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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17)-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개화당의 성장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09/14 [11:59]

대한정통사(17)-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개화당의 성장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5/09/14 [11:59]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1945년 8.15 이후 한국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한국 근현대 역사서들이 한우충동(汗牛充棟)할 정도에 이르건만, 민족정통성의 시각에서 집필된 것은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근현대 관련 역사서는 물론이고, 논문들의 대부분도 정통성의 맥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일종의 '개화사관(開化史觀)'이라고나 할만한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한 민족의 존립근거를 제시해 주는 역사적 정통성을 떠나서 그 민족의 역사적 흐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할 때,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대단히 심각할 수도 있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정통성에 대한 민족구성원들간의 의견차이나 충돌로 인하여 민족적 구심력이 깨어지고, 민족분열과 허무주의적인 민족도덕성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현대사가 스스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증명을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서문 중에서]

 

  제 2 장  내우외환(內憂外患)

 

        제 1 편 십년파란(波瀾)


1. 개화당의 성장


  고종은 임오조칙으로 자신의 대외적 노선을 전 국민에게 명확히 밝히며 개방개혁정책에 더욱 몰두했다. 특히 너무 고지식하게 위정척사(衛正斥邪)만을 고수하여 고종의 정책에 비협조적인 노선비들보다, 새로운 문화적 충격을 보다 더 유연하게 받아 들일 용의가 있던 젊은 선비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하면서, 그들과 힘을 합하여 국운을 개척하려 했다. 임오조칙 발표로 고종의 굳은 결심을 알게 된 수구적 사림선비들도 무조건 국제적 교류에 반대하는 대신, 난세를 이끌어 가는 고종의 영도력을 관망하며 국정에 대해서는 선택적 비판만을 하려는 분위기로 점차 바뀌어 갔다.


  사회적 분위기가 일단 국제교류를 피치 못할 현실로 받아 들이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자, 이번에는 보다 빨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성급한 야망에 불타는 일단의 젊은 무리가 나타났다. 이른바 '개화당'으로 불리운 급진적 개화파가 바로 그들이었다.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이 중심이 된 개화당은 십대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다. 그들은 조국인 조선이 처한 국가파탄적 위기를 조속히 극복하고 약육강식의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강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포부가 문제될 것은 없었으나, 그 포부를 실현하려고 너무 초조하게 서둘렀던 데서 시행착오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고종의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실무담당자는 민 영익과 목인덕이었다. 특히 민 영익은 모든 공식적 외국방문등 외교정책상의 조선측 대표로서 활약했으며, 이십대의 젊은 고관으로서 열성을 다하여 고종이 표방한 동도서기적 개혁노선을 이끌어 갔다. 민 영익은 자신의 거처인 죽동(竹洞)의 사랑채에서 유능한 젊은이들을 규합해서 장차 함께 부국강병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들은 모두 서울 북촌(北村)의 명문거족 출신이기도 했으며 '개화파'로 불리웠다. 개화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었으나, 민 영익은 그 사회적 지위로 볼 때 개화파인 죽동 팔학사의 대표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같은 개화파이면서도 민 영익 등은 이른바 '친청개화파'로서 점진적 개혁론자였고, 김옥균 등은 이른바 '친일개화파'로서 급진적 개혁론자들이었다. 즉, 친일개화파 청년들은 고종의 대외개방정책의 기본사상인 동도서기와는 다른 급진적 개화사상을 키워가면서 당대의 청년실권자인 민 영익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급진개화파(이하 '개화당')의 형성에 불교계 인사들이 깊이 관여한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즉, 약 40여명의 개화당 중에서 30명 정도는 불교와 관련되어 있었다. 박규수,오경석,,유대치,탁정식,김정모,차홍식,이동인 등 개화당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인사들을 비롯하여, 개화당 중에서 삼십여세로 가장 나이가 많고 지도자 역할을 한 김옥균,서광범 등은 불교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이동인과 유대치의 행적은 대단히 모호한 점이 많았으며, 이들의 영향을 깊이 받은 김옥균은 서1870년대부터 이미 양반정치체제의 타파를 외쳤고, 서1880년대에 들어 와서는 '왕위세습제를 없애고 국민국가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출신이 명확하지 않은 이동인은 유대치에 의해 개화당 청년들에게 부각됐고,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김 홍집의 주선으로 민 영익과 만난 후 고종에게도 소개되었으나, 시종 수수께끼에 싸인 인물이었다.


  개화당의 급진적 개혁사상 형성과정은 특히 우려할 만한 요소가 많았다. 그들에게 가장 먼저 영향을 끼친 인물들은 박규수,오경석,유대치 등이었으나, 일본의 국권론자인 복택유길을 위시한 일본국수주의자들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즉, 교활한 일본국수주의자들은 임오란의 외교적 해결을 위하여 일본에 파견됐던 김옥균과 박영효 등을 매우 극진히 대접하면서, 양국간의 어려운 외교적 문제들을 뜻밖에도 대단히 쉽사리 양보까지 해 주는 등, 이들의 환심을 사서 저들의 앞잡이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왜족들의 환대에 크게 고무된 김옥균 등은 일본인들이 진실로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애써 줄 의향이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또한 왜족들은 그들을 당시 일본의 저명한 인본주의자(휴매니스트)이며 교육자로서 민간정치가였던 복택유길(福澤諭吉:후꾸자와)에게 접촉시켰는데, 복택은 그러한 알려진 명성과는 달리 완전히 침략적인 일본국수주의적 이론가였던 것이다. 개화당은 이 철두철미한 일본국수주의적 궤변가에게 설복당한 후 그를 위대한 스승정도로 알고 마침내 자진해서 복택의 충실한 제자노릇을 하게 되었다.


  사절단의 대표였던 박 영효는 귀국할 때 복택의 제자인 정상각오랑(井上角五郞:이노우에가꼬로,이하 '정상') 등 신문관계인 7명과 퇴역군인들인 검객들을 고빙해 왔다.  그리하여 박 영효는 고종임금께 상주하여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해서 한성순보를 발간하기 시작했으며, 유학생 40명을 호산(戶山:도야마)군관학교(왜열도의 육군소년학교)에 유학시켰고, 정상은 일제외무경이었던 정상형(井上馨)의 사설공사(私設公使)로서의 임무를 띄고 공작을 하게 되는 한 편 많은 일제 무기들을 몰래 반입하여 변란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성급한 개화당의 정변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고종이 직면한 가장 큰 난제는 제물포조약에 의한 막대한 배상금의 지불문제였다. 제물포조약의 근거가 된 임오란이 발생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강압적 개구 이후의 대일무역 역조에 따른 국고의 고갈에 원인이 있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엄청난 배상금까지 걸머지게 되었으니 문제는 심각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없던 재화가 마련될 리도 없었으니, 고종이 뜻하던 경제적 발전은 커녕 현상유지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임오란 이후 외부협판 목인덕이 부임하자마자 청국으로부터 차관을 얻어오려고 동분서주했으나, 청국 자신의 재정도 과히 넉넉치 못했으므로 큰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장 긴밀한 이웃이었기에 조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인 청국의 실정이 그러했으므로, 고종이 취할 수 있는 국고확충 방안은 두가지로 압축되었다. 즉, 가뜩이나 어려운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대폭 더 거두어 들이거나, 아니면 돈을 대량으로 찍어 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폭적인 세금인상은 그렇지 않아도 국제교류에 회의적인 대부분의 사림과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직접적이고도 전면적인 저항에 부딪치리라는 것이 불보듯 뻔했다. 따라서 남은 방법은 화폐발행, 그것도 명목가치를 높인 고액화폐의 발행밖에 없는 것으로 보였다. 다량의 고액권 발행에 의한 통화팽창은 결국 화폐가치의 하락으로 인한 물가상승을 야기한다는 것은 대원군의 당백전 발행때 이미 증명된 바 있었다. 더구나 곡물이 명치정부의 후원에 힘입은 왜상들에 의해 다량 유출됨으로써 이미 곡물 등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크게 오르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통화량의 갑작스러운 증가는 바람직하지 못했다. 따라서 가능한 한 당백전보다는 규모를 최소화한 고액화폐를 발행해서 물가상승 요인을 최소화하면서 개혁자금을 마련하는 게 상책이었다.


  일단 고액권 발행방침을 굳힌 고종은 신하들과 논의를 거듭한 끝에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조선개국 이래의 전통적인 천연자원 절약정책으로 당장 화폐발행에 소요되는 막대한 원료(구리,은 등)의 확보자체가 어려웠으므로 고액화폐 발행이 불가피한 면도 있었다. 그와 함께 고종으로서는 개구 이후 발전하는 시장경제에 대응해서 근대적 화폐제도를 정립해야 한다는 국제경제 전문가인 목인덕 등의 충언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따라 고종은 서1883년 2월에 본격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기 위한 전환국(典환局)을 설립하도록 명했고, 전환국은 같은 해 7월부터 본격적으로 설치되어 가동에 들어 갔다.


  그러나 이미 조선의 경제에 깊이 침투한 여러가지 외래적 요인들(특히 명치일본의 도발적인 경제침략)때문에 화폐발행이 자립적으로 추진되기는 어려웠다. 화폐주조 원료인 구리는 주로 조선에 발붙인 왜상들을 통하여 일본에서 수입하게 되었으므로, 구리는 갑자기 일본의 주요한 수출품목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국제무역의 범위가 아직도 극히 한정되었던 당시의 여건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으나, 이는 일시적으로 명치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더욱 용이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


  고종은 전환국을 설치하면서 그동안 지방 각지에서 지방수령 등에 의하여 임으로 주조되던 관행을 폐지하고, 전환국에서만 화폐를 발행하도록 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으로 통화관리를 하려고 했다. 이는 한민족의 근대 경제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인 발전적 조치였으나, 이상의 여러가지 내외적 여건이 겹쳐서 순탄하게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첩첩이 쌓여 가는 국가적 난관들을 타개해 나아가기 위해서 고종은 끊임없이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 연재중인 대한정통사의 출판준비를 하다 보니 두 달 가량 공백이 있었음을 양해바랍니다.

출판된 책은 인터넷 서점 및 수도권 등 유명 서점에 배포되고 있으며, 전체 내용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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