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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 농악놀이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20/09/24 [17:22]

[조선력사] 농악놀이

이형주 기자 | 입력 : 2020/09/24 [17:22]

 

▲ 농악. 사진=조선의 오늘  © 플러스코리아



농악놀이

 

률동과 선률로써 사람들을 생산과 로동에로 고무하는 대중적가무였다.

이 놀이는 넓은 뜰이나 들에서 춤추고 노래부르며 즐길수 있는것으로서 씩씩하고 활달하며 창조적인 우리 인민의 기개와 품격을 잘 반영하고있었다. 농악은 고대시기부터 있었다고 보아진다.

옛 기록에 부여에서는 《영고》, 예에서는 《무천》 등의 행사날을 정하고 모두 모여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으며 마한에서는 5월과 10월에 《천신제사》를 하였는데 그 춤추는 모습이 수십명씩 줄을 지어 서로 따라가며 발을 구르고 손짓, 발짓을 하는것이 모두 장단에 맞았다고 한다. 이것을 농악놀이의 한 종류와 같은것이라고 볼수 있다.

지난날 우리 인민들은 농악과 더불어 곡식을 심고 가꾸었으며 농악과 더불어 길을 내고 보를 막았다. 어디서나 군중이 모여서 일하는곳이면 농악이 따랐다. 그러므로 농악은 때와 장소에 따라 《풍쟁》, 《걸궁》, 《군물》, 《매구》 등 여러가지로 불리워왔다.

풍쟁은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모내기와 김매기때에 흔히 벌어지군 하였다. 풍쟁이라는것은 풍작을 념원하는데서 생긴 이름이였다.

풍쟁은 일이 시작되기전에 농기를 중심으로 벌어지는것인데 모든 사람들이 마당에서 마음껏 뛰놀다가 농기를 앞세우고 농악을 울리면서 들판으로 나갔다. 저녁녘에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나 쉴참에도 역시 이런 놀이가 벌어졌으며 작업을 할 때에는 주로 노래를 불렀다.

다음으로 부락의 공동작업에서도 농악이 벌어지군 하였는데 이것을 걸궁(걸군)이라고 하였다. 길을 닦고 다리를 놓으며 보를 막고 우물을 파며 공공건물을 세우는 등 마을안에서 공동으로 벌어지는 일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농악을 울리며 기세를 올리군 하였는데 그래야 일손이 맞고 또 일이 수월해져서 자리가 났다.

그리고 공사가 방대하여 많은 비용이 필요할 때에는 그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기 마을은 물론 이웃마을, 이웃고을에까지 다니면서 농악을 연주하였다. 그리하여 그 사례로 받은 돈이나 곡식을 가지고 비용을 마련하였다.

농악을 군물이라고도 하였는데 그것은 《군용기물》이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군대에서도 농악기를 신호용기재로 사용하거나 군사들의 사기를 돋구는데 리용하였다. 군인들의 오락으로도 농악놀이를 하였다.

농악은 큰 줄당기기에도 한몫 끼였다. 경기자들은 북을 치면 당기고 징을 울리면 그치는 신호에 따라 밀치락닥치락하다가 승부가 나면 각기 농악을 울리면서 자기 마을로 돌아갔다.

매구나 지신밟이는 농악으로 《악》을 물리치고 《복》을 맞이하는 행사놀이로서 하나의 《농악제》였다.

매구는 섣달그믐날밤에 지난 한해동안에 있었던 《부정한것》, 《불길한것》들을 농악으로써 다 몰아내고 《복스러운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였다.

이밖에 명절놀이나 기타 집단적행사, 유희, 오락같은데서도 무엇보다 농악놀이가 먼저 벌어지군 하였다. 그리하여 설, 추석에는 물론 씨름판이 벌어지거나 계모임, 호미씻이때에도 주요한 놀이는 농악이였다.

이렇듯 군중이 모이는 곳에서 농악놀이가 벌어졌으며 농악놀이가 벌어지는곳에서는 반드시 흥겨운 군중놀이가 진행되였다. 농악은 출연자들이 반주를 하면서 노래와 춤과 놀이를 함께 한다는것과 그것이 대중적인 민속놀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었다.

농악성원은 《잡이》(연주가)와 《잡색》(춤군)으로 구성되였다. 잡이군들은 그 수가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꽹과리를 치는 쇠잡이가 4~5명, 징수가 한두명, 장고잡이가 4~5명, 북잡이가 5~6명, 소고잡이가 7~8명 정도였다. 잡이대렬은 언제나 쇠잡이, 징수, 장고잡이, 북과 소고잡이의 순서로 편성되였다.

쇠잡이의 우두머리를 《상쇠》라고 하였는데 농악놀이는 이 상쇠가 총지휘하였다. 농악놀이는 크게 농악무, 농악희, 농악노래 등 세가지로 구분할수 있다.

농악무에는 마당놀이와 구정놀이가 있었다. 마당놀이는 전원이 줄을 지어 둥그렇게 돌며 가락에 맞추어서 춤을 추는 원무였는데 가락에 따라서 제멋대로 즉흥무도 추고 짝도 지어 대무도 하였다.

구정놀이는 《영산놀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출연자들이 개인연기를 뽐내는 독무대였다. 구정놀이는 상모놀이, 설장구, 법고놀이, 소고놀이 등으로 나누어져있었다. 상모놀이는 쇠잡이들의 놀이이며 설장구는 장고잡이의 특기였다. 그리고 법고놀이는 북잡이, 소고놀이는 소고잡이의 놀이였다.

상모에는 줄상모와 깃상모가 있었는데 줄상모는 《열두발상모》라고도 하여 긴 종이가락을 전립꼭대기에 매달아 좌우로 내두르는것이였다.

농악희는 극희적인 놀이였다.

농악희는 장단만 맞추어서 제멋대로 춤을 추는 군무와는 달리 대렬무의 형식으로 놀았다. 실례로 《진굿》이라는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군대가 달려가 진을 치고 훈련하는것을 본딴 놀이였다.

《문잡이》라는것은 두 군사가 문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것을 내용으로 한것으로서 령기(기발)로 문을 세우고 두 편의 농악대가 서로 옥신각신하며 기발대에 오르는것을 형상한 놀이였다. 농악노래는 농악에 따르는 노래로서 일하면서 부르는 여러가지 민요들로 되여있었다.

이처럼 우리 나라 농악은 예술적이면서도 민족적인 정서를 풍부히 가지고 우리 인민의 락천적이며 전투적인 기백을 잘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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