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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9월 9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

이동훈 기자 | 기사입력 2015/09/09 [21:01]

[역사속 오늘] 9월 9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

이동훈 기자 | 입력 : 2015/09/09 [21:01]

9월 9일은 북한의 주요 기념일 중 하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입니다. 1948년 9월 9일에 창건했다고 하여 9·9절이라고 하거나 공화국 창건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임시 인민위원회에서 정부 수립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신은 북조선인민위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민위원회는 해방 이후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행정기구입니다.

1945년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전국 곳곳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들 조직은 8월 말까지 남북 전역에 140여개의 지부가 건설되었으며, 실제 자치권과 치안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행정조직으로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들은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인 9월 6일, 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인민위원회는 해방된 조선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38선 이남에는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탄압을 받았습니다. 미군정이 자신들을 유일한 정부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민위원회는 불법조직이 되어 강제로 해산 당하는 등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38선 이북에서 군정을 실시하던 소련군은 인민위원회를 인정했습니다. 정해구 교수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북조선인민위원회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구체적인 행정은 도인민위원회에서 직접 시행되었고 소련은 핵심적인 지침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6년 2월, 북한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1946년 11월 도, 시, 군 지방선거를 통해 1947년 2월 임시자를 떼고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립 경축대회ⓒ민족21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립 경축대회ⓒ민족21

 

남북의 조건이 달라지면서 남북에는 다른 성격의 임시 기구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북조선인민위원회도 통일이 되기 전 임시기구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분단이 가시화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1945년 12월 미국과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갖고 조선의 독립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이것이 모스크바 3상회의입니다. 서중석 교수의 책 현대사 이야기에 따르면 3상회의 결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남북의 민주적 정당들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해 남북을 아우르는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세우며, 미·소·영·중 4개국은 임시정부의 독립과 민주적 발전을 위해 신탁통치(또는 후견)를 하고 그 기간은 5년 이내로 한정된다고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어떤 단체들이 미소공동위원회와 함께 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게 되면서 1947년 10월을 마지막으로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1947년 9월 16일)하면서 분단이 가시화되자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이 벌어졌습니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논문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1947년 10월 3일 북한의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은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회의에서 남북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이는 회의를 제안했습니다. 남한에서도 중도파를 중심으로 남북회의를 하자는 제안이 나오는 등 여러 제안이 오갔습니다. 비밀 협의가 이루어진 끝에 1948년 4월 18일 역사적인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와 4인회담(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 가나다 순) 등이 평양에서 열려 단독선거 불인정 등을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가시화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대처하는 조치들도 있었습니다. 1947년 11월 북조선인민회의 3차회의는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임시헌법초안을 마련했습니다. 여기에서 조선은 북한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아직 통일이 되기 전이므로 임시헌법을 만들고 통일 이후 이를 통합하거나 정식으로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참고로 북한 뿐 아니라 남한도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가 만들어졌을 때 7장 58조로 구성된 임시헌법을 만든 바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가 치러지게 됩니다. 남한에는 국회가 구성되었으며 헌법을 심의, 제정하는 등 정부 수립이 진척되었습니다.

북한은 이에 6월 28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개최했습니다. 회의에서는 5.10 총선거로 구성된 국회를 "비법적 조직체"로 규정하고 남북 총선거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회의 이후 대의원을 뽑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북한지역에서는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 212명의 대의원이 당선되었습니다.

38선 이남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합법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7월부터 지하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이신철 교수의 논문 북한 민족주의 연구에 따르면 북한은 한국 총유권자의 77.5%가 선거에 참여했으며 선거 결과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1080명의 대표가 선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남측 대표들은 1948년 8월 21일, 38선을 뚫고 해주에 모였는데 38선을 넘는 도중 일부가 참가하지 못해 결국 997명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었으며 이 자리에서 정당·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360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북한의 첫 최고인민회의에는 북한 대의원 212명에 남측 대의원 360명을 합쳐 572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으며 이 중 528명의 대의원이 참가한 가운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가 9월 2일 열렸습니다.

 

1차최고인민회의
1948년 열린 1차 최고인민회의

 

북한은 남측의 지하선거와 남측 대의원을 근거로 자신들의 정부가 남북을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북한은 정부 수립 이후 첫 내각을 구성할 때 구성 비율에서 남북을 각각 10명 씩 두어 균형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북한은 5일 헌법 초안을 약간 수정한 뒤 통과시켰고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과국 헌법을 공포했습니다.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선거를 통해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부위원장에 홍남표, 홍기주 등을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북조선인민위원회 김일성 위원장이 정권이양에 관한 성명 진술을 한 뒤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권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이양했으며 수상으로 김일성 위원장이 선임되었습니다.

그리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식 선포되었습니다. 9월 1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강을 발표했습니다.

정부 수립 3일 후인 9월 12일 평양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군중대회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김일성 수상은 모두 다 공화국정부 주위에 굳게 단결하여 민주조선창건을 위하여 전진하자는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부수립 기념일을 축하하는 북한 사람들 연도 미상 ⓒ민족21
정부수립 기념일을 축하하는 북한 사람들. 연도 미상 ⓒ민족21

 

북한에서 공화국 창건일이란

북한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을 "우리 민족 역사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인민의 국가를 세운 뜻 깊은 날"이라고 규정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창건한 날인만큼 북한에서는 9월 9일이 되면 행사를 치릅니다. 지난해의 경우 공화국창건 66돌 경축 중앙보고대회가 열렸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한 당, 국가, 군대 책임일꾼들이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고 조국해방전쟁참전열사 묘에 헌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청년학생들의 무도회가 평양을 비롯한 전국 주요 시군에서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흔히 북한에서 꺾어지는 해라고 표현하는 5년 10년 단위 기념일의 경우에는 더욱 성대하게 행사가 치러집니다. 지난 2013년에는 공화국창건 65돌을 맞아 로농적위군 열병식 및 평양시 군중시위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공화국 창건 65돌 열병식 장면 ⓒputevki43.ru
공화국 창건 65돌 열병식 장면 ⓒputevki43.ru

 

9월 9일에는 조국통일을 위한 중요한 내용이 발표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88년 창건일 40주년이던 때, 당시 김일성 주석은 연방제 통일 논의를 전제로 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습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조국을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하여서는 북과 남 사이에 대화와 협상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며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는 진정한 의사를 가지고 우리를 만나러 평양에 찾아오는 데 대해서는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북남 최고위급회담이라고 언급해 사실상 남북정상회담 제의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2013년 65돌 행사에서는 중앙보고 대회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조국통일 3대헌장을 비롯한 강령적 지침과 6.15통일시대가 개척되어 조국통일의 앞길에 밝은 전망이 펼쳐지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67주년 경축대회에서도 남북관계 개선 의사를 읽을 수 있는 표현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박봉주 내각 총리는 경축대회 연설자로 나서 "북남관계에서 대전환·대변혁을 일으켜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려는 것은 우리 공화국의 시종일관한 입장"이라며 "공화국정부는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조선반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고 세계의 자주화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여러 나라들과의 친선협조관계를 적극 확대 발전켜나갈 것"이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이동훈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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