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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 (3부)

우리의 역사강역을 축소 왜곡시킨 일제식민사학

김정권 국사찾기협의회장 | 기사입력 2015/09/14 [11:11]

중국의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 (3부)

우리의 역사강역을 축소 왜곡시킨 일제식민사학

김정권 국사찾기협의회장 | 입력 : 2015/09/14 [11:11]

3) 동북공정을 돕는 반도사관

  일제식민사학의 대명사인 반도사관은 현재 허구의 동북공정을 이론적으로 확실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상고시대의 요수를 14세기의 제3요하인 지금의 요녕성 요하로 비정하다보니, 14세기 이전의 모든 역사무대가 지금의 만주로 이동되어 버린 것이다. 서쪽 갈석산에 있어야 하는 만리장성이 만주 요동으로 밀리면서, 결국은 한반도 황해도까지 동북공정의 상징인 만리장성이 들어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청나라 때 고증학자 필원(畢沅)이 집일본으로 전한 《태강삼년지기(太康三年地記)》에 “갈석산이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라는 기록을 본 조선총독부의 어용학자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사학잡지(史學雜誌)에 ‘진장성동단고’라는 논문을 기고하며 “낙랑군은 요동에 있고 낙랑군의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은 갈석산에서 시작되니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갈석산이다.”라고 하면서, 현재 한반도에는 만리장성이 없음에도 한반도의 황해도 수안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비정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옛 요동군은 엄연히 갈석산의 서편인 북경 서북쪽 하북성 장가구와 인접하고 있었으나, 14세기에 생겨난 제3요하를 근거로 삼다보니 어쩔 수 없이 만리장성은 만주 요동으로 밀리게 된 것이다. 결국 북한 땅에 있던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변조하고, 황해도 수안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비정하고 근처에 있는 요동산을 갈석산으로 확정하니 드디어 만리장성이 황해도 사리원까지 연결된 것이다. 이병도는 한술 더 떠서 그의 저서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에다가 일본인 스승인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의 학설을 그대로 따라 “수성현은 수안으로 비정하고 싶다.”고 함으로서 반도사관에 크게 일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 이병도의 수성현갈석산 이론을 바탕으로 황해도까지 진시황 만리장성을 그린 중국의 동북공정도     ©편집부

  중국의 동북공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동북아역사재단은 한해 2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써가며 하는 일이라고는 허구의 동북공정을 확실하게 굳혀주는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동북아역사재단만을 탓할 것만도 아니다. 한국의 제도권사학계가 온통 일제식민사학을 계승한 학자들로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틀 속에서는 아무리 수백억이 넘는 예산을 동북아역사재단에 투입해봐야 어차피 마찬가지인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그야말로 허구뿐인 중국의 동북공정 하나 제대로 막아내지 못할 정도로 역사이론이 허약하기 때문에 머지않아 반도사관이 나라와 민족의 미래에 커다란 암적인 존재로 부각될 것이 자명하다 할 수 있다. 정부는 외교와 통상 문제로 수수방관하고 있고, 기업들은 무역 때문에 동북공정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단체나 개인에게는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 국민들은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민족의 안위를 해칠지도 모르는 동북공정이 마치 남의 일 인양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우리가 동북공정에 무방비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나라 역사이론이 사대주의사관과 일제식민사학으로 얼룩져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때 명나라의 속국이 되어 아예 소중화가 되어버렸고,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식민교육을 받다보니 우리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우매한 민족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망국의 역사이론이 아직까지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실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되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4) 우리 역사를 축소·왜곡한 일제식민사학

  우리 민족사(民族史)에서는 개국을 ‘하늘이 열렸다(개천)’고 했다. 그런데 그 배달국이 개천했다는 신시는 물론 고대조선의 강역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상고사의 정립이 대단히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30년 전부터 민족사학계는 배달국의 강역에 대한 연구를 서둘렀고, 1991년에 ‘우리역사 일만년’을 출간하면서 시대별 강역을 통치적 강역과 문화적 강역으로 구분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를 그대로 계승한 강단사학계에서는 반만년의 역사는 근거도 없는데다가 너무 길다고 하면서,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로부터 백제는 근초고왕 때로부터 신라는 4~5세기부터로 부족사회를 벗어난 나라다운 나라로 규정한 국사교과서를 만들어 보급했다. 그런 상황인지라 ‘우리역사 일만년’은 말도 안 되는 소설이라고 비아냥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 상고사는 그 뿌리의 출발점에서부터 내란에 의해 수난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역사가 이처럼 부실해진 결정적 이유는 사료(史料)의 부족이 아니라, 바로 제대로 된 사료들을 위서로 취급한 사대주의·식민사관을 가진 학자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사대주의자들이 정치세력의 주류를 이루고, 그런 정치에 기생하던 어용사학과 일본유람단을 자처했던 소위 청년개화파들이 실증사학을 주장하면서부터, 우리의 민족사관은 중국에게 빼앗긴 듯이 넘어가고 일본에게 노략질 당한 듯이 건너갔던 것이다. 일본의 국학파는 정한론과 반도사관을 이론화하고는 개화파의 갑신내란과 독립협회의 한일병합을 결행했던 것이다. 독립협회의 역대 간부들이 병합 선포 3일 만에 모두 조선총독부의 귀족으로서 공작, 백작, 중의원 등 최고위직에 오르고, 매국의 포상금까지 두둑이 받았고 그 부는 대물림되어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호의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국학파는 야마토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론을 구체화시켰는데, 그 유산이 오늘날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는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인 것이다. 조선의 개화당이란 미개한 조선인들을 깨우쳐주는 사회운동으로 포장된 자들의 행동집단으로 활동한 신일본당이었으며, 독립협회는 나라를 약화시켜 혼란과정을 겪게 한 후에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나라를 넘기기 위해 조직된 첩자들이 브레인이 되어 이끌었던 매국집단이었다. 당시의 젊은 지성들을 미혹해 세력화했는데, 의협심을 가진 젊은이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역사를 정치에 활용하려는 매국노들의 도구로 쓰였던 것이다.     

  반도사관이란 식민지배자 일본제국주의가 우리를 식민지백성으로서의 길들이기 위한 역사이론이었다. 일제는 한사군 역사조작을 통해 한반도북부를 중국 식민지로 만들고, 고구려 호태왕비문을 변조해 조작한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화시켜 한반도남부가 일본 식민지였다는 가공의 역사를 만들었다. 원래 대륙에 있었던 요동과 요서는 그 중심을 흐르는 요수와 함께 우리 상고시대의 강역이었으나, 수천 년 후 대한민국에 이르러서는 우리와 무관한 지역이 되어있었음은 물론 그 위치마저도 모를 정도가 되었으니, 일제식민사학을 계승한 강단주류사학계의 폐해가 그야말로 막심하다 하겠다. 

  한국 주류사학계는 자국의 역사를 논하면서 우리의 진실된 기록은 모두 위서로 치부해버리고,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주변국들의 기록에서 우리를 조롱하며 나쁘게 언급했던 문구의 조각들을 주어모아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미니어처를 설계하듯이 끼어 맞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그거라도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라고 자위하기도 했으나,     

그러한 기록들을 제대로 해석하지 않다보니 일제식민사학의 이론 그대로 우리 역사가 모두 한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결국은 대륙에 존재했던 우리의 역사강역을 모조리 중국과 일본에게 넘겨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일제식민사학을 고수하고 있는 매국노집단이 작금의 국사학계의 모든 기관들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국민들이 낸 혈세로 오히려 우리의 민족혼에 독극물을 주입하고  자신들의 죄악을 업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현상이 반복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여러 사서에 아래와 같이 백제에 대해 언급한 기록들이 있다.
<송서 97권 동이열전 백제> 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
<양직공도 백제국사> 晉末 駒麗畧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晉平縣 ─
<양서 54권 동이열전 백제> 晉世 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
<남사 79권 동이열전 백제> 晉世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
<통전 185권 변방 동이 상> 晉時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 今柳城北平之間 ─      

  중국에서는 중화문화의 정수라는 송나라의 역사서인 <송서>나 양나라 역사서인 <양서>에 대해 높이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유독 한국사학계만은 그 내용에 “백제가 요서를 점령하여 백제군을 설치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는 이유로, "송서와 양서는 믿을 수 없다"고 하며 평가절하를 하면서 실증사학의 기본이 되는 1차 사료에서 이러한 내용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역사이론인 반도사관과 맞지 않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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