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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국정화, 성공한 역사 쿠데타? 실패한 대통령의 길

대통령의 시정연설과 황우여 경질론...45년 전의 역사가 오버랩 된다

임두만 칼럼 | 기사입력 2015/10/27 [13:40]

한국사 국정화, 성공한 역사 쿠데타? 실패한 대통령의 길

대통령의 시정연설과 황우여 경질론...45년 전의 역사가 오버랩 된다

임두만 칼럼 | 입력 : 2015/10/27 [13:40]

[신문고 뉴스] 임두만 편집위원장 = 27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한 대통령은 중고교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에서 후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국민여론수렴 기간이 끝나는 11월 2일을 넘긴 11월 5일, 교육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행정고시를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국민들의 반대여론이 아무리 강해도 정부의 방침을 그대로 밀고 가겠다는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 국회 시정연설 방송화면 캡쳐   © 임두만

 

    

이 와중에 주무부처 장관인 황우여 교육 부총리에 대한 경질론이 여권에서 세를 얻으며 황 부총리의 경질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경질론의 주된 이유는 25일 발각된 교육부 국정화 TF사태가 핵심이다. 겉으로야 여론대응 잘못이지만 실상은 ‘비밀 장소를 들키면서 비밀리에 일을 해내지 못한 문책’이다. 그리고 이 여론 조성을 위해 홍위병을 내세우는 것도 불사한다.

    

친박 김태흠 의원의 황우여 경질 주장, 황우여와 김태흠의 정치적 무게로 볼 때 진영이나 유승민을 몰아낼 때보다 더 저급하다. 그럼에도 이 저격에 대해 김무성이 화답했다.

    

김무성은  27일 김태흠의 황우여 경질론에 대해 "그런 주장이 나올 만 하지 않느냐"고 사실상 경질을 촉구했다. 따라서 이제 황우여의 경질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앞서 유일호나 유기준의 경질은 총선출마를 준비하라는 배려였으나 ‘문책경질’이 분명하게 된 황우여는 사실상 공천도 힘들어 보여 교과서 정국의 최대 희생자가 될 전망이다.

    

황우여가 누군가? 법조인으로 부장판사를 역임한 뒤 감사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이회창에게 픽업되어 정치인이 된 황우여는 비례 포함 5선의 현역 의원이다. 이 과정에서 새누리당 원내대표, 당대표 권한대행, 당 비상대책위원, 박근혜 후보 공동선대위위원장,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 등을 지내면서 박근혜 당선에 1등 공신으로 친박계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의 공로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된 사람이다.

 

김태흠 정도가 감히 넘불 수 없는 무게의 사람이다. 그런데 일개 초선 김태흠이 직접 저격에 나섰으며 김무성이 거들었다. 박근혜의 사람쓰고 바리기에 철저하게 황우여가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서 박근혜의 부친 박정희가 사람을 쓰고 버린 사례 두 가지만 소개한다.

    

1. 장도영

장면 정부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5.16의 주역으로 등장,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등 자격으로 윤보선 대통령의 하야까지 끌어내는데 앞장 선 사람이다. 그러나 곧바로 실질적 쿠데타 주역인 박정희에 의해 반혁명분자로 몰려 체포되어 고초를 치렀다. 즉 박정희식 토사구팽에 당한 대표적 인물이다. 장면 전 총리는 회고록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에서 당시 장도영의 행적을 이렇게 회고했다.

    

▲  장도영과 박정희...유투브 캡쳐  

 

[1961년 5월 9일, 군부의 쿠데타 첩보를 입수한 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장도영을 집무실로 불렀다. 당시 입수한 정보는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어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내 말을 들은 장도영은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참모 총장이 먼저 알아서 나에게 보고해야 될 성질의 사건을 반대로 내가 참모 총장에게 지시하고 있으니 책임지고 내사해 보시오.”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내 말에도 장 총장의 “알아는 보겠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라는 대답이 반복될 뿐이었다.]

    

이런 장도영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 박정희 주도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자 그 세력에 편승했으며 군부의 일사분란한 충성이 필요했던 박정희는 그를 앞세워서 윤보선 대통령 하야를 끌어냈다. 이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장관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쿠대타가 성공의 길로 들어서자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바로 배신당한다.

    

혁명위원회가 국가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 그해 6월 장도영은 계엄사령관과 혁명위원회 의장에서 해임되고 8월 22일 중장으로 예편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1963년 3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월 형집행면제로 풀려났다. 그리고 그해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겉으론 도피출국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추방이었다.

    

이후 장도영은 미국에서 1968년부터 위스콘신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93년 퇴임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알츠하이머와 파킨슨병으로 고초를 겪다가 2012년 미국의 한 요양원에서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런 과정에서 장도영은 2001년에 발간된 ‘회고록’에서 “당시 쿠데타 음모를 하루 전에야 알았고, 쿠데타 세력에 대해 방첩대를 동원해 조사를 실시했으나 거짓보고로 실패했고 쿠데다 동조 세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2. 송요찬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의 말기인 1959년 6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송요찬은 4.19 직전인 1960년 3월 서울지역 계엄사령관으로서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한 시민 학생시위대의 시위 저지에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 즉 시위 사태가 확산되어 4.19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이의 진압을 위해 학생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리려 했다는 것이다. 

 

▲  송요찬과 박정희...자료사진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4월 20일 송요찬은 경무대를 방문 이승만과 독대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군대를 동원, 시위대에 발포하는 것을 상의한다. 총장 집무실로 돌아 온 송요찬,  유혈진압을 시도하려 했으나 좌절했다. 당시 군부 실력자인 최경록 장군이 발포명령을 반대하여 실행하지 못했다. 4.19는 성공했으며 이승만은 하야했다.

 

송요찬은 4.19 이후 민간정부가 들어서면 체포될 위험에 처할 것으로 인식, 1960년 5월 총모총장직과 서울지구 계엄사령관 직을 사퇴하고 군복을 벗은 뒤,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1년 후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감행했다.

 

미국에서 5·16 군사쿠데타 소식을 들은 그는 6월 귀국 후 쿠데타 세력에 합류했다. 그리고 곧바로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방위원장, 7월 외무부장관을 거쳐 내각수반이 된다. 이후 내각 수반으로서 최고회의의 모든 지시를 수행했다. 장도영을 반혁명분자로 숙청한 박정희가 군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장도영 대타로 필요했던 인물이 송요찬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가 내각 수반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낼 당시 사전 창당을 진행하던 공화당 세력이 저지른 4대 의혹사건 중 하나인 증권파동이 발생했으며 이 때문에 최고회의와 갈등했다. 이후 최고회의의 모든 직위를 사퇴한 뒤 동아일보에 박정희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하고 최고회의 의장 사퇴를 촉구하는 글을 발표하여 구속되었다.

    

다시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은 27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일부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역사 왜곡이나 미화가 있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지만 그런 교과서가 나오는 것은 저부터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집필되지도 않은 교과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두고 더 이상 왜곡과 혼란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물러설 뜻이 없음이 명백하다.

 

더 나아가 그는 "제가 추진하는 비정상의 정상화는 사회 곳곳의 관행화 된 잘못과 폐습을 바로잡아 기본이 바로 선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라며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역사교육 정상화도 미래의 주역인 우리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비정상의 정상화...보는 관점에 따라 정상도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이 역사다. 따라서 그가 바로잡겠다고 하는 비정상은 다른 사람에겐 정상일 수 있다. 때문에 역사교과서야말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여러 권을 발간 취사선택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는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고 주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도 역사교육을 정상화시키는 것은 당연한 과제이자 우리세대의 사명"이라면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무엇을 바로잡아야 되는지에 대한 기준은 오로지 자신들 정파가 정하겠다는 오만이다.

    

그 오만이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통해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정통성을 심어줄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를 위해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주역들도 필요하다면 홍위병을 이용 저격하고 버린다.

 

이런 대통령에 대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운 김종인은 “판단 미스였다. 국민들에게 미안하다”고 고백했다. 이상돈은 “국민들에게 석고대죄를 하자”고 제안했으며 유승민은 “국가 운영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대통령에게도 마이너스”라고 말했다.

 

▲  황우여 교욱부총리가 새누리당  대표일 당시 경기 회성갑 보궐선거 공천을 받은 서청원 당시 후보...이때만 해도 황우여는 친박계의 실질적 리더로 감히 김태흠 등이 넘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 뉴스화면 캡쳐  

 

그래도 이들은 갈 것이다. 실패하는 길임을 알면서도 일시적 성공이 성공인 것으로 착각, 국정화를 밀어붙일 것이다. 성공한 역사 쿠데타가 아니라 실패한 대통령의 길로 이끄는 실패한 역사 쿠데타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수많은 반혁명분자를 만들고 숙청하면서 쿠데타를 ‘혁명으로 치환했으나 한 세기가 가기 전에 ’군사반란‘이었음은 부인할 수 진실이 되었다.

 

그래서  이를 다시 되돌리려고 역사 쿠데타를 하는 대통령...퇴임 후 그는 역대 가장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오늘 그의 국회연설과 새누리당 김무성의 발언을 들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선친인 다까기 마사오와 가네다 류슈의 길로 가는 것 같아 장래가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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