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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19)-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고종의 친위정권 강화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09/24 [14:17]

대한정통사(19)-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고종의 친위정권 강화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5/09/24 [14:17]
▲ 문화재청 경복궁관리소에서 지난 2008년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3일간 고종 임금님의 41세 생일잔치인 “망오순(41세) 진찬연”을 경복궁 근정전에서 재현하였던 사진.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1945년 8.15 이후 한국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한국 근현대 역사서들이 한우충동(汗牛充棟)할 정도에 이르건만, 민족정통성의 시각에서 집필된 것은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근현대 관련 역사서는 물론이고, 논문들의 대부분도 정통성의 맥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일종의 '개화사관(開化史觀)'이라고나 할만한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한 민족의 존립근거를 제시해 주는 역사적 정통성을 떠나서 그 민족의 역사적 흐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할 때,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대단히 심각할 수도 있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정통성에 대한 민족구성원들간의 의견차이나 충돌로 인하여 민족적 구심력이 깨어지고, 민족분열과 허무주의적인 민족도덕성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현대사가 스스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증명을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서문 중에서]

 

4. 고종의 친위정권 강화(정부기구개편)


  고종은 갑신란 타도이후 청국측의 내정간섭이 심해짐에 따라서 자신의 자주노선이 침해당할 가능성이 커지자, 서1885년 5월 25일에 그에 대한 대항책으로 영의정 심 순택과의 단독회동을 통해서 전격적으로 궐내에 내무부를 설치했다. 내무부의 기능은 군국사무와 궁내사무를 겸하는 근시(近侍)기구의 성격으로서, 청국의 간섭이 심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담당의 외교업무(외교관 파견등)도 관장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내무부에는 고종과 호흡이 잘 맞고 고종의 충실한 친위세력이었던 민씨척족 세력이 대거 포진했다.


  또한 고종은 새로이 추진하던 근대식문물 관장부서에도 민씨척족으로 하여금 주요부서들을 담당케 함으로써 확고하게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고자 했다. 우선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경제정책의 기본을 이루는 통화관리 부서에는 서1885년에 민 태호를 전환국 관리(管理)로 임명했고, 서1885년 5월에는 민 주호를 전환국 위원으로 임명했으며, 서1885년 8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는 민 영환에게 전환국 총판을 맡겼고, 서1886년 7월에는 민 성식을 전환국 위원으로 임명했다. 즉, 전환국을 설치한 때부터 전환국의 안정적 운영기인 서1880년대 후반까지 전환국 관리직을 민씨 친위세력에 맡겨 통화정책을 운용한 것이다. 또한 서1887년에는 민 영익을 광무국 초대 총판으로 임명하여, 국부증대를 위한 지하자원 개발을 추진토록 했다.


  고종은 부국강병책을 담당하는 부서에도 친위세력을 대거 기용했다. 서1884년에는 민 영익에게, 서1886년 6월에는 민 영환에게 신무기 개발과 생산을 담당하는 기기국 총판을 맡게 했고, 다시 서1887년 6월에는 민 영익을 기기국 유사당상(有司堂上;즉, 총책임자)에 임명했다. 그리고 서1888년 6월에는 민 영익,한 규설,이 종건 등 세 영사(營使)를 연무공원 운영위원으로 임명하여 신식군대의 양성을 도모했다.


  고종은 동도서기 원칙에 입각하여 서양의 앞선 상공업 기술을 국민들이 습득할 수 있는 근대교육을 담당한 부서도 친위세력에게 맡겼다. 그에 따라서 서1886년 9월에는 민 종묵과 민 응식을 육영공원 판리사무에 임명했고, 서1889년 3월에는 민 병석이 같은 직책을 이어 받아 신지식 습득에 힘썼다.


  고종은 전반적으로 세계사적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명치일본의 야욕을 견제하고, 열강의 세력균형속에서 조선의 존립을 도모했으나, 신설 부서에 있어서의 전문성이 부족했던 사실은 당시의 실정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고종으로서는 여하간에 부국강병을 한시바삐 이루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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