넌 홍해는 닫혔고 물고기와 거북이도 물 속으로 들어가고 없다. 강속으로 들어온 이집트와 동부여 군대는 수몰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리를 건국한 고추모와 어머니 유화(해모수의 손자 고모수가 아버지)
고추모의 출생설과 관련하여  또 한가지 이야기는 유화와 고추모 모자의 시련을 주게 된 장본인 고모수의 순간의 불장난으로 보아 고추모의 어머니 유화라는 여성은 상당히 미모가 출중하고 정숙하면서도 북방 유목민답게 활달한 전형적인 북방계 여성이 아니였나 싶다. 미모에 똑똑 쏘는 면도 있으면서 예의를 아는 정숙함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 어떤 남자도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유화 또한 해모수의 손자 고모수의 남자다움에 푹 빠져 몇 일 몇 달 동안 비류강가에서 사랑을 나눈 결실이 고추모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추모의 출생과 관련하여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도 마찬가지다.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이름이 ‘파소’로 동부여 해부루의 딸이다. 즉 동부여의 공주다. 이 공주가 남자와 정분을 나누어 임신을 한 모양이다. 당시에야 피임문화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을 나누다 보면 임신은 직방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기에..결혼하지 않는 딸이 임신을 했다는 것은 동부여 왕실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북부여 지역을 떠나야 하는 유화처럼 파소공주도 동부여를 떠나야 만 한다. 아버지 해부루도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재물과 함께 사람들을 딸려 멀리 남부지역으로 떠나 보낸다. 그래서 동해안을 타고 도착한 지역이 경상도 지역이다. 박혁거세가 태어나고 부여왕실의 후손인지라 경상도의 진한 사람들은 왕으로 세우게 되는 것이다. 고추모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고리국의 왕실출신 해모수의 손자이고, 박혁거세는 단군조선 47대 고열가 후손이며 소서노의 할아버지 고두막한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쫓겨나 동부여를 건국한 해부루의 손자이니 고추모와 박혁거세는 해모수의 손자들로 혈통이 같다 할 것이다.

▲ 고추모가 고구리 건국의 터를 잡았다는 골본성 - 바위로 둘러쳐진 산꼭대기 철옹성이다.광개토태왕비에 고추모가 '골본'에 터를 잡았다고 했는데, 한자는 소리를 빌리는 데 비중이 많음으로 단군조선 제후국인 고리(골)국에서 고구려가 출발했으니, 중국식 발음인 홀본이 아니라, 우리발음 '골본'이 맞다. 즉, "고리국이 고구려의 근본"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강성한 고구려에 대해 엄청나게 참패하고 열등감을 가진 중국인들이 졸장부 '졸'로 바꾸어서 [졸본]으로 이름붙이고, 사진속의 골본성도 있지고 않는 전설을 만들어 [오녀산성]으로 이름을 바꾸어 역사지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고추모의 수도 [골본성]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중국측 문헌에 [골본성아래 비류수가 흐른다]고 했으니, 지금의 만주 길림성 집안지역이다.  이후 강성해진 고구려는 강성해짐에 따라 수도성을 유리왕 때 환도성으로, 동천왕때 하북성 난하 왕검성으로 고국원왕때는 티벳 접경지역인 서경(서안)으로, 장수왕 때 다시 하북성 난하 왕검성으로  이전한다. 이러한 내용은 고대 중국문헌들이 지명상 상세히 증언하고 있는 내용으로 그  동안 일제 식민사관에 주입세뇌되어 온 역사교육의 문제점이다.

이러한 고추모가 겉보기에는 미혼인 총각같았으나, 고추모는 동부여를 떠나기 전 이미 부하의 여동생이라고도하며, 혹은 동부역 지역족장의 딸이라고도 전하는 예씨부인(禮氏)과 혼인하여 유리(琉璃)라는 아들까지 두고 있었는데, 소서노는 까마득하게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 아마도 예씨는 고추모의 충직한 부하의  여동생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비류와 유리와의 왕권 쟁탈전에 미리 고구려 권력을 장악한 고추모 세력들이 유리를 후계자로 강하게 주장할 수 밖에 없었으며, 여기에서 밀려난 비류가 강하게 반발하고 만주대륙을 방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주 길림성 집안현 골본성에서 바라본 안개 낀 비류수-

추모는 졸본성에서 비류수를 보며 민족의 미래를 생각한다


아무튼 고추모은 겨우 충직한 신하 세 명과 몇 안 되는 부하들을 이끌고, 동부여(東夫餘)에서 이웃 나라로 도망쳐 온 주제에 되려 북부여의 천제이신 해모수의 3세손 “고모수”와 만주의 군장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나신 귀하신 몸이라고 큰 소리를 치며, 백발백중 만주 벌판 최고의 궁사로 이름을 날려 ‘주몽’이라는 닉네임까지 붙게 되니, 대부분 여성들의 마음이 마찬가지이듯이 고추모의 남자다움과 당당함에 지금까지 수 많은 날들을 외로움으로달래오던 소서노도 그만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요즘 말로 꽃미남에 연하라면 놓치고 싶지 않는 남자가 아니였겠는가! 평생을 혼자 살 수 있는 여성들도 놓치도 싶지 않는 꽃벌이 날아오면 꿀을 주고 그 꽃벌만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고 해만 바라보듯이 자신에게 입을 맞추며 자신의 꿀을 먹어 주는 그 꽃벌만 그리워하는 해바라기이고 싶기 때문이다.
 
뿌리가 깊지 않는 나무가 어찌 많은 열매을 맺을 수 있으며, 깊지 않는 샘이 어찌 생명수를 부어줄 수 있으리. 근원을 찾아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하고, 깊은 내면의 샘물을 마셔야 한다 

▲ 소서노와 고추모(mbc주몽 장면) - mbc주몽은 역사적으로 많이 왜곡되어 제작되었다
또한 혈통이 달라도 고열가 단군을 마지막으로 단군조선을 계승한 해모수의 부여를 계승하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의 만남은 노사연의 노래처럼 우연히 아니였던 것이다. 즉, 진조선 47대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던 고두막한의 손녀인 소서노(召西奴)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왕의 종실인 해모수의 손자 고추모는 나라 이름을 고씨의 나라라는 의미의 ‘고구리’라고 정한 것인데, 쥐나인들이 한자로 문헌에 기록하다보니 고구려(高句麗)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굳이 집안을 따지자면 소서노 집안이 정통 진조선 단군의 계보를 잇는 집안이고, 고추모 집안은 진조선의 제후국 고리국 왕실을 잇는 집안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너져가는 진조선을 ‘부여’라는 국명으로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 바로 고추모의 할아버지 해모수이고, 그러한 부여를 한나라로의 침략으로부터 다시 지켜낸 사람이 바로 정통 진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직계 후손인 5대 부여단군 고두막한이였으니, 고추모와 소서노의 집안은 단군조선의 명백을 지켜낸 혈통 중의 혈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해모수(단군조선 제후국 고리국의 왕실출신)/고두막한(단군조선 47대 단군 고열가 후손) - 해모수와 고막한은 상호 혈통이 다르다. 소서노 할아버지 고두막한은 단군조선 47대 고열가 후손이고, 해모수는 단군조선 제후국 고리국 왕실후손이다. 그러나 민족을 지켜내면서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고추모는 6대 부여 단군인 고무서로부터 단군직을 물러 받으니 부여 7대 고추모 단군이 되는 것이다. 왕위를 계승한 고추모는 지배층인 부여족의 민심을 위해서도 고추모 왕조의 정통성을 5대 부여 단군인 동명성왕 고두막한에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은 고추모 왕조의 뿌리는 고리국이다. 그래서 국명을 ‘고리’라고 변경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서노 집안의 국명이 부여인데, 이 부여라는 국명 또한 초대 단군왕검의 네 번째 아드님이 부여이고 부여국의 제후가 된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진조선 47대 구물단군때 ‘부여’라는 국명으로 바꾼다. 즉, 구물단군의 집안은 단군왕검의 4번째 아들인 부여의 후손들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서노 집안이 정통 단군혈족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고추모 집안과 관련된 고구려의 어원은 ‘고리.구리’인데, 그 어원의 유래는 ‘고리국’이 제후국으로 존재했던 단군조선시대까지 올라간다. 즉, ‘고리(구리)’는 우리 동이족이 본래 골짜기에서 살면서 농사를 짓고 땅 속의 쇠를 찾아 사용하면서 골짜기를 의미하는 ‘골=고리’과 ‘구리’가 되었으며,이 고리(구리)는 동이족의 전통적인 나라명이기도 했으며, 단군조선시대 이미 ‘난하’지역에 위치한 제후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구려 900년 역사라는 이유가 바로 BCE 232년 진조선의 마지막 왕 고열가의 후손인 해모수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를 건국한 시기를 고구려 출발로 보기 때문이며, 고추모의 건국시기인 BC58년으로 잡아도 700년이 넘는다. 이후 일대의 부족들을 융합,정복하면서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서노(召西奴)는 토착 세력의 분열을 잠재우고 추모에게 힘을 집결시켜 결국 왕으로 세우는 킹 메이커(king maker)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전 남편(우태)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 비류(沸流)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런데, 주몽과 소서노와의 행복한 결혼를 오래 지속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게 다 민족을 위한 하늘의 계획이였다는 말인가?

추모는 소서노에게 어쩌면 자신의 과거사를 숨겼는지도 모른다. 마음의 준비을 하지 못한 소서노와 비류.온조에게 닥친 시련과 운명은 가혹했다. 즉,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나올 무렵, 동부여의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유리(琉璃)”라는 아이가 성장하여 징표로써 부러진 칼을 들고 부여의 7대 단군이 된 아버지 주몽을 찾아 왔다. 그리고, 주몽은 바로 그 유리(琉璃)에게 태자의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고추모는 고구리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입국(立國)과 성장을 도운 소서노(召西奴)를 왕비로 삼았지만, 정통성이 있는 소서노(召西奴)의 큰 아들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전에 홀본(忽本)에 있을 때 예씨(禮氏)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은 것이다. 그 때의 상황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동명왕 19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 이 때 왕의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때론 가슴이 찢어지는 눈물이 흐를지라도 이별이란 그 사람을 죽도록 사랑하는 이유가 되리라..

그러나 실제 고추모와 소서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서 생각해 본다면, 추모의 출중함에 시기질투한 이복 형들을 피하여 아내와 헤어져 고생하며 살아온 지가 고추모로서는 얼마나 오래 세월이었던가. 그리고 얼마나 예씨 부인과 아들이 보고 싶었겠는가.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금방 찾을 수 있는 인터넷 통신시대도 아닌 때에 서로가 생사를 모르며 고생한 아내와 아들이 찾아오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추모는 속으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해 줄 있는 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거다. 나 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서노와 친자식같은 비류와 그리고 친아들 온조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하자. 그런데, 후계자 문제가 걸리는구나..” 이런 고추모의 마음과 고민을 모를 리 없는 소서노의 결단과 선택은 무엇이겠는가. 문헌에 고추모에 대한 내조를 잘 했다는 것으로 보아 소서노가 고추모를 몹시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왕의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본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거야...왕위와 나라까지도..모든 것을 주어서 그 사람이 행복하다면이야 내가 양보하면 되는 거 아닌가.” 소서노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조카 롯처럼 한쪽이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가고 한쪽이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가는 양보와 이해심으로 살갑게 지낸것 처럼 고추모와 고구리를 생각해서 두 아들을 설득해서 고구리를 빠져 나오는 것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소서노라는 여성은 참으로 마음이 크고 배짱이 있는 여장부에, 인내심이 강한 전형적인 우리 한국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 백제의 분국인 일본까지 건국하는 한민족 건국의 어머니가 될 만큼 하늘의 축복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여성들이라면 크게 멀리 보지 못하고 일단 순간의 욕심에 사랑하는 남자와 자식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가는 선택을 했을지 모를 일이다. 일반 사람이라면 순간에 눈이 어두워 배신을 하고 결국 자기 무덤을 파고 마는데 비해 소서노나 고추모의 경우 참으로 한국의 남성들과 여성들이 본 받아야 할 남자다운 남성, 여자다운 여성으로 한국의 우리 민족성의 상징이라 하겠다.

소서노는 고추모에게 양해를 구하고 필요한 인원을 데리고 고추모의 행복과 고구리의 발전을 빌면서 이별의 아픔을 뒤로 한 체 두 아들과 함께 고구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리로부터 멀리 떠나려던 소서노의 생각은 빚나가고 있었다. 즉, 소서노의 전 남편인 구태의 아들인 비류(沸流)은 왕위는 집안내력으로 보나 부여왕조의 정통성으로 보나 당연히 자신이어야 하는데, 어찌 고추모가 그럴수가 있냐면서 부여(고구리)에 대한 왕권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고구리의 왕권을 찬탈하겠다며 남쪽으로 내려간 소서노와 온조와 이별을 고하고 대륙의 비류백제로 남아 짐시나마 원한을 전쟁으로 해소하였으리라. 비류는 추종세력과 함께 주변 부여세력을 규합하여 부여(고구려)를 위협하게 된다. 부여는 비류백제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밀리게 되고 결국 당시 중국을 지배했던 흉노족과 겨루던 선비족이 세운 나라 전연과 충돌하면서 전쟁이 붙게 되는데, 이 때 패한 비류백제의 일부가 고구려로 유입되게 되고, 패한 구태(비류)백제세력들은 남하하여 온조백제와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온조백조는 한반도의 마한 땅으로 들어온 마한단군에 해당하는 진왕의 양해를 얻어 한강주변의 땅을 분할받아 차근차근 국가의 기틀을 마련해 가게 된다.

다시 정리하면 고주몽이 죽은 바로 그 해 B.C 19년에 비류는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랐다. 이때 비류(沸流)는 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자신을 백제(伯帝)라 칭하였고, 중국문헌은 북부여 제4대 고우루 단군의 동생으로 동명성왕 5대 단군 고두막한의 배려로 가섭원 땅으로 옮겨가 동부여를 개창한 해부루의 서손(서자의 아들. 또는 적자의 소실이 낳은 아들)인 구태의 아들이기 때문에 구태백제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비류(沸流)는 유리(琉璃)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패하였다. 그 결과 고추모의 고구려 지역 대부분은 유리(琉璃)가 장악하였고, 비류(沸流)는 근거지인 패.대 지역만 장악하였다.

온조(溫祚)는 형인 비류(沸流)가 B.C 19년에 패.대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랐을 때, 아무도 비류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후환을 걱정하여 B.C 18년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한반도로 와서 한강(漢江) 북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온조국(溫祚國)으로, 수도 명칭을 위례성(尉禮城)이라 칭하였다. 고대 시대에 ‘온(百)’은 단순히 100이라는 뜻이 아니고 아주 많다는 뜻이고, 조(祚)는 천자(天子)의 자리를 뜻하므로, 온조(溫祚)는 온(百)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帝)이라는 뜻이다. 즉 온조(溫祚)는 백제(百帝)와도 같은 뜻이다. 그리고 위(尉)는 하늘에 있는 해 즉 천제(天帝)를 뜻하고, 례(禮)는 부여 무리를 뜻하므로, 위례성은 천제의 아들 무리가 살고 있는 성(城)이라는 뜻이다. 이를 보면 온조는 해님의 아들을 상징하는 글자로 "위(尉)"자를 사용하였다.

또한, 온조(溫祚)가 백제(百帝)라 칭하지 않고 온조(溫祚)라 칭한 것은 형 비류(沸流)가 칭한 백제(伯帝)와 같은 발음을 피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온조국(溫祚國)은 B.C 6년에 대동강변에 위치한 최씨 낙랑(樂浪)국이 보낸 5무리의 기마부대(五虎)에 의해 위례성이 점령당하였다. 위례성이 점령당하자, 온조(溫祚)는 온조국(溫祚國)의 유민들을 데리고,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다급한 처지에 빠진 온조(溫祚)는 한강 이남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홍성(洪城) 금마(金馬) 마한(馬韓)으로부터 마한(馬韓)의 동북 땅 1백 리를 할양 받아 금마산(金馬山:홍성 금마)에서 마한(馬韓)의 후국(侯國)인 십제국(十濟國)을 세웠다. 이 십제(十濟)는 10명이 한강을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 아니고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이 한강을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 그 뒤 온조(溫祚)는 힘을 길러 홍성 금마 마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후부터 다시 위례(尉禮)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비류 백제가 멸망하자, 비류백제세력을 규합하여 다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帝)로 바꾸었던 것이다.

백제(百帝)는 동부여의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소서노(召西奴)의 첫째 아들 비류(沸流)가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 세운 나라이고, 백제(十濟)는 소서노(召西奴)의 둘째 아들 온조(溫祚)가 남쪽 한강지역으로 내려와서 계승한 나라이다.

북방 유목민족인 부여계의 혈통답게 다혈적이라고 볼 수 있는 비류는 자기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순간 이루어 보려다 패한 반면에 온조는 성질이 온화하고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보여진다. 아마 고추모와 소서노의 성품을 반반씩 닮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소서노는 비류보다는 그러한 온조에게서 사랑하는 남자 고추모을 더 느꼈기에 온조와 함께 했다고 보여 지며, 그러한 어머니와 함께 주축돌을 하나하나 다지듯이 백제의 기틀을 튼튼히 만들어 나갔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군사력면에서 강력한 유목기마민족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비류백제세력은 전연에게 패했으나, 어머니와 형제의 나라인 온조백제와 손을 잡고 상호세력간에 불협화음을 없애기 위해서 소서노와 온조와 비류가 죽고 난 이후 비류백제세력과 온조백제세력은 3세기 상호 합의를 대원칙으로 통일국가를 이루어 낸 기반으로 마한지역인 한반도를 지배하고 나가 일본열도를 분국으로 삼고 중국대륙과 동남아까지 진출하여 해상무역을 장악하는 국제 무역국가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백제-보라색이 백제영역    
즉 상호합의 내용이라고 추론한다면,  “1. 진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인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가 쇠약해지자 한나라가 날뛰는 걸 보고 ‘고두막칸’은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분연히 일어나 지금의 북만주나 동몽고(東蒙古) 땅으로 추정되는 졸본(卒本)에서 왕으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였는데, 단군조선 제47세(대) 고열가 단제(古列加 檀帝)의 후손이라는 고두막칸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역시 시조로 삼아 사당을 짓고 백제시조로 제사지내기로 하며, 2. 백제의 왕위 계승권은 온조왕의 장자들에게 있으며, 3.고토회복전쟁을 통하여 회복한 지역은 해외 통치지역이자 무역기지인 ‘담로’를 두어 비류왕의 아들들과 온조왕의 아들들이 제후(총독)로 파견되어 통치하는 것으로 하고, 4. 임명되어 파견된 담로의 제후는 본국 백제의 명령을 따르며, 명령위반시 제후직 파면과 그에 따른 처벌을 엄하게 받으며, 반란시 본국 백제를 중심으로 담로지역의 군대가 연합하여 무력화시킨다. 5. 또한 천자국은 오로지 하나이니 본래 어머니 소서노의 나라이기도 하는 고구리의 왕권은 본래 백제에 있으니 비류. 온조세력은 합심하여 고구리의 왕권을 회복함은 물론이고, 우리 시조 동명성왕의 나라인 단군조선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하는데 후손 대대로 목표로 삼는다.” 등으로 비류백제세력과 온조백제세력이 합의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소서노의 경우라면 5조항이 가장 가슴아픈 내용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류와 온조가 함께 만나서 힘을 모아 하나의 나라를 세우니 소서노의 마음은 참으로 좋았으며,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생각했을 것이다.

견물생심이라, 사람이란 누구나 자리와 재물과 미모에 눈이 어두운 건 인지상정이다. 자식들이 왕위를 두고 치고 박는 모습을 어이 본다는 말인가? 고추모나 소서노나 고민일 수 밖에 없는데, 고추모 또한 부를 통해 자신을 존재케 한 소서노에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후계자만큼은 비류에게 넘겨 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서노는 자신이 먼저 자식들을 데리고 떠나는 것이 고추모 가족의 행복과 고구리의 앞날을 평탄케 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고추모에게 양해를 얻었을 것이며, 남하하여 마한땅에 자리를 잡고 고추모에게 너무나 살기좋은 땅이라고 편지까지 보내니 고추모가 너무나 기뻐하여 ‘어하라’(여왕)에 책봉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이 보이는 걸 보니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권쟁탈전에서 이미 이성을 상실한 자식들은 후대에 이르러 형제국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치고 박는 역사를 기록하고 만다. 인류의 전쟁도 본래는 하나의 신에서 조상이 나왔을 터인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서로를 몰라보고 오로지 자신들만 살겠다며, 뺏고 죽이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이 되어 버렸으리라. 그래서 함석헌은 어서 빨리 하나의 신과 하나의 조상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비류는 소서노와 떠나지 않고 끝까지 고구리 땅에 남아 왕권계승에 대한 적통임을 내세워 보지만, 추종하는 세력이 없어 결국 배다른 유리에게 왕위가 계승되어 버리고, 비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대륙을 떠돌며 이리저리 치우치다가 결국 온조(溫祚)에게 귀순하였다. 유리와 비류와의 고구리 왕위쟁탈전은 부여의 권력을 장악한 고추모세력과 고구리 백성들은 역시 진조선을 계승하여 부여를 건국한 해모수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부여의 정통성을 인정하자는 뜻에서 단군조선의 적통인 비류보다는 유리를 선택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새로 출발하는 고구리의 앞날을 위해서도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피는 못 속인다는 조상들의 말이 현대 유전학적으로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닐 터, 유리왕의 고구려과 온조.비류의 백제 모두 단군조선과 부여을 계승하여 동아시아의 패자가 되었으며, 온조.비류의 백제는 3면이 바다인 마한인들의 해상활동을 더욱 개척하고 발전시켜 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도하고, 덤으로 일본이라는 국가를 건국하게 되는 것이다.

고추모는 그래서 죽었어도 행복했을 것이고, 소서노 또한 죽었어도 행복했을 것이고, 고추모와 소서노는 두 손을 꼭 맞잡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진정한 사랑이란 이런 거야”하며 후손들에게 말해 주고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소서노와 고추모에게 바치고 싶은 꽃이 있다면 바로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동백꽃이나 매화가 아닐까 싶다.  고난과 인내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수 없음은, 가족과 재산 등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병까지 얻으면서 신을 원망해 보지만, 신은 대답하지 않고 결국 인간자신의 문제라는 점을 떠 오르는 태양과 달과 수 많은 별들과 자연을 보면서 대답하지 않지만 답을 주는(근본적으로 판단하고 행동의 주체인 인간자신의 문제라는 사실) 하느님의 위대함을 인식한다는 성서의 욥기의 얘기가 아니라도 우리 민족의 고난사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을 통하여 모진 시련을 이겨내고 위대한 민족을 지켜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신 당신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 환단고기 등 문헌을 토대로 고추모의 고구리 건국 이야기를 객관적인 접근으로 쉽게 기술해 보려고 했습니다. 양해바라며 고구려 바로 세우기에 도움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자료]고구려.백제관련 환단고기의 기록내용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서 고추모를 도운

국제무역상인 연타발과 비류.온조백제(沸流百濟)의 건국 경위를 살펴본다.


「연타발(延타勃)은 졸본(卒本)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曷思)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富)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創業立都)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高朱蒙) 성제(聖帝)가 북옥저(北沃沮)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訥見)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坐原)에 봉받았다. 延타勃卒本人來往於南北曷思而理財致富累至巨萬陰助朱蒙其創基立都之功居多後率衆轉徙九黎河而賈魚鹽之利及高朱蒙聖帝伐北沃沮納穀五千石移都訥見而先自願納招撫亡以勤王事以功得封於坐原而年八十歿多勿三十四年丙寅春三月也」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B.C 42년) 3월에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에 책봉했다. 高朱蒙在位時嘗言曰若嫡子琉璃來當封爲太子召西弩慮將不利於二子歲己卯三月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南奔至辰番之間近海僻地而居之十年買田置庄致富累萬遠近聞風來附者衆北至帶水西濱大海半千里之土境皆其有也遣人致書于朱蒙帝願以內附帝甚悅而奬之冊號召西弩於瑕羅」

「(어하라) 13년(B.C 19년) 임인에 추모가 돌아가자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及至十三年壬寅而薨太子沸流立四境不附」

[자료]고추모와 소서노 집안의 부여사 내력 - 송호국

먼저 해모수는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북부여를 개국한 북부여 제1대 단군이다. 그리고 그 둘째 아들이 고진이고 이 고진의 손자가 불리지이고 이 불리지가 하백의 딸 유화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고주몽이다.

그리고 제4대 단군은 고우루인데 이 고우루 단군의 동생이 바로 해부루다. 고우루 단군 때 한무제가 난하 유역의 왕험성을 중심으로 한 위만 정권의 분열을 틈타 쳐들어 오는데, 이를 일거에 격파하고 동명국을 개창한 이가 바로 고두막한이다.

이 고두막한은 이번 대하사극에 그 이름조차 빠져있다. 이 고두막한은 제5대 북부여 단군이 되는데 이 분의 손녀가 바로 소서노다. 그러므로 소서노는 제6대 고무서 단군의 외동 딸인 바, 고무서 단군은 주몽을 자신의 사위로 삼아 북부여를 넘겨준다.

그리고 해부루란 제4대 고우루 단군의 동생으로 고두막한의 배려로 가섭원 땅으로 옮겨가 동부여를 개창하게 된다. 그리고 금와는 이 해부루의 아들이고, 이 금와의 아들이 바로 대소다.

연타발은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제2대 모수리 단군의 신하로 상장이 되어 위만의 침입을 차단한 인물이고, 한 사람은 거상으로서 고주몽의 신하가 되어 나중에 좌원에 봉해진 인물이다.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불리지와 야합을 한 까닭으로 아버지 하백에 의하여 별궁에 유폐되는데, 이 유화를 거둔 것이 바로 해부루이다. 그 후 유화는 불리지의 아들인 주몽을 출산하게 되는데, 이 주몽은 고무서 단군의 사위가 되기 전에 이미 동부여에서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유리를 두게 된다. 이 유리는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제치고 나중에 고구려 황제가 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한가지 눈여겨 볼 것이 있는데 북부여 제5대 고두막한 집안의 내력이다. 동명제 고두막한은 원래 단군조선 47대 단군조선의 마지막 고열가 단군의 후손이다. 그리고 이 고열가 단군는 단군조선 43대 물리 단군의 고손자다. 그리고 환단고기에서는 단군조선 29대 마휴 단군 부터 43대 물리 단군까지는 자기 핏줄인 아들(단 한명의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태자로 기록함)에게 대를 전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우화충의 난을 평정하고 제위에 오른 제 44대 단군이 조선에서 대부여로 국호를 변경하였으므로, 제43대 단군은 단군조선 마지막 단군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상장군으로 한개의 난을 평정하고 제위에 오른 47대 고열가 단군은 고리국인 종실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일어나고, 제후들이 말을 잘 안들어먹자 오가에게 정치를 맏기고 제위를 버리고 은둔하므로서 대부여는 사실상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고열가 단군은 대부여의 마지막 단군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환단고기에서는 삼한 일통의 사상에 의하여 제47대 단군까지를 단군조선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고두막한이 한무제의 침입을 격퇴하고 동명국을 건국하여 이를 기반으로 북부여 제5대 황제가 되었는데 그 아들인 제6대 고무서 단군이 해모수의 후손인 고주몽을 사위로 삼아 제위를 넘김으로서 북부여는 제6대 만에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됨으로 고무서 단군은 북부여 마지막 황제 및 동명국의 마지막 황제가 된다. 고주몽이 고구려로 국명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두막한 혈통은 단군조선 제2기라 볼수있는 제22대 색불루 단군으로 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28대와, 29대가 태자나 자로서 제위에 올랐다는 말이 없으므로 단정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며, 환단고기에서는 정황상 27대와 28대 통치기간에 여러가지 천재지변 및 여러 우환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MBC대하사극 주몽을 보면서 몇 가지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해모수의 진손자 불리지의 부인인 하백의 딸 유화가 해모수의 부인이 된 점.

소서노는 제6대 고무서 단군의 딸인데, 소서노가 거상 연타발의 딸이 된 점.

북부여와 동부여는 별개이며, 북부여는 황제국이고, 동부여는 북부여의 명을 받드는 제후이라는 점.

그리고 이 때는 열국시대로서 우리 민족이 한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나라와는 천진, 북경 근방에서 대치중인 상태로 아직은 북부여를 중심으로 형식상이라도 연합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배경음악:만남(노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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