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대한정통사(24)-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제도 도입 ; 신식군대와 연무공원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10/27 [11:58]

대한정통사(24)-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제도 도입 ; 신식군대와 연무공원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5/10/27 [11:58]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1945년 8.15 이후 한국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한국 근현대 역사서들이 한우충동(汗牛充棟)할 정도에 이르건만, 민족정통성의 시각에서 집필된 것은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근현대 관련 역사서는 물론이고, 논문들의 대부분도 정통성의 맥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일종의 '개화사관(開化史觀)'이라고나 할만한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한 민족의 존립근거를 제시해 주는 역사적 정통성을 떠나서 그 민족의 역사적 흐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할 때,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대단히 심각할 수도 있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정통성에 대한 민족구성원들간의 의견차이나 충돌로 인하여 민족적 구심력이 깨어지고, 민족분열과 허무주의적인 민족도덕성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현대사가 스스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증명을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서문 중에서]

 

부국강병의 길


1. 신식군대 양성


  개항이후 고종과 조선정부가 당면한 과제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국방력의 강화였다. 당대 세계의 최강으로 알고 있던 청국의 군사력이 서양 제국주의 열강에 비할 때 크게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고, 두 번에 걸친 양요를 물리치긴 했어도 열강이 언제까지나 그처럼 소규모의 침략에만 그치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더구나 서양으로부터 새로운 군사기술을 도입한 일본이 이미 강화침략에서 보여준 바와 같은 막강한 무력을 보유하게 됨에 따라서 서양보다도 일본의 침략야욕에 한시바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고종은 그에 따라서 우선 서양기술을 대거 도입하고 있는 가까운 나라들(즉 청국과 일본)의 동향을 살피고, 그들의 개량된 군사적 기술부터 배워야겠다는 강한 동기에서 사절단들을 파견하였다. 서1881년 1월에는 신진청년관료들과 기술자 등이 포함된 신사유람단 40여명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정치제도 및 군사시설 등을 시찰토록 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38명의 학도(學徒)와 장인(匠人)들을 청국에 파견하여 1년여간 무기제조 및 군사조련법 등을 습득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한 후 서울에 군기제조를 위한 소규모의 기기국(機器局)을 설치하여 무기제조에 종사토록 했다.


  강화불평등조약 체결시 일본전권대사인 흑전청융(黑田淸隆)은 귀국할 때 산포(山砲) 1문과 그 탄약 2,000발및 육연발단총 1정과 그 탄약 100발, 그리고 칠연발총 두 종류와 그 탄약 200발을 고종임금에게 바친 바 있다. 그리고 서1880년 12월 2일에는 일본공사 화방의질이 일본에서 발명한 촌전(村田)총 10정과 그 탄약  약간을 바치고 사격시범을 보이며 일제무기의 우수성을 과시했다. 화방은 서1882년 4월 13일에 조선세자의 관혼(冠婚)에 대한 선물로 작은 기선 한 척과 산포 2문을 헌납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김 홍집등에 대한 끈질긴 권유작업을 통하여 그 전 해인 서1881년 4월 12일에 일본군 소위인 굴본예조(堀本禮造)를 조선군 조련교사로 채용시키기도 했으니, 그에 따라서 일본식 신식군대 즉 왜별기(倭別技)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부국강병의 열망에 불타던 고종은 일본으로부터 구식양총(洋銃) 2,000여정을 구입하고 신식군대인 왜별기에 대하여 특별히 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왜별기에 대한 특별우대는 임오군란의 한 요인이 되었고, 군란과정에서 굴본예조 등이 일본공사관을 지키다가 살해당하는 등 왜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고종은 유능한 청소년들을 서양식 군사학교가 있는 명치일본에 유학보내어 조선인 사관을 양성하기로 하고, 서1883년 초에 14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일본육군학교에 보냈다.


  그와 함께 서1883년 10월 16일에는 고종이 미국의 주한초대공사로 부임한 후트를 단독으로 접견하면서 미국정부에서 외교고문과 군사고문을 보내주면 모두 참판에 임명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불평등조약을 강행한 일본을 위시하여 그밖에 다른 서양열강보다 훨씬 신사적으로 비친 미국에 대한 기대가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과 후트공사의 기대와는 달리 정작 미국 측에서는 처음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 편, 일본에 유학갔던 소년사관들은 다음 해에 귀국한 후 고종의 뜻과는 달리 갑신란의 행동대(行動隊)로서 반역에 참여했으므로, 고종은 더 이상 일본인이나 일본에서 교육받은 생도들을 신용할 수가 없었다. 후트공사 또한 미국에서 군사 및 외교고문들을 초빙하면 조선에서의 미국 국익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고종의 독촉이 있을 때마다 미국정부에 간청하는 한 편, 가장 적합한 군사고문 대상자로 떠오른 슈펠트제독에게도 직접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정부와 슈펠트제독 모두 이 일에 큰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곤란하게 된 후트공사는 다른 군인이라도 곧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국정부측에서는 '강구해 보겠다'는 회답만 왔을 뿐이었다. 고종과 후트 양측이 모두 실망하고 있는 가운데 서1885년 2월에는 후트대신 훌크가 대리공사로 취임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했다.


  같은 서1885년 2월에 청일 양국간에 갑신란의 마무리를 위한 천진조약이 체결되어 양국병력이 조선에서 철병하고 양국의 군사교관도 파견 못하도록 규정되면서, 청일 양국 측에서도 조선에 차라리 미국의 군사교관이 조선군의 조련을 맡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즉, 임오군란이후 쫓겨난 일본교관 대신 조선군의 훈련을 맡아 왔던 청국 측에서는 조선군이 빨리 강한 신식 군대로 발전해서 일본의 침투에 방패역할을 해 줄 수 있기를 바랬고, 일본은 일본대로 어차피 저들이 조선군 조련을 맡지 못할 바에는 조선에 대해 별다른 영토적 야욕이 없는(따라서 저들과 나중에 충돌할 염려가 없는) 미국이 맡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국 국무장관은 주일미국공사 빙엄을 통해서 미국국회에서 '현역군인은 외국에 파견할 수 없다는 결의안이 통과되었으나, 퇴역군인이라도 좋다면 보내 줄 수 있다'는 회답을 훌크에게 보냈다.


  당시 갑신란을 전후한 조선의 정세는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갑신란을 빌미로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진주한 가운데 청일간에 전쟁이 임박했다는 설이 분분히 나도는 등 불안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미국교관의 초빙이 지지부진한 터이라 고종과 외교협판 목인덕은 현실적으로 청일 양국의 세력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러시아라고 판단하고, 러시아황제에게 밀서를 보내는 등 긴밀한 교섭을 시작하여 마침내 목인덕을 주일러시아공사 다비도프와 교섭케 했다.


  그러나 비밀교섭의 내용이 일본측에 알려지고 이어서 러시아를 견제해 오던 영국 측에도 알려지자, 영국측은 서1885년 3월 1일(음력)에 아무런 사전 협의없이 남해의 요충지인 거문도를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청일양국은 러시아에 군사교관을 요청한 조선정부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했다. 러시아의 조선침투에 대해서는 청·일·영 세 나라가 공통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변명이 궁해진 조선정부는 '군사교관은 이미 미국에 교섭중이므로, 새삼스럽게 러시아교관을 초빙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그처럼 꼬인 채 묘하게 진행되어 가자 미국교관 초빙은 더욱 급박한 문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청일 양국까지도 훌크를 방문해서 독촉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측으로부터는 여전히 확실한 조처가 없는 가운데 천진조약이 조인되고 조선에는 일시적인 힘의 공백상태가 초래되었으나, 그것은 불안한 평온이었다. 그리고 목인덕은 러시아와의 밀약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말았는데, 그의 후임으로는 미국인 데니가 초빙되었다.


  서1886년 6월에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일본으로 요양떠났던 훌크가 3개월만에 되돌아오자마자 고종은 그를 불러 다시 군사교관의 초빙을 독촉했다. 이번에는 조선왕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미국인 의사 알렌도 적극 협력해서 추진했는데, 그는 때마침 조선을 방문한 슈펠트제독에게 강력히 권유했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종주권 장악을 기도하고 있던 원세개가 그와 반대 입장에서 대립하고 있던 슈펠트의 부임을 방해했기때문에 성사되지는 못했다. 더구나 훌크마저도 갑신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으므로 고종의 전폭적인 신임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훌크는 결국 조선을 떠나게 되었고, 서1886년 12월에 북경주재 미국공사관 서기관이었던 록힐이 그의 후임으로서 임시대리공사로 부임해 왔다. 그는 4개월 정도밖에 머물지 못했으나 군사교관 파견의 중요함을 알고 본국정부와 본격적인 교섭을 추진하여 상당한 진척을 이루었다. 록힐을 이어서 서1887년 4월에 취임한 딘스모어 또한 판리공사 겸 총영사로서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서1887년 10월에는 4년여에 걸쳤던 오랜 교섭의 종결을 볼 수 있었으며, 마침내 그 다음 해인 서1888년 4월에는 다이준장 등 4명의 교관이 조선에 부임하게 되었다.

 

2. 연무공원(鍊武公院)


  서1888년 1월(양력)부터 이미 고종은 교관들이 부임하기 전에 모든 훈련준비를 갖춰 놓도록 하고, 또한 근대식 훈련받을 우수한 학생들을 천거하도록 명했다. 그에 따라서 연무공원(鍊武公院)이 설치되었고, 그 때까지 복잡하게 변천해 온 군제(軍制)를 미국 교관들의 의견에 따라서 완전히 개혁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조선군의 전력강화와 사관생도들의 실전에 대비한 훈련에 충당하기 위하여 비교적 많은 무기들이 도입되었다. 이 때 무기구입에 관련해서 각국 공사관과 무기상인들은 활발한 판촉전을 펼쳤는데, 무기상들의 과대한 선전과 함께 막대한 양의 각국 무기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바람에 훈련의 통일을 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빈약한 국가재정에 비해볼 때 조선정부로서는 엄청난 국방비를 지불한 셈이었으나, 조선으로서는 자주국방력 강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없는 돈이 갑자기 생길 수도 없었기 때문에 고빙계약기간 동안 지급할 봉급 등 미군교관들에 대한 처우에 대단히 곤란을 겪게되어 다소간의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처럼 교관들에 대한 만성적인 봉급체불 등으로 어렵게 운영되던 연무공원은 국방예산상의 난맥상으로 인해서 4명의 교관을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동학민란이 벌어지던 서1894년에는 결국 다이장군 한 사람만 교관으로 남아서 연무공원과 친위부대의 훈련을 담당하게 되었다. 민란이 일어나자 미국교관들이 훈련시킨 친위장위영(親衛壯衛營)의 정예병력이 파견되었으나, 동족을 상대로 하는 전투에 사기가 오를 리가 만무했기 때문에 그리 큰 성과는 거둘 수 없었다. 얼마 후에는 동학민란 진압을 명분으로 불법침입한 왜군이 경복궁을 장악하여 조선정부를 유린함에 따라서 그동안 힘들여 훈련받았던 정예병들은 졸지에 무장해제를 당하고 말았으며, 모든 무기는 왜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마는 사태마저 벌어졌다. 그리고 왜구들이 강제한 왜식 군사체제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같은 해 12월에는 어렵사리 설치된 지 6년만에 연무공원도 해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열국 공사관이 엄연히 밀집해 있던 서울에서 백주 대낮에 궁성을 점거한 왜군의 폭거에 대해서 각국 공사 및 사절들은 이의를 제기하게 되었다. 조선정부로서도 7월말부터 한달여간이나 '군대없는 나라'라는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해서 구미 각국 공사들의 측면지원을 받으면서 일본측에 조선군의 재무장을 요구하였으며, 일본측에서도 별 수 없이 그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서 다이장군은 다시 조선군의 훈련을 맡게 되었으나, 그것도 일단 궁성호위대만을 대상으로 하도록 되었다. 다이는 왜군이 궁성에서 물러날 때 되돌려 준 대부분 고장나고 녹쓸은 무기들을 수리하고, 경복궁 연못 속에 버리고 간 무기들까지도 건져내어 수선해서 쓰는 등 병력강화에 노력했다. 왜구들은 그러한 조선 측에 대응해서 자신들의 기반을 구축하려고 훈련대를 설치하여, 일본공사관의 무관을 교관으로 삼아 조선군을 훈련시켰으며, 삼국간섭을 전후로는 고종 등 조선정부측과 구미열강과의 연락이나 교섭을 막으려고 훈련대로 하여금 궁성을 호위하는 전략으로 나왔다.


  그에 대해서 고종은 친러시아 정책을 펴면서 훈련대의 해산을 기도하였으며, 국제여론과 고종의 강경한 태도로 궁지에 몰린 왜구들은 마침내 친로파의 우두머리라고 인식해 온 민황후를 참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말았다. 왜구들이 훈련대를 앞세운 일본낭인(폭력배)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에 침입했을 때, 돌발사태에 놀란 다이장군과 호위대를 이끌고 대항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순식간에 민황후는 참살당했으며, 고종은 왜구들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다이장군은 왜구들에 의하여 언제 살해당할 지 알 수 없는 고종을 구하고자 서1895년 11월 28일 밤에 친위대 장교 등과 함께 거사를 감행하려 했으나, 친일파였던 친위대 2대대장 이진호가 배신하는 바람에 실패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다음 해인 서1896년 2월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한 후인 동년 4월에는 조선에 온 그의 아들과 함께 왕실의 농원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물러났고, 서1898년에는 파란만장했던 조선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다.


  아관파천 후에 고종은 자연스럽게 러시아교관을 채용코저 하였으며, 그에 따라서 서1896년 10월에는 러시아의 푸챠타(Putiata)대령이 장교 3명과 하사관 10명을 인솔하고 교관으로 부임해 왔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당시 갑신란의 주역이었던 필립제선(서재필)이 추진하여 설립되었던 독립협회에서 맹렬히 비난하며 러시아교관의 철수를 주장함에 따라서, 정부에서는 18개월만인 서1898 4월에는 그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남은 방법은 외국교관이 아닌 조선인 교관이 훈련을 맡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고종은 연무공원의 창설때 관리조교로 임명되어 다이등 교관을 도왔던 이 학균을 초대 교장에 임명하여 다이에게서 배운 학교운영법을 그대로 옮겨 시행했고, 다이가 조선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던 작전법과 훈련규칙등을 조선장교가 완성하여 조선군의 훈련에 많이 적용했다. 고종은 마침내 모든 외국교관들과 군사고문들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방침을 세우고 자주국방의 실현을 위한 모든 방안을 강구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지리산 노고단에 핀 진달래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