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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영상]부모없는 일곱 아이 키우는 '처녀어머니 장정화'는 누구인가?

이수현 기자 | 기사입력 2020/04/03 [10:10]

[북 영상]부모없는 일곱 아이 키우는 '처녀어머니 장정화'는 누구인가?

이수현 기자 | 입력 : 2020/04/03 [10:10]

 [플러스코리아타임즈=이수현 기자] 북 조선의 오늘은 '처녀 어머니'로 널리 알려진 강선땅 스무살 처녀 장정화 씨가 부모없는 고아 일곱명을 키우게된 사연을 소개했다.

 

외세의 의한 남북분단 75년, "북조선을 알아야 통일이 가까워 진다"는 본지의 신념으로 북조선 알리기를 하고 있다. 오늘은 2016년 9월 4일 자로 북 조선의 오늘이 보도한 '처녀 어머니'에 대한 영상을 소개한다. 장정화 씨의 사연을 그린 영화 '우리집 이야기'는 2017년 모스크바영화제와 2018년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다.

 

▲ 부모없는 일곱아이의 어머니가 된 20살의 처녀어머니인 장정화 씨와 딸. 사진=조선의오늘     © 이수현 기자

 

▲ 부모없는 일곱아이의 어머니가 된 20살의 처녀어머니인 장정화 씨 가족. 사진=조선의오늘     © 이수현 기자

▲ 부모없는 일곱아이의 어머니가 된 20살의 처녀어머니인 장정화 씨와 막내. 사진=조선의오늘     © 이수현 기자

 

다음은 조선의 오늘 조향선 기자의 칼럼을 소개한다.

 

《처녀어머니》의 1년

 

강선땅의 20살 청년동맹원이였던 장정화동무의 소행이 온 나라에 소개된 때로부터 한해가 흘렀다. 그 나날에 《〈처녀어머니〉와 나》라는 청춘의 주제앞에서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새 목표를 세우고 새 출발의 길에 들어섰으며 또 얼마나 무수한 미덕과 미풍들이 내 나라 방방곡곡에 꽃처럼 만발하였던가.

영광스러운 김정은시대의 위훈과 미덕의 상징으로 우리 시대 청년미풍선구자들의 앞자리에 서있는 《처녀어머니》, 그의 1년은 어떻게 흘러갔는가. 우리는 또다시 강선땅의 《처녀어머니》를 찾았다.

경애하는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청년들이 강하면 우리 당과 인민군대가 강하고 세상에 무서울것이 없습니다.》

1년전에 갔을 때의 그 집은 아니였다. 우리의 걸음은 천리마구역 화석동에 있다는 그의 새 집으로 향해졌다. 강선로동계급과 당조직의 따뜻하고 웅심깊은 마음에 받들려 부러운것 없이 꾸려진 새 보금자리가 《처녀어머니》와 그가 맡아키우는 아이들에게 안겨졌던것이다.

들어서는 사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한다는 새 집에서 우리와 만난 《처녀어머니》의 모습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 연연하고 귀염성스러운 얼굴, 산뜻한 치마저고리차림에 외태머리까지도.

하지만 그의 《자식》들이 자랐다.

맏이 은정이는 녀성해안포병이 될 결심을 안고 혁명의 군복을 입었고 은성이는 조선소년단창립 70돐 경축행사 대표로 경애하는 원수님을 모시고 영광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정화동무와 한곡의 노래를 열번, 스무번씩 부르며 정확한 음감을 키운 은설이는 룡범이와 함께 천리마구역학생소년회관 성악소조에서, 은향이는 기타소조에서 강선로동계급이 사랑하는 훌륭한 꼬마배우들로 자라고있었다. 경희는 전국적인 축구경기에 참가하여 메달까지 탔다고 한다. 《처녀어머니》의 잔등을 적시던 막내둥이 자명이도 이제는 유치원생이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애들의 첫 자랑은 백두산에 갔댔다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되여 온 가족이 백두산에 가게 되였는가라는 물음에 장정화동무는 인상깊은 웃음을 짓더니 그날의 추억을 조용히 더듬었다.

《사실 애들모두와 함께 백두산에 꼭 가보리라 결심한것은 제가 은정이와 함께 전국청소년학생들의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답사행군에 참가했던 지난해 8월부터였습니다.》

일생에 처음으로 백두산에로의 행군길에 오른 그에게 있어서 백두산은 흙부터가 달랐다. 선렬들의 피스민 그 흙 한줌을 소중히 안고 백두의 이슬에 옷깃을 적시던 숙영의 밤 모닥불가에서 《사향가》를 부르며,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를 읽으며 그는 다시한번 뜨겁게 음미해보았다. 어이하여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에 밀림의 긴긴밤아 이야기하라는 구절이 새겨져있는것인지.

백두산은 나의 청춘시절의 《집》이였다고, 어린시절의 고향집식솔에 비할수 없는 많은 식솔들이 나와 함께 거기서 지내며 백두산의 눈비를 맞았고 오늘의 조국을 꿈꾸었다고 하시던 위대한수령님의 회고록의 글줄을 되새겨볼수록 피어린 항일의 그 나날들에 우리 수령님께서 지새우신 밀림의 긴긴밤은 몇백, 몇천밤이였으랴 하는 생각에 그는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어이하여 자신께서 눈보라사나운 날에 백두산에 오르려고 하는가, 백두밀림에 차넘치던 백두의 혁명정신이 어떤 간고한 시련속에서 이루어졌는가 하는것을 마음속으로나마 더 깊이 체득하기 위해서라고 하시던 위대한장군님의 교시에 담겨진 깊은 뜻이 가슴을 쳤다.

《백두산에서 저는 우리 행복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애들의 마음도 바로 그 백두산에서 깨끗하게, 크게 하고싶었습니다.》

언제나 어느때나 백두산에 오르리라 마음다지며 힘겨움도 어려움도 이겨낸 《처녀어머니》였기에 지난해 9월 완공을 앞둔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건설장을 찾으신 경애하는원수님의 현지지도소식에 접했을 때 그의 격정은 남달리 뜨거웠다.

우리 당의 청년중시사상이 얼마나 위대하고 청년강국의 앞길이 얼마나 휘황찬란한가를 보려면 누구나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에 와보면 될것이라고 하신 경애하는원수님의 말씀은 《처녀어머니》의 심장을 세차게 끓여주었다.

영웅청년, 그 고귀한 부름앞에 자신을 세워보는 그의 생각은 깊었다.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건설장에 스스로 찾아와 인생의 첫출발을 떼고 백두대지에 애국의 삽을 박고 애국의 피와 땀을 바치며 청춘대학졸업증을 받은 청년들에 비하면 과연 내가 한것이 무엇인가 하고 돌이켜볼수록 제2차 전국청년미풍선구자대회장에서 만났던 처녀돌격대원 박정금동무가 10여년세월 백두대지에 새겨온 위훈이 더욱 돋보여 자신이 작아보이기만 했다. 여러해동안 부모없는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여주었다고 온 나라가 다 알도록 내세워준 분에 넘친 당의 믿음은 그의 마음을 더욱 힘껏 떠밀어주었다.

가자, 백두산으로!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그였지만 역시 그도 20대 청춘이였던것이다.

청년동맹중앙위원회일군들과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 당조직의 적극적인 지지와 관심속에 그의 온 가족은 지원이 아니라 발전소건설장에 참전하러 가는 심정으로 먼길을 떠났다. 《처녀어머니》가 장한 길을 떠났다고 이르는 곳마다에서 진심으로 환대해주던 잊지 못할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담아 장정화동무와 그의 온 가족은 백두산영웅청년들에게 성의껏 마련한 지원물자도 안겨주며 충정으로 불타는 노래도 불러주었다.

혁명의 성산에 올라 백두산천지를 배경으로 매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던 그날 장정화동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백두산은 너희들모두의 고향과 같단다. 언제나 백두산을 안고 살아라.》

백두산의 꽃잎을 품속깊이 간직하고 돌아왔다는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로 어른스러워보였다. 우리 원수님께서도 관심하시는 아이들을 또 한뽐 자래운 《처녀어머니》의 높은 정신세계와 지극한 사랑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감동적인것은 그가 단순히 아이들을 잘 키우는 《처녀어머니》가 아니라 70일전투에서 자기 몫을 단단히 한 만리마시대의 처녀혁신자라는 사실이였다.

《처녀어머니》와 그의 온 가족이 헌신의 낮과 밤들에 바쳐온 충정의 땀방울이 력력히 스며있는 70일전투기록장, 거기에서는 다 보였다.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현대화를 위한 김혁청년돌격대의 명예대원이 된 장정화동무가 7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원물자를 안고, 노래를 안고 들끓는 건설현장을 찾아 무수한 발자국을 남긴 사연깊은 그 구내길이며 아이들과 함께 길가의 파철 한덩이도 차곡차곡 모아 쌓아가던 크고작은 파철무지들, 한그루 나무도 다 자기 가슴에 품어안고 자기의 더운 피로 뜨겁게 덥혀주는 애국자가 되자고 약속하며 땀들여 심은 나무들마다에 정성껏 붙여나가던 하나하나의 패쪽들이.

거기에는 다 있었다.

강선땅에 모셔진 위대한수령님의동상을 더 밝고 정중히 모시기 위하여 비오나 눈오나 애들과 함께 걸은 새벽길도, 영예군인의 친딸이 되여 바쳐온 눈물겨운 지성과 《누가 제일 앞섰나?》경쟁도표에 앞서거니뒤서거니 오르던 붉은 줄들도, 1일영양기준표의 요구에 맞게 7명 아이들의 영양관리를 더 잘하기 위해 《처녀어머니》가 남모르게 지새운 밤도.

잔손질이 끝없는 철부지아이들을 한둘도 아니고 여럿을 아글타글 피나게 돌보며 숙제검열도 하고 경제선동공연도 준비하였으며 또 밤이면 밤대로 명예대원으로 앞장서 돌격전투에도 참가하였으니 무쇠인들 견디여냈겠는가.

정말로 힘에 부쳐 주저앉고싶을 때마다 그는 조선로동당창건 70돐 경축대표로 경애하는원수님을 모시고 찍은 사랑의 기념사진앞에 서군 했다고 한다. 그러면 그지없이 평범한 청년동맹원을 상상도 못했던 영광의 자리에 불러주신 하늘같은 믿음에 절로 심장의 박동이 세차지고 정화야 내 손을 잡고 어서 가자라고 우리 원수님 말씀하시는것만 같아 《처녀어머니》는 무한한 새 힘이 솟구쳤다고 한다.

천리마구역청년동맹위원회 일군인 한영진동무는 《처녀어머니》의 1년을 돌이켜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전에 정화동무는 어떻게 하면 내 힘으로 아이들을 건강하게 잘 키워서 모범학생으로 내세울수 있을가 하고 생각했다면 오늘은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과 함께 원수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한가지라도 더 할수 있을가 하고 생각하고있습니다. 확실히 그는 생각하는품부터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당을 따라 곧바로 나아가는 길에서 인생의 값높은 영광을 누리도록 오만자루 품을 아낌없이 바쳐준 당조직과 청년동맹조직의 보살핌속에 몰라보게 성장한 그 나날에 《처녀어머니》는 경애하는원수님께 여러차례에 걸쳐 기쁨을 드리였다. 뜻깊은 태양절을 맞으며 그는 조선로동당원증을 받아안았다. 이튿날 수백점의 정성비품들을 안고 어머니와 함께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달려간 장정화동무는 어서 오라 태양의 미소 뿌려주시는 위대한수령님들의태양상을 우러러 이렇게 고마움의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위대한수령님, 장군님, 21살 《처녀어머니》는 오늘 어머니당의 품속에서 조선로동당원으로 태여났습니다!)

집의 벽면을 가득 채운 영광의 기념사진들과 대표증을 젖은 눈으로 바라보던 우리의 눈길은 책상우에 무드기 쌓인 전보와 편지들에서 멎어섰다.

전국각지에서 소학교학생들로부터 고령의 로인에 이르기까지 《처녀어머니》에게 한마음으로 보내여온 편지들은 읽어볼수록 가슴이 쩌릿해졌다.

《…나이가 많아서 언니겠습니까. 우리 당이 가슴아파하고 우리 원수님께서 심려하시는 곳에 제일먼저 자기를 바칠줄 알고 자기 한몸을 내댈줄 아는 동무가 정말로 언니입니다. …》

《저는 〈처녀어머니〉의 아름다운 소행자료가 실린 신문을 항상 품고다닙니다. 힘들 때면 늘 〈처녀어머니〉를 생각하며 힘을 얻군 합니다. 〈처녀어머니〉를 떳떳이 만날 그런 자격을 가졌을 때 기쁘게 강선으로 가겠습니다. …》

내 나라의 푸른 하늘아래 미덕의 꽃으로 만발할 이 땅의 수천수만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벅차게 그려보는 우리에게는 지난 1월 새로 건설된 청년운동사적관을 찾으시고 나는 지금도 《처녀어머니》를 만나던 때를 잊을수가 없다고, 청년들속에서 《처녀어머니》와 같은 미풍선구자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하신 우리 원수님의 말씀이 심장깊이 되새겨졌다.

장정화동무는 말했다.

《지난 한해동안 찍은 사진은 20살이 되도록 찍은 사진보다 더 많습니다. 〈처녀어머니〉처럼 살겠다고 마음다지던 이름모를 그 수많은 청년들의 모습과 매일같이 쌓이는 편지들을 볼 때마다 저는 자신에게 물어보군 합니다. 미풍선구자라는 고귀한 부름을 지키고있는가고 말입니다.》

온 나라에 타번지는 긍정창조의 불길이 막 가슴에 미쳐오는것만 같은 격동에 편지들에서 눈길을 못 떼는 우리에게 장정화동무의 어머니인 로춘복녀성은 문득 미국의 CNN텔레비죤방송회사 기자단이 찾아왔던 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나라에서 아이들에게 교복과 학용품도 해마다 안겨주며 공부도 무료로 시켜주고 남의 아픔이란 없는 이 땅에서는 저저마다 위해주고 도와주니 아이들은 내가 키우는것이 아니라 당에서 키운다고, 그런데도 경애하는원수님께서는 이렇듯 평범한 나를 《처녀어머니》라고 불러주시며 기념사진도 함께 찍으시고 김정일청년영예상수상자로 내세워주시였다는 장정화동무의 이야기에 미국기자들은 놀라움에 넘쳐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 기념사진에서 〈처녀어머니〉, 당신은 어디에 서있는가?》

경애하는원수님의 가까이에 행복에 넘쳐 서있는 그의 모습을 찾아본 미국기자들은 너무도 크나큰 감격에 더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온갖 부정의와 탐욕으로 인간을 타락시키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자기의 부모를 목졸라죽였다는 처녀살인범, 사람들을 경악케 하는 처녀강도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수 있어도 부모없는 아이들을 데려다키운 《처녀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과연 어떻게 들어볼수 있었겠으며 그 《처녀어머니》를 온 세상에 높이 떠받들어주신 위대한령도자에 대한 이야기를 어찌 상상이나 할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오늘 500만 청년전위들을 대표하여 경애하는원수님을 모시고 대회주석단에도 앉고 원수님의 가장 몸가까이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처녀어머니》를 보았더라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것인가.

진정 사회주의 우리 조국에만 있는 《처녀어머니》는 위대한 조선로동당, 백두산청년강국의 고귀한 산아인것이다.

《처녀어머니》의 1년,

어머니의 사랑과 청춘의 위훈을 다 합쳐 남들의 몇곱으로 빛내인 그의 1년은 얼마나 값높고 훌륭한것인가.

우리 청춘들의 한해한해를 인생의 10년, 20년 맞잡이로 빛내여준 위대한김정은시대와 더불어 더욱 순결하고 아름답게, 억세게 피여난 《처녀어머니》, 그의 1년에는 진정 청년중시를 국사중의 국사로 내세운 위대한 당의 품속에서 주체혁명위업수행의 맹장, 혁명의 교대자들로 자라난 우리 청년들의 긍지높은 성장의 축도, 더욱 신심드높이 내다보는 청년강국의 래일이 비껴있는것이다.

《처녀어머니》는 오늘도 이 땅의 청춘들이 너도나도 따를 미덕의 거울로 당이 세워준 미풍선구자의 맨 앞자리에서 혁신자로, 훌륭한 당원어머니로 보답의 자욱을 새겨가고있다.

온 나라가 부러워 바라보는 행복과 영광의 최절정에 선 《처녀어머니》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있을것인가.

 

본사기자 조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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