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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18)-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갑신란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09/19 [09:21]

대한정통사(18)-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갑신란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5/09/19 [09:21]

 

▲ 김옥균을 참수한 후 '대역부도옥균'으로 알리고 있다.     © 안재세 역사전문의원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1945년 8.15 이후 한국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한국 근현대 역사서들이 한우충동(汗牛充棟)할 정도에 이르건만, 민족정통성의 시각에서 집필된 것은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근현대 관련 역사서는 물론이고, 논문들의 대부분도 정통성의 맥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일종의 '개화사관(開化史觀)'이라고나 할만한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한 민족의 존립근거를 제시해 주는 역사적 정통성을 떠나서 그 민족의 역사적 흐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할 때,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대단히 심각할 수도 있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정통성에 대한 민족구성원들간의 의견차이나 충돌로 인하여 민족적 구심력이 깨어지고, 민족분열과 허무주의적인 민족도덕성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현대사가 스스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증명을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서문 중에서]

 

2. 갑신란


  동도서기적 경세관으로 조선의 부국강병을 추진한 고종의 의지와는 달리, 급진적인 개화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정권을 탈취하고자 기도했다. 왜인들은 그러한 개화당 인물들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저들 나름대로의 계획을 추진하는 데 개화당을 이용하고자 했으므로 두 음모집단간에는 계산이 맞아 떨어졌다. 왜인들은 저들에게 유리하게 조선에서의 공작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아직 명치일본 자신의 실력이 충실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선에 전면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아직 무모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일단 개화당이 친청적 대신들을 몰아낸 후 고종을 업고 친일정권을 구성할 수 있도록 암조(暗助)하기로 했다. 조선에서의 독점적 이권을 한시바삐 공고히 하려는 욕심에 조바심이 난 명치정부는 개화당과 함께 실로 엉성하기 짝이 없는 정권탈취 음모를 꾸며 갔다.


  임오란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일본에 보낸 수신사 박영효와 함께 도일한 김옥균은, 복택유길 등 일본국수주의 도당들로부터 조선의 정권을 탈취하여 친일정권을 세우도록 사주받았다. 음모정치의 귀재인 일본외무경 정상형은 김옥균에게 '조선정부의 국채차입위임장만 가지고 오면 정권탈취 쿠데타와 개혁에 필요한 자금 300만원을 지원해 주겠다'고 꾀었는데, 일본의 힘을 빌어서라도 청국의 고압적 자세로부터 벗어나길 원했던 김옥균으로서는 솔깃한 제의가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음모자들은 박영효가 귀국할 때 신문발행에 필요한 인원으로 위장한 일본의 정치깡패들을 딸려서 조선에 보냈으며, 쿠데타에 필요한 많은 무기들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비밀리에 조선으로 보냈다. 그리고 정권탈취에 필요하다면 서울주재 일본공사관 호위병력 수백명을 동원해 주겠다는 밀약도 맺어졌다.


  왜인들로부터 가능한 한 최대의 원조를 약속받은 개화당이 할 일은 거사 날짜를 정하는 일 뿐이었다. 한가지 더 바랄 것이 있다면 정변을 일으킬 때 청국측에서 신속히 대응할 수 없는 여건이 조성되었으면 하는 점이었는데, 프랑스와 청국간의 분쟁이 발생함으로써 그 기회도 머지않아 실제로 다가 왔다. 4217년(서1884)에 베트남의 종주권을 둘러 싸고 벌어진 청국과 프랑스간의 전쟁에서 청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그에 고무된 명치정부는 김옥균 등의 내부적 호응을 얻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조선에서 청국세력을 몰아내고 친일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고종을 위시한 조선조정의 명치일본에 대한 경계심은 대단했으므로, 하급관리에 불과한 김옥균 등이 고종을 움직여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풀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간교한 왜인들은 '양국간 우호를 돈독히 하고자 한다'는 명분으로 제물포조약에 명시되었던 배상금 중 미지불된 40만원을 받지 않겠다는 명치정부측의 통보를 죽첨공사를 통해 조선 측에 보냈다. 재정난으로 크게 곤했던 고종을 위시한 조선인들은 당연히 그 조치를 환영했다. 그런 조처가 일본의 미끼였음을 알 수 없었던 젊은 임금 고종은, 배상금 문제의 해결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여겨진 친일파 김옥균 등을 보다 더 호의적으로 대했 주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명치정부의 치밀한 친일정권 수립 음모 각본에 따른 것이었을 뿐이었다.


  개화당이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특히 신경을 써야만 했던 것은 병력동원 문제었다. 세력이 당당한 친청파 대신들을 살해하고, 정부군의 반격을 막아 내고, 혹시 있을 지도 모를 청군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 내려면 무엇보다도 충분한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음모자들은 수도방위 병력의 성격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하여 전영(前營)의 군사들을 포섭하기로 했다. 전영은 왜별기의 교관이던 굴본이 훈련시켰던 80여명을 포함한 50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개화당의 일파인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있을 때 훈련시켰던 군인들도 전영에 소속되어 있었고, 전영의 책임자인 한 규직도 개화당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중동원 능력이 취약한 개화당은 전영에 속해 있던 다수의 보부상과 혜상공국 좌사의 통령까지도 포섭하려 했다. 보부상이 수도방위군에 편입된 것은 서1881년에 재정파탄에 직면했던 정부에서 비교적 경비를 안 들이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편법에 의한 것이었다. 개화당은 애국심이 강한 반면에 저돌적인 실행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던 보부상의 지도자들을 감언이설로 꾀어 행동대로서 전면에 내세운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편 청불전쟁이 장기화되어 가자 명치정부측은 더욱 일을 서두르고자 했다. 왜족 음모자들은 개화당을 부추겨 시급히 '혁명'을 일으키도록 고무하여, 같은 해 10월 17일로 예정되어 있는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에 거사를 결행하기로 모의했다. 거사가 시작되면 왜구들이 합세하여 친청파 대신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일전에 호산군관학교에 입학시킨 사관생도 40명도 물론 이에 가담키로 하여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갔다. 그러나 조선 최초의 근대적 국제기구로서의 관심이 모아졌던 우정국 낙성식때 친청파를 몰살하려던 계획은, 자객들이 민 영익에게 중상을 입히고 뭇 외국사절들을 크게 놀라게 하는 이외에 별다른 성과없이 엉성한 쿠데타 계획의 난맥상만 드러내고 말았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 '선진국'들을 반년에 걸쳐서 시찰하고 돌아 온 민 영익이 주도하여 설립한 우정국은, 세계 각국과의 교류를 원활히 추진하고 각국과 각종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최신의 국제교류 기구였다. 그처럼 뜻깊은 우정국의 출범을 축하하러 온 서양제국들과 청국등 당시의 막강한 모든 열강의 대표사절들이 참석하여 모처럼 화기애애한 가운데 펼쳐진 축하연 자리를 습격한 개화당은 민 영익부터 암살하려 했으나, 민 영익은 중상을 입은 채 목인덕의 헌신적 노력으로 목숨만은 건지게 되었던 것이다.


  개화당은 궁궐에 난입하여 고종임금을 호위하면서 마치 변란으로부터 임금을 보호하는 충신들인 것처럼 꾸몄다. 김옥균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대궐로 질주하는 도중에 니동 입구에서 김동균과 이석이 등이 오래 기다리고 있었고, 신복모는 장사(사관생도) 40명을 4개소에 숨겨두고 있었다. 금호문에 이르니 문이 이미 잠겨 있었으므로 수문(守門)군사를 불러 문을 열라 하니 군사가 답하기를, "열쇠가 정원(政院)에 있으므로 임의로 열지 못한다."고 하였다. 나는 큰 소리로, "지금 변란이 일어났으니 빨리 문을 열라."고 외치니 미리 약속한 수문장이 나의 음성을 알아 듣고 문을 열었다. 우리들이 나아가매 달이 밝아 낮과 같은 고요한 궁정에는 순찰하는 군졸들이 보일 뿐 고요하고 사람이 없었다.


  숙장문 안에 이르러서 동균과 석이에게 인정전의 계단아래 매장해 둔 폭약을 30분 후에 터뜨리라고 명하고 바로 협양문에 도달하니 파수무감(把守武監)이 큰 소리로 정지하라고 명했다. 나는 큰 소리로   


 "너희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감히 나를 저지하느냐?"


하고 문안으로 난입하니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그 사유를 물었으나, 나는 답하지 않고 급히 합문 밖에 당도하니 윤경순(공모자)이 병졸 50명을 인솔하여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였다...임금께서 나의 음성을 알아 들으시고 나를 불러,


 "무슨 사고가 생겼느냐?"


고 물으시므로 나는 박 영효, 서 광범과 함께 침실에 들어 가서 임금께,


 "우정국에 변이 일어나 사세가 급하오니 잠깐 정전(正殿)을 피하시옵소서."하니 곤전(坤殿:민중전)께서


 "이 변란은 청국과 일본 중 어느 쪽이 일으켰느냐?"


고 물으시매 내가 답하기 전에 동북쪽에서 폭음이 일어 나서 천지가 진동하니 왕가일동이 크게 놀라서 가만히 편전후문으로 빠져 나가므로 나는 급히 이규완등을 불러 호위하라 명하였다. 나는 임금께,

 "차제에 일본병이 와서 호위하면 가히 만전(萬全)할 것입니다."


하고 상주하니 임금께서


 "그렇게 하라."


하시니 곤전께서


 "일본병만 청하고 청국병은 어떻게 하느냐?"


하시므로 나는 급히


 "청국병도 오도록 하겠읍니다."하였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쿠데타를 일으킨 개화당은 고종을 호위(?)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조 영하 등 친청파 대신들을 고종이 보는 앞에서 참살하는 등 난장판을 벌였다. 당시의 참담한 상황을 매천야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서재필은 생도들을 이끌고 칼을 휘두르며 내려치니 차례차례 모두 죽었고, 몸 전체가 많이 떨어져 나갔다. 왕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 할 뿐이었다...유 재현이 크게 꾸짖어, '너희 무리들은 모두 교목귀경(喬木貴卿)들이 아니냐? 어찌 부족함을 걱정해서 천고에 없었던 미치광이 반역을 일으키느냐!'하니, 김옥균은 칼을 빼어 후려치니 층계 아래로 떨어졌고, 이것을 본 왕은 (분노와 두려움으로) 떨었다. 김옥균은 옥새와 옥로를 들추어 내어 박영효에게 주면서, '편할대로 왕노릇을 하시오.'하였다. 반란 주모자들은 왕을 해치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한다."


  개화당은 또한 대원군의 측근세력과 연합정부를 꾸미려 했고, 왜족들의 원조에 힘입어 역사상 처음 보는 '청소년 내각'을 만들어 '새나라'를 만들 꿈에 부풀어 있었으나, 그것은 조선의 진정한 개혁과 발전은 꿈도 꾸지 않는 왜족들의 농간에 의한 자중지란에 불과했다. 저들은 소위 갑신정강(政綱)이라는 저들의 개혁정책 실시계획을 표명하고 정권장악을 기정사실화하려고 했으나, 정강 자체도 다분히 과시적이거나 자기모순적인 내용이 많아서 쉽사리 국민적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쿠데타는 민씨정권보다 진보적 성격의 정변이 아닌, 명치일본의 후원을 기대한 개화당이 정권장악만을 최우선적 목표로 삼은 것으로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명분과 진정한 개혁실세의 확보에 있어서 모두 실패한 개화당의 쿠데타는 불과 3일만에 원 세개가 이끄는 청국군과 조선군의 반격으로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개화당을 지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개화당이 왜구들과 한 패가 되어 대신들을 참살하고 임금을 위험지경에 빠지게 한 사실을 알고 노한 군중은, 무리를 지어 진고개에 있는 왜군본부를 습격하고 시내에 거주하던 왜인들까지 살해하였다. 조선에서 활개치고 다니던 왜인들은 하나같이 날강도같은 무뢰배의 무리들로서 조선인들에게 행패를 일삼아서 원성 자자했던 때문이었다. 개화당과 왜공사관원들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왜열도로 탈주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고종은 왜족들을 더욱 크게 경계하게 되었고, 왜란에 앞장섰던 김옥균,서재필,박영효 등 친일적 개화당 일파에 대하여는 최대한의 징벌을 단행했다.

 

3. 갑신란의 여파와 개화당의 족적


  황당하기 짝이 없는 친일적 쿠데타를 졸지에 겪은 조선정부는 변란을 일으킨 친일파들과 왜공사를 위시한 일제불한당들에 대한 책임을 왜국정부에 엄중하게 항의하였다. 일제외무성에서는 그 사건의 법률적인 관계를 이등박문의 법률고문관이며 태정대서기관인 이동(伊東己代治:이또)로 하여금 검토하도록 한 결과 이등은 다음과 같이 연구결과를 보고하였다.


  1. 일본공사가 조선국 외무교섭아문과 연락이나 교섭함이 없이 국왕의 사적위촉(私的委囑)에 의하여 직접 통하여 군대를 이끌고 궐내에 침입한 것은 국제공법상의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며, 또한 외국공사로서 그 직무상의 권한을 초월한 불법행위이다.


  2. 제물포조약 제5조에 의하여 조선국에 주둔하는 일본군대의 행동범위는 경비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일본공사가 그 군대를 이끌고 왕궁에 침입하였음은 국제조약에 위배한 행위이다.


  저들 나라의 최고 국제공법학자인 이등의 결론은 과연 왜족중에도 학문을 제대로 한 자가 하나 정도는 있음을 실감케 하였으나, 국제공법에 의거한 이등의 결론은 곧 묵살되었다. 그리고 저들이 주동이 되다시피하여 그처럼 뻔한 국제범죄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왜족들은 뻔뻔스럽게도 오히려 조선정부가 저들의 '선량한 국민(?)'들을 참살했다고 엉뚱한 트집을 잡고서는, 또다시 그 전가의 보도와도 같은 '전쟁위협'을 발악적으로 들먹이면서 기어코 한 번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겠다는 식으로 적반하장격의 궤변과 공갈을 늘어놓았다.


  왜족들이 그처럼 뱃장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하여 국력이 피폐해 진 청국이 조선에서 왜군과 또다른 전장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과, 은근히 왜족을 편들어 온 영국이 이번에도 틀림없이 저들을 편들어 줄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뱃장은 맞아 떨어지고 말았으니, 그나마 단 하나의 후원세력이 되어 줄 수 있는 청국측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조선정부로서는 세계최강국인 영국의 후원을 받는 일제를 단독으로 대적할 수 없다는 현실판단하에 할 수 없이 굴욕적인 조건의 한성늑약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기고만장해진 일제는 더 나아가서 청국에 대해서도 공격의 화살을 날렸다. 저들은,  

 
 "청국군이 일본공사관에 발포했으며, 청국군이 난민과 합세해서 일본인거류민을 살해했다."


고 순서가 맞지 않는 궤변을 늘어 놓으면서 '청국을 타도하자'는 일대 국민운동을 일으켰는데, 돼지머리를 긴 장대에 높이 끼워 달고 다니면서 청국인의 머리라고 외치며 청국과 전쟁할 것을 주장하는 등(이는 당시 대두되고 있던 현양사등 극우파를 이용한 소행의 가능성이 농후함), 당시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루면서 남양함대가 전멸되어 국가적 위기를 맞은 청국정부를 극히 곤란한 지경으로 몰아 갔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명치일본 자체의 역량만으로는 청국과 생사를 건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여건이 안되었으므로, 왜족들은 저들에게 극히 호의적인 북경주재 영국주차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Harry Parkes)를 통하여 모략공작을 시도했다.


  갑신왜란이후 왜족의 유일한 목표는 조선에서 청국의 영향력을 철저히 배제하자는 것이었고, 그 첫 순서로 조선으로부터 청국군과 왜군을 동시에 무조건 철수할 수 있도록 하려 하였다. 명치정부로부터 그러한 의사를 전달받은 파크스는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협상을 권했는데, 곤경에 빠져 있던 이홍장도 그 제안에 동의함에 따라서 청일간에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으로부터의 양국군대 철수를 주요 내용으로 한 천진조약에 의하여 청국은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우월했던 국가적 지위를 상실하고 왜국과 동등한 위치로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왜족의 야욕을 부추김으로써 이윽고 10여년 후에는 동아시아에 일대변란을 일으키게 되는 청일전쟁의 단서를 만들어 놓은 격이 되고 말았다.


  왜족들과 모의하여 갑신란의 주역을 맡았던 김옥균등은 왜공사 일행과 함께 왜열도로 건너 갔다. 그러나 왜족들은 김옥균의 일행을 냉대하였고 외무경 정상형은 면회조차 거절하는 것이었다. 우여곡절끝에 간신히 면회가 이루어지자 김 옥균등은 그간의 경과를 설명하고 끝까지 도와주기를 간청했으나, 정상형은 냉담하기 그지없게


 "일본은 지금 청국과 전쟁을 할 수 없는 형편이니 그대들은 자활의 길을 강구하라."


고 하며 그들 일행에 대해서 더이상 신경쓰지 않으려는 속셈을 드러내었다. 갑신란 이후 이미 조선과 청국에 대해서 강압적인 수단을 총동원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어 낸 왜족들에게 있어서 개화당의 존재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것이었다.


  개화당이 왜열도에서 환대를 받으면 자기들이 국제적인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간교한 왜족들은, 환대는 커녕 하루빨리 그들을 왜열도에서 쫓아 버리려고 애썼다. 서재필은 정상형에게,


 "이것이 그대들의 무사도의 본색이냐? 우리는 그대들을 믿어 왔다. 그러나 오늘의 그대들은 우리들을 배신하고 우리들을 원치 않는다."


고 뒤늦게 크게 분개하며 따졌으나, 반역자들을 처단하려는 조선측 자객들의 위협에 직면하자 결국에 가서는 왜족들이 마련해 준 몇 푼의 여비를 받아 들고 서광범, 박영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왜족들은 김옥균에게만은 그 알량한 여비조차 마련해 주지 않았고, 따라서 김옥균은 왜열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헤매게 되었다. 왜족들은 배신을 밥먹듯하는 자기들을 김옥균이 불신하는 태도를 보이자 더이상 그를 이용해 먹을 수 없음을 간파하고, '사냥이 끝난 후에는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옛 고사처럼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희생양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작정해 버렸던 것이다.


  김옥균은 매우 비범한 인물이었기때문에 만일 그를 미국으로 보내면 반드시 세력을 다시 규합해서라도 이번에는 조선을 위하여 분골쇄신 일할 것으로 간주되었다. 왜인들을 깊이 불신하게 된 김옥균의 존재란 곧 왜족들이 조선에 대한 야욕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의 큰 장애가 될 뿐임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김옥균이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주선해 주기를 왜족들에게 간청했건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에게만은 어떠한 편의도 제공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정부와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할 조짐이 보이자 마침내 추방령을 내렸는데, 적수공권인 김옥균이 미국행 여비를 마련못하여 떠나지 못하자 이번에는 그를 체포해서, 극히 죄질이 나쁜 중죄인들만 보내는 유형지로 유명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태평양의 외딴 섬인 소립원군도(小笠原群島;오가사와라 군도)로 유배시켰다.


  왜족들은 김옥균을 조선정부에 인도하여 대역죄로 능지처참을 당할 경우 조선내에 있는 친일파들의 세력이 그 바람에 크게 위축될 것을 우려하였으므로, 고도에 유배시키는 것으로 외교적인 마찰만을 적당히 때우려 했던 것이며, 어차피 이용가치가 없어진 김옥균이 생존여건이 열악한 유배지에서 죽던 살던 알 바가 아니라는 속셈이었다. 왜족들의 숨김없는 본심은 김옥균이 알아서 혼자 빨리 죽어줬으면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한 왜족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이 2년간이나 열악한 아열대의 섬생활을 견디어 내자, 왜족들은 이번에는 혹한이 몰아치는 북해도로 유배지를 옮겨 버렸는데, 북해도 유배생활에서도 3년간이나 버텨내자 이번에는 작전을 바꿔서 유배 5년만인 4223년(서1890)에 석방조치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조선의 집권세력은 자객을 보내어 처단하려 했으나, 여러 동지들이 김옥균을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열도내에서는 처단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위계(僞計)를 써서 김옥균을 상해로 유인해 낸 다음에 상해에서 처단하기로 작전을 바꿨다. 그리하여 김옥균에게 접근한 자객 이 일식은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 와 동경에 머물고 있던 홍 종우등과 함께 김옥균을 방문하여, 


 "조선의 국정진흥을 위해서는 러시아와 연합하거나 프랑스와 친교를 맺거나 하는 방법을 취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이 홍장과 격의없이 의견을 교환하는 게 필요하다."


고 권하였다. 김옥균은 그들을 의심하지 않고 이홍장과 만나 시국을 의논하려는 일념으로 마침내 상해로 떠났으나, 상해에서 여장을 푼 다음 날 자객 홍 종우에게 총을 맞고 한많은 풍운아의 일생을 허무하게 끝마치고 말았다. 김옥균의 시체는 조선정부에 인도된 후 곧 능지처참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잘린 머리는 전국을 돌며 그가 사랑하던 조선민중의 한낱 구경거리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김옥균을 이용해 먹을 대로 다 이용한 다음 그를 죽음으로 내 몰았던 왜족들은, 김옥균이 그들 소원대로 죽음을 맞자 이번에는 동경에서 국회의원등 수천명이 모인 가운데 추도식을 치르는 등 법석을 떨면서, 얼토당토 않게도 청국에 대한 국민적 적개심을 부추기며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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