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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가 증거하고 있는 부여조선이란

'中國'이란 문자는 본래 "나라 가운데"라는 의미이지 '국호'가 아니였다

문화부 | 기사입력 2008/04/01 [13:41]

<한단고기>가 증거하고 있는 부여조선이란

'中國'이란 문자는 본래 "나라 가운데"라는 의미이지 '국호'가 아니였다

문화부 | 입력 : 2008/04/01 [13:41]

<한단고기>을 중심으로 고고학적 내용과 함께 부여조선(단군조선이라고 함)을 기술해 보았다.
 

  쥐나국과 단군조선의 최소 국경선은 하북성 난하와 만리장성의 시작인 갈석산과 접해 있었다. 황하문명이 시작된 산동지역은 본래 동이족들이 살았으며,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의 지역이였다. 중국문명의 시작은 부루태자가 산동과 요서지역을 관할했던 번조선에서 있었던 도산회의 때, 후일 하나라 시조가 되는 사공 우에게 홍수를 막을 수 있는 오행치수법, 5복, 3덕, 천상역수(天象曆數) 등 홍범구주를  가르쳐 준데서 부터다. 당시 번조선의 도산회의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산동반도지역의 하.은.주나라가 모두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였음을 알 수 있다. 아! 그 은혜크도다 단군왕검과 부루태자이시여!

1. 부여조선의 건국(扶餘朝鮮 開國)

단군왕검의 탄생과 성장

단군왕검은 천손족(天孫族)인 배달국의 거불단 한웅천황(18대 한웅)과 지손족(地孫族)인 단웅국 또는 단씨국 홍제의 따님과의 사이에서 신묘년(B.C. 2,370) 5월 2일 인시(寅時),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나셨다.

단군왕검의 본명은 임건으로 어려서부터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14세 되던 갑진년(B.C. 2357)에 외할아버지인 단국의 황제는 그의 신성함을 알아보고 비왕(裨王 : 왕을 보좌하는 부왕)으로 삼았다.

개천(開天) 1565년(무진(戊辰)년, B.C. 2333) 상월(上月 : 음력 10월) 3일에 이르러, 신인(神人) 왕검이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에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고,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께 제사를 올려 단군조선이 시작되었다.

단군왕검께서는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으며,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라와 백성을 다스렸다. 구한(九桓)의 백성들은 모두 그를 마음으로부터 따랐고, 단군왕검을 천제(天帝)의 화신이라 여겼다.

단군왕검은 신시(神市)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부여조선(扶餘朝鮮)이라 이름했으며, 비왕의 자리에 24년, 제위에 93년 있고 130세까지 사셨다.

 

(3) 단군왕검의 가르침 - 단군칙어(檀君勅語)

단군께서 개국하실 때 모든 백성들에게 내린 가르침의 말씀이 있었는데, 이를 단군칙어(檀君勅語)라 한다.

① 너희는 지극히 거룩한 한님의 자녀 됨을 알아라.
② 너희는 영원토록 자손이 계승할 때에 터럭 만한 것이라도 다침이 없고 이즈러짐 없어라.
③ 너희는 한겨레로 일체가 되어 의좋고 정답게 서로 손을 잡고 같이 살아라.
④ 너희는 조심하라, 조심하라. 내 땀방울이 적시우고, 내 피가 물들인 강토에 혹여나 더러운 때 묻힐세라.
⑤ 너희는 네가 해야할 일은 너희 손으로만 하게 하라. 그리하여 각기 너희 할 직분을 지켜라. 너희 할 책임을 견디라.
⑥ 네가 가질 것은 남에게 주지 말고, 네가 할 일을 남이 하지 말게 하라.
⑦ 너희는 이 나라 기슭, 한군데도 빠짐없이 하늘 은혜와 땅의 이익 두루 받았음을 알라.
너희 것 삼아 쓸 대로 써서 너희 생활이 항상 풍족 하라. 넉넉하거라.
⑧ 너희는 내가 오늘 훈칙한 이 알림이 할 일로써, 천하만민에게 고루 알리어 주거라.

☞ 단군칙어가 전해진 내력

- 단군칙어가 세상에 전해지게 된 것은 대진국, 즉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덕분이다. 대야발은 왕으로부터 단기고사(檀記古史)를 편찬하라는 명을 받고, 민족의 광범위한 이동과 함께 사해(四海)에 널리 퍼져있는 모든 고적을 직접 답사하였다. 잃어버린 역사를 바로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그는 각지의 사서와 석실, 장서, 고비(古碑)와 많은 사람들의 사평(史評)을 참고하고, 먼 나라(오늘날의 터어키)까지 2번이나 돌아보며 검증하였다. 단군칙어는 그 후 삼십 년만에 편찬된 단기고사에 전해지는 단군왕검의 가르침이다.

2. 단군조선의 발전

▲ 강화도 머리산 참성단(제단)

(1) 신선도의 제천의식 - 천제(天祭)

첫 민족국가로써 신선의 나라를 세운 왕검께서는 정신적 상징으로 강화도 마니산 정상(혈구(穴口), 삼랑성(三郞城 : 강화도 길성면에 있는 고성)에 참성단(塹城壇)이라는 제천단(祭天壇)을 쌓게 했다. (B.C.2283 무오51년) 그리고 나라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5월 단호제와 10월 상달제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 민족의 근본에 보답하였다. 이때는 제천권을 가진 천자(天子)였던 역대 단군들이 천제를 주관했다.

(2) 체제

단군은 정치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요, 종교적으로는 최고 지도자요, 교육적으로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큰 스승이었다. 그러므로 단군은 신정(神政)을 베풀어 선계(仙界)를 지향하였으며, 동시에 지상에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그 목적에 적합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단군조선의 통치체제는 1단군(檀君), 3한(韓), 5가(加), 64족(族), 3사(師), 6사(事)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3한(韓)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이며, 광대한 땅을 셋으로 나누어 진한은 단군의 직할통치 지역이었고, 나머지 마한, 번한은 비왕들을 두어 간접 통치했다. 22대 색불루단제 이후에 막조선, 진조선, 번조선의 삼조선(三朝鮮)으로 개편되었다.

5가(加)는 우가(牛加), 마가(馬加), 저가( 加), 구가(狗加), 양가(羊加)이며, 64족은 단군조선을 이루고 있는 부족이다.

3사6사(三師六事) 제도는 배달국 이래로 이어져온 중앙행정체제로 3사(師)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말하고, 6사(事)는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형(主刑), 주병(主病), 주선악(主善惡), 주병(主兵)을 말한다.

중대한 국사(國事)에 대한 의결기관으로는 3한(韓) 5가(加)로 구성되는 화백회의(和白會議)가 있었는데, 한국 배달국 이래의 전통이었다.

(3) 경제 및 산업

단군조선의 경제적 기초는 농업이었으며 그밖에 유목, 사냥, 고기잡이, 채집이 병행되었다. 토지제도는 균전제(均田制)를 채택하였으며, 세율은 매우 낮아 8대 우서한 단제 무신원년(B.C. 1993년)에는 1/20 세법(二十稅一之法)을 채택하였으며, 15대 대음(代音)단제 경진원년(B.C. 1661년)에는 1/80 세제(八十稅一之制)를 채택하였다.

단군조선에는 교환경제가 발달하였으며, 교환의 기준을 위한 도량형 즉 쌀되와 저울 등을 이미 통일하였고, 패전. 패엽전. 자모전. 공방전 등 화폐의 개발이 이루어졌다.

또 이 시대에는 이미 산업이 발달하여 11대 도해단제 때는 공창(工廠)을 건설하여 종이, 베, 선박 등을 생산하였다.

또 농업국가의 기본인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성공하여 단군왕검의 장자인 2대 부루단제 3년(B.C. 2238년)에는 치산치수 사업의 지식을 그 무렵에 9년 동안의 홍수로 고생하고 있는 하(夏)나라의 우(禹)에게 팽오로 하여금 치수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단군조선은 고도의 정신문화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아주 풍요로웠던 나라였다.

▶ 단군조선 경제발전의 기록

① 2대 부루단제 3년(B.C. 2238년)
쌀되와 저울 등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베와 모시의 가격이 다른 곳이 없고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았다.

② 4대 오사구단제 무진5년(B.C. 2133년)
패전(貝錢, 원공패전(圓孔貝錢) : 둥근 구멍이 뜷린 조개 모양의 돈)을, 14대 고불단제 42년(B.C. 1680년)에는 자모전(子母錢)을, 19대 구모소단제 10년(B.C. 1426년)에는 패엽전(貝葉錢)을, 37대 마물단제 5년(B.C. 642년)에는 방공전(方孔錢) 등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 단군조선의 발명품과 만국박람회

11대 도해단제 56년(B.C. 1836년)에는 송화강 연안에 기계공창을 설치하여 각종 기계를 제조하였고, 새로운 기계발명상을 받은 발명품이 나왔다.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자행륜거(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뢰차(自發雷車), 조담경(照膽鏡), 천문경(天文鏡), 자명종(自鳴鐘),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물건들이 발명되었다고 한다.

또 도해단제 38년에는 수도인 평양에서 만국박람회를 크게 개최하여, 여러 나라의 진기한 물품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와서 산더미같이 진열되었다.

또 한국시대의 12한국을 통해서 세계각지로 이동한 9한족(九桓族)들과 수메르국, 아유타국 등 혈연을 같이하고, 문명의 교화를 받아온 수많은 제후국들이 모여 만국박람회를 열었다.

"14대 고불단제 56년(B.C. 1666년)에는 호구(戶口)를 조사하였는데 단군조선의 인구는 총 1억 8천만 구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4) 단군조선의 문화

① 가림토 문자

단군조선시대에는 선대인 배달국으로부터 계속 사용해온 진서(眞書), 즉 녹도문자가 있었다. 그러나 텔레파시와 같은 고도의 의사전달 방법을 깨우치지 못했으며, 배움이 부족한 일반 백성들이 녹도문을 사용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또 음문자이며 만물을 형상화한 뜻글자인 녹도문만으로는 완전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조선의 문자인 가림토(加臨多) 문자가 탄생하게 되며, 가림토 문자(38자)를 토대로 더 쉽게 정리하여 4177년 뒤 재창조된 것이 바로 훈민정음(28자)이다.
 

② 가림토 문자는 훈민정음의 원형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가림토 문자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원형이다. 그리고 근세조선 시대 세종 때에 이르러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로 재창제 되었으며, 최근에는 주시경 등에 의해 24자로 재정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림토는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일본에도 전해져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문자가 되었다. 또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분국이었던 몽고로 건너가 "파스파"란 고대문자가 되었으며, 배달국의 분국이 있었으며 그 후예들이 살고있는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스토 알파벳과 구라자트 문자의 원형이 되었다. 
 

▶ 가림토 문자 창제동기

단군조선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B.C, 2181년)에 갸륵 단제께서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아직 풍속은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多)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한단고기 - 단군세기편)

▶ 훈민정음 재창제의 증거

①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非新字也>. 언문은 전조선 시대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 ; 세종 23년에 발표한 글)
②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세종실록 25년 ;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첫 발표문)
③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한글 재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 상소문 중에서)

▶ 해외에 남아있는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

그러나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은 한단고기 뿐 아니라 일본, 인도, 몽고 등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나라들에 풍부하게 남아 단군조선 시대와 그 영향력을 지금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다만, 우리만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공식화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일본에는 한글을 닮은 고문자가 있다. 대마도의 아히루 가문에서 전해져왔기 때문에 아히루 문자라고 하며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라고 한다.

신대문자는 지금도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 보관되어 있다.

일본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의 기록은 서기 708년의 유물이다. 서기 700년 무렵은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후 발해를 건국했을 무렵이며, 세종대왕은 1446년에야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단군조선 시대가 신화였고, 가림토 문자도 한단고기에 나왔으니 믿을 수가 없다고 전제한다면, 1446년의 훈민정음에서 708년의 신대문자가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면 일본의 신대문자에서 훈민정음이 나왔는가?

실제로 일본의 오향청언(吾鄕淸彦 고쿄 기요히코)이란 학자 등도 708년의 신대문자의 유물을 증거로 들면서 "일본의 신대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훈민정음을 낳게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고 그것을 연구한 결과, 자신의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조선 훈민정음의 뿌리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신대문자의 원형인 원시한글이 한단고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인정했다.

일본의 천황가 자체를 비롯, 일본이 단군조선이래 한국인이 건너가 세운 나라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일본인들에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것을 인정하기를 기본적으로 꺼릴 뿐 아니라 오히려 기회만 있으면 거꾸로 왜곡하려고 애를 써왔다. 그런데 그런 풍조 속에서 일본의 학자가 그때까지 자신의 주장을 뒤엎고 가림토 문자에서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나왔고 그 뿌리임을 학자적 양심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통 사학계와 국어학계에서는 아직도 "훈민정음이 세종대왕 혼자서 만들었는지 신하들과 함께 만들었는지" 논쟁 중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제를 입증해준다. 단군조선이 있었다면 단군할아버지도 실제하셨던 민족의 조상임을 믿을 수 있고, 가림토 문자가 발견되는 곳은 단군조선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가림토가 일본에 보급되어 아히루 문자가 된 것이다.

▶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인도의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이는 문자는 우리의 한글과 흡사한데 자음은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ㄴㄷㅌㅇㅁㅈㅂ 그리고 ㅏㅑㅓㅕㅗㅛㅡㅣ등) 이 지역은 배달국 시대 우리 민족이 인도로 이동해가서 세운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의 후예가 사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자라트인들이 사용하는 타밀어에 문자뿐 아니라 발음과 뜻이 비슷한 단어들(나-난/너-니/엄마-엄마/아빠-아빠/보다-봐/날-날/오다-와/나라-나르/너 이리와-니 잉게와 등)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산스크리스트어 알파벳은 우리가 국민학교 때 배운 한글과 너무나 흡사하고 (찌커거.., 쪄쳐져..., 떠터더..., 뻐퍼버..., 셔허), 우리 한글처럼 "ㄱ"에서 시작해 "g"으로 끝난다.

▶ 영어와의 관계

가림토 문자에는 X O M P H I 등 알파벳의 자모도 여러 개 보인다. 가림토 문자가 4177년 전에 만들어진 반면, 알파벳의 역사는 겨우 3000년을 넘지 못한다.

제후국의 왕 또는 어떤 지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인 한(汗)은 하늘을 뜻하는 글자인 한(桓)에서 나온 이름이다. 즉 한(桓)에서 한(韓), 한(漢), 한(汗)이 나온 것이다.

또 한(汗 : HAN)이 몽고로 건너가 칸(KAN : 징기스칸)이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서구로 건너가 킹(KING)이 되었으며, 그후에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하버드대학에서의 연구결과로도 발표된 바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우리말과 우리의 고문자는 한단시대의 영역을 통해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독특한 환경과 조건들에 따라 변화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5) 문화와 교육

▶ 천문역법

단군조선에도 태음력(太陰曆)과 태양력(太陽曆)에 의한 달력이 있었다. 2대 부루단제 12년(B.C. 2229년)에 신지 귀기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正圖)를 만들어 바쳤다.

5대 구을단제 4년(B.C. 2096년)에는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세수로 세는 육십갑자(六十甲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19대 구모소단제 54년(B.C. 1382년)에는 지리숙이 태양을 중심으로 달과 별이 그 궤도를 한 바퀴 도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태양력인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저술했다.

▶ 단군조선의 노래

2대 부루단제 때의 어아가(於阿歌), 16대 위나단제 때의 애한가(愛桓歌), 34대 오루문단제 때의 도리가(兜里歌)등이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 저술

3대 가륵단제 6년(B.C. 2177년) 신지고결의 배달유기(配達留記 : 최초의 역사서)
19대 구모소단제 51년(B.C. 1385년) 목아득의 우주원리론, 40세 달음단제 때 윤지복의 도덕경
42대 을우지단제 때 백호돈의 지리학(地理學)과 광물학(鑛物學)
43대 물리단제 때 장자학의 설명학(說明學)
44대 구물단제 때 최화덕의 동물학(動物學)과 식물학(植物學), 서백원의 태양-태음-소양-소음의 사상의학(四象醫學), 황운헌의 백과서(百科書), 류종득의 이재학(理財學), 적우순의 심리학(心理學)
45대 여루단제 때 장소부의 의학대방(醫學大方), 홍문선의 태학조문(太學條文), 조대휴의 자본론(資本論)
47대 고열가단제 때 소정국의 건축학(建築學), 구로선의 종수학(種樹學)

▶ 단군조선시대의 교육

단군과 신하들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들이었으며, 백성들은 단제를 깨달으신 성인으로, 한인 할아버지-한웅 할아버지-단군 할아버지로 이어지는 얼의 어버이로 믿고 섬겨왔다. 그러므로 역대 단군으로부터 제자들로써 법(法)을 전수받고 100%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랐기에 단군조선과 같은 방대한 신성제국이 2000년이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온 나라의 백성들 남녀노소 모두 신선도를 수련하여 몸과 마음을 닦았으며, 단군조선이란 나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학교이자 수련장이었다.

▶ 단군조선 교육의 특성

단군조선시대에 이루어진 교육의 특성은 신선도를 전국민이 닦음으로써, 신성을 깨닫고 하늘과 통하는 종교교육과 지덕체를 연마하는 사회교육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데 있다. 그래서 제천행사를 주관하는 성소(聖所)인 소도(蘇塗)옆에는 교육기관인 경당이 함께 설치되어 청년들을 교육시켰다.

▶ 교육제도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제도로 국자랑(또는 천지화랑)이 있었으며, 화랑의 총사령관이 국선(國仙)이었다. 제천기간 동안에는 화랑들이 하늘에 제를 지내는 소도의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평소에는 소도가 화랑들의 회의장소로 쓰여졌다. 이렇듯 단군조선시대 교육의 역할을 담당했던 기관으로는 소도, 국자랑, 경당 등이 있었으며, 14대 고불단제 때(B.C. 1670년)는 국립대학이 설치되었다.

▶ 소도(蘇塗)

소도에서 지내는 제천(祭天)행사와 의식은 곧 고구려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그로부터 어려운 일이 있을때는 힘을 합하고 이웃을 위하여 있는 이와 없는 이가 서로 도와 문명한 나라를 이루고, 개화 평등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소도가 세우지면 그 안에서는 계를 지켜야하는데 바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이며 천지화랑들의 계명이기도 했다. 소도의 곁에는 반드시 교육기관인 경당이 세워진다.

▲ 환국의 국화-무궁화

▶ 천지화랑(국자랑 : 國子郞)

13대 흘달단제 20년(B.C. 1763년)부터 시행된 신라 화랑제도의 기원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던 미혼의 자제들을 말한다. 국자랑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 (天地花 : 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이라고도 했으며, 화랑들의 총사령관을 국선(國仙)이라 했다. 천지화랑은 후대 고구려의 조의선인이나 신라의 화랑도로 이어졌다. 여자낭도를 원화(源花)라 했고, 남자를 화랑(花郞)이라 했으며,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받은 이를 천왕랑(天王郞)이라고 했다. 이들은 신선도의 오상(五常)을 지켰는데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으로 신라 때 원광법사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진 세속오계의 원형이다.

▶ 경당

단군왕검 제위시절 2대 부루단군이 아직 태자였을 때 태자의 명으로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지냈다. 결혼하지 않는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의 기예를 익히며 심신을 수련했다.

(6) 단군조선의 강역

단군조선의 영토는 치대 캄차카반도, 연해주를 비롯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 몽골, 티베트와 중국의 중동부(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 산서성, 섬서성, 감숙성, 호북성, 호남성 등)까지, 그리고 최소 만주대륙 전체와 한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북아시아 대륙을 대통일한 민족국가였던 것이다.

단군왕검은 천하의 땅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며, 삼한은 5가(加) 64족(族)으로 이루어졌다. 삼한은 진한, 마한, 변한을 말하며, 진한은 단군왕검께서 직접 다스리셨고, 마한은 고시씨의 후손인 옹백다를, 번한은 치우천황의 후손인 치두남을 봉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7) 단군조선의 대외관계

① 중국과의 관계

단군조선 시대에 요나라를 비롯한 역대왕조는 모두 단군조선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고 당연히 친선관계에 있었다. 조선은 자비와 의로움(仁義)로써 주변국들을 대했으며, 항상 아낌없이 도움을 주었다.

시대적으로 요-순-하-은-주나라로 왕조가 바뀌어갔으나 이 국가들이 모두 중국의 한족(지나족, 서토족, 하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대부분 동이족의 국가가 많았으므로 현재 중국 한족의 시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나라들은 지도층에 불의한 일이 있어 민심을 얻지 못하고, 살기가 어렵게 되면 멸망의 길은 걸으며, 여러 왕조가 바뀌어갔다. 중국 역사상 3백년 이상 지속된 나라가 없었다.

최초의 봉건국가로 알려져 있는 주나라는 단군조선의 체제를 모방해 여러 봉토를 왕실의 친척에게 나누어주고, 공·백 등의 작위를 주어 제후로 다스렸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경우 단제께서 성인(聖人)이었으며, 동시에 제후들과 신하들의 스승이기도 하여 군신간에 절대적인 믿음으로 연결된 관계였었기에 한 나라가 2천년이 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주나라의 제후들은 그러한 신뢰들이 없었으므로 세월이 흐르면서 왕실을 무시하고 다른 욕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주나라는 270여년 만에 멸망하고 수많은 나라들로 분열, 마침내 춘추전국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면서 이합집산을 계속하다가 뿌리 국가인 단군조선을 침범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전국시대의 7개 국가중 가장 동쪽에 위치했던 연나라와 제나라가 주로 조선에 도발을 하였다. 그러나 한번 조선을 침략하면 그들 국가의 수도까지 함락당하는 등 철저하게 응징당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조선이 열국으로 분열하여 힘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갈 때, 반면 중국은 주로 200년 주기의 왕조의 변화 속에서 팽창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 왕조들도 한족(漢族) 만의 역사가 아니라, 동이계열이나 거기서 갈라져 나간 유목민족의 왕조가 많았다. 중국역사는 한족에 의한 왕조와 동이족 출신 유목민족에 의한 왕조<연(燕), 수(隨), 위(魏), 원(元), 금(金), 청(淸) 등> 간의 투쟁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② 주변국과의 관계

캄차카반도, 연해주를 비롯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 몽골, 티베트와 중국의 중동부에 이르는 동북아시아 대륙 전체를 장악하고 있던 단군조선은 그 영토의 크기만큼 주변국과의 크고 작은 관계도 활발하였다.

몽고, 말갈, 흉노, 선비, 돌궐(투르크)등 모두 동이의 혈통에서 갈라져 나갔으며 각 지역의 토착종족들과 문화와 혈통이 섞이면서 근본을 잃어버리고 야만화되었다. 그러나 단군조선은 넘볼 수 없는 뿌리의 나라요, 스승의 나라였다.

기준으로 지구촌 곳곳에 정신문명을 전파하여 스승의 역할을 해왔고, 그렇게 면면히 이어진 전통이 찬란하게 꽃피운 나라가 단군조선이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천도(天道)에 기준을 두고 행해졌던 아주 특별했던 나라였으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강대국의 모범이었다.

▶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의 기원

전체적으로 볼 때 단군조선 2천년의 역사 가운데 24회의 대소전란과 군대파견이 있었다. 그중 외국과의 싸움이 14회가 있었는데, 그것도 대부분 무도한 나라에 대한 징벌이요, 침략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러나 백년에 한번 꼴로 전란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며, 단군조선의 폐관이래 지금까지 2천년간 1000여회의 외침과 전란이 있었다니, 단군조선 시대가 얼마나 태평성대였는지 알 수 있다.

(8) 여러 민족과 각국의 기원

▶ 티벳

배달국 15대 치액특천왕은 티베트 즉 치액특에 신선도를 전해주었으며, 티벳의 신선도가 인도로 전해지고 힌두교의 사상이 합쳐져 불교가 탄생하게 된다. 티벳(西藏)의 수도는 장당경으로, 치우천황 때부터 8백년간 티벳을 직접 통치하였다고 한다.
(일붕 서경보 박사의 증언)

단군조선때에는 3대 갸륵단군 이래, 5대 구을단군, 22대 색불루단제, 43대 물리단군, 44대 구물단군(B.C. 425)까지 장당경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등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삼국유사에도 기원전 425년(44대 구물단제 무렵) 나라이름을 대부여라 바꾸고 수도를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티벳의 신선도가 인도로 전해진 후 인도의 불교가 거꾸로 티벳에 전해져 티벳불교(라마교)가 되었으며, 그 라마교가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국교가 되어 다시 우리나라의 고려조에 들어왔다. 결국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가 동족간의 교류였다.

▶ 몽고족

<한단고기>에서는 "4대 오사구단제 원년(B.C. 2137년), 큰아들 구을(丘乙)을 태자로 삼고,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지역의 왕으로 삼으니, 오사달은 몽고인의 조상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훗날 몽고의 부족장들이 테무진을 징기스칸으로 추대한 것은 1206년이며, 원나라는 한족의 송나라를 멸망시킨 후 1279년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최대의 제국을 이루었다.

※ 기타 : 말갈족(숙신, 읍루, 물길, 동예, 맥), 흉노족(연나라를 세움), 선비족(돌궐, 터키의 뿌리, 선비족의 후예가 수나라를 세움)

(9) 단군조선의 멸망

그런데 후단군시대에 접어들면서 세력이 커지게 된 장수들이 차츰 말을 잘 안듣게 되었고, 개인적인 욕망에 따라 이합집산하게 되었다. 고열가 단제때에 이르러서는 그 법통으로 연결된 끈이 없어져 버렸으며, 종래에는 멸망에 이르게 된다.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 단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셨다고 기록은 말한다. 고열가 단제께서는 천시를 보신 후 때가 지났음을 알고, 영적인 눈으로 새로운 천시가 이천년후에나 이 민족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시고는 "너무나 타락해서 고귀한 법을 전수해 줄 수 없다."고 하신 후 고열가 단제께서는 절망으로 통한의 가슴을 안은 채, 2천년 신선의 역사를 폐관하시고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셨다.(B.C. 238년 3월)

본래 단군조선의 방대한 강역은 후기에 들어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중 진조선은 단군의 직할통치 구역이었고, 번조선·막조선은 비왕을 두어 간접통치 했었다. 진조선은 B.C. 238년 47대 고열가 단제의 폐관으로 문을 닫았다. 번조선은 B.C. 194년 동이족의 모습을 한 연나라 사람 위만의 책략에 멸망했다. 마지막 42대 기자인 기준은 배를 타고 한반도로 피신하여 목지국의 금마군으로 가서 마한이란 나라를 세웠다. 제가(諸家)들은 한반도의 월지로 건너가 나라를 세워 익산 마한이 되었다.

막조선은 B.C. 238년 35대 비왕 맹남을 마지막으로 진조선과 함께 막을 내렸다.

위만조선은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의 정권을 찬탈한 위만으로부터 3대 우거까지를 말하며 내부분열 끝에 한나라에 항복했다.

▲ '히브리문명'으로 대변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사상과 신앙 또한 환국문명을 기반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세운 슈메르 문명의 아류에 불과한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의 고향은 바로  슈메르 갈대아 우르다.

[문헌비교]민족의식 고양에 한 몫을 한 〈단기고사 檀奇古史〉·〈환단고기 桓檀古記〉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북애노인의 역사서인 [규원사화 揆園史話]는 단군조선의 연대를 47대 고열가 단군까지 1195년의 역사를 적고 있다. 2천여년이라는 단군조선의 역사인식에 비해 무려 1천여년이라는 큰 차이가 난다. 연대는 크게 오류가 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고고학과 인류문화사적 고찰이 중요하다 하겠다.
 
[자료]티벳과 한민족과의 역사적 관계성



 

티벳국기의 상징적 의미

1) 중심에 눈으로 뒤덮인 장엄한 흰 산이 서 있다. 그것은 설산으로 둘러싸인 땅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위대한 티벳 국가를 상징한다.

2) 짙푸른 하늘에는 티벳 민족의 조상을 상징하는 6개의 붉은 띠가 펼쳐져 있다: Se, Mu, Dong, Tong, Dru 및 Ra 라는 여섯 부족이며, 이들은 다시 12 부족(후손)을 두었다.

3) 6개의 붉은 띠(부족상징)와 여섯 개의 청색 띠의 결합은
오래 전부터 티벳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오면서 그들의 영적 가르침과 세속의 삶을 보호해 온
흑색 및 적색 수호신들의 덕행을 끊임없이 기려온 것을 상징한다.

3) 설산 정상에는 태양이 사방으로 찬란한 빛을 비추고 있다.
이것은 티벳 땅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자유, 정신적 물질적 행복,
그리고 번영을 동등하게 향유하는 것을 상징한다.

4) 산비탈에는 대담무쌍한 갈기들을 반짝이며 스노우 라이언 한 쌍이 당당하게 서 있다.
이것은 이 나라가 영적 및 세속적 삶을 조화롭게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업적을 상징한다.

5) 높이 받들고 있는 아름답고 영롱하게 빛나는 삼색의 보석은
티벳인들이 지닌 삼보(불교의 귀의의 대상: 부처, 불법 및 승가)에 대한 영원한 경건심을 상징한다.

6) 두 마리 사자들이 들고 있는 두 가지 색의 소용돌이 보석은
10 바라밀과 16가지 자비행의 수행으로 대표되는 옳고 바른 행위를 위한
끊임없는 자기 수행의 과정을 상징한다.

7) 마지막으로 사방을 장식하고 있는 노란색 띠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은 정제된 황금이 사방으로 영원히 전파 발전되는 것을 상징한다.  

(지도) 티벳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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