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길 역사소설 옥전여왕(玉田女王)] 서정공주의 슬픔 14회
왕자의 죽음과 여왕의 등극으로 다라국 사람들은 짧은 시간동안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맛본 듯하였다.
그러나 다라국 왕실과 백성은 힘을 합쳐 마음을 다잡고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나갔다.
하지만 아직 가슴을 쥐어뜯는 아픔을 이기지 못한 채 망각 속을 헤매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천주산 높이 뜬 달을 바라보며 탁순국 서정공주는 애련한 마음을 달빛에 실었다.
‘전쟁이 끝나면 곧 돌아와 즉위식을 올린 다음 혼례를 치룰 것이오. 이번 전쟁은 여러모로 우리가 유리하니 승리의 북소리 높이 울리며 공주를 맞을 것입니다. 내 없는 사이 옥체 잘 보전하시고 기다려 주세요.’
금방이라도 환한 웃음을 띠며 다가올 것만 같은 문룡왕자의 얼굴이 둥근 달과 교차되었다.
어릴 때부터 오누이처럼 가깝게 지내며 같이 공부도 하고, 무예도 익히며 푸른 들판, 말을 달리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다정다감했던 문룡왕자.
‘진정 그 이는 이 하늘 아래 없는 것인가? ’ 공주는 지금의 처지가 전혀 믿기지 않았다. 이제까지 서정공주는 부러움없이 세상을 살아왔다. 탁순국 어린이들도 공주를 사랑하여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칠흑 머리 탁 트인 이마 상제 눈썹 영롱한 눈동자 여래 닮은 귀 뾰족한 코 앵두 입술 천도복숭아 빛 볼 동그란 턱 섬섬옥수 두툼한 젖가슴 개미허리 코딱지 배꼽 풍만한 엉덩이 두둑한 불두덩 청총마 갈기털 깊고 맑은 옥천 지신 딛은 발가락 이름도 예쁘셔라 상서로운 기운 고요한 자태. 대자대비 마음씨 서정공주
그러나 이러한 찬사도 서정 공주의 마음엔 공염불에 불과하였다.
‘어디로 가야 그 이를 만날 수 있을까?’
허공을 헤매던 서정공주는 천주사 홍제스님을 찾아갔다.
“스님 그 이는 어디로 갔을 까요.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서정 공주는 홍제 스님을 붙들고 문룡왕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애타게 졸라댔다.
“세상의 것은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눈앞에서 사라졌다면 허상인 것이니 찾지 마십시오.”
홍제스님은 서정 공주에게 보이지 않는 허상에게 마음을 담지 말라고 일렀다.
“그렇게 간단하다면 왜 이 불자가 촌각을 참지 못하고 애간장을 태우며 그 사람을 찾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 사람 없는 세상은 존재 가치조차 없는 세상이며 불구덩이에 떨어져 허우적대는 지옥보다 못한 세상입니다.”
서정 공주의 마음은 일편단심 문룡왕자에게 머물고 있었다.
“이미 공주님께서도 알고 계신 바와 같이 그 분이 생전에 불덕이 깊었다면 서방정토 아미타불의 세계에 귀의하셨을 것입니다.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그 분을 만날 수 있을는지도 모르지요. ”
홍제스님은 서방정토, 아미타불의 세계에 가면 문룡왕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서방정토? 그곳이 어디입니까? 어떻게 하면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서정 공주가 다그쳐 물었다.
“여기서부터 걸어 서방으로 십만억 불토를 지나 저 달이 머무는 곳에 극락이라 이름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곳에 믿음을 바르게 결정하여 물러남이 없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정정취문이 있습니다. 이 문 앞에서 경계에 흔들려 어지럽던 마음이 사라지면 마음바다 부처의 세계가 열리고 서방극락세계가 펼쳐지게 됩지요. 그곳은 생사도 고락도 없는 곳이니 불덕이 깊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십만억 불토, 달이 머무는 곳? 믿음을 바르게 하여 물러남이 없는 사람? 불덕을 쌓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나요?”
서정 공주가 또 캐어물었다.
“소승이 법문에 든 지 팔십여 성상이 지났으나 서방정토는 범부의 의식 밖에 있으므로 아직 정토를 느끼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지상 이십만 리 여래께서 태어나신 천축국도 다녀오지 못한 소승으로서는 십만억 불토를 지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요원한 믿음의 세계입니다. 지금껏 믿음을 바르게 하여 물러남이 없는 중생이 되기 위해 늘 선과 기도를 거듭 수행해 왔으나 서방정토는 소승에게 더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 홍제스님은 아직도 불법수행의 길이 멀게 느껴진다며 겸손해 하였다.
“그렇게 멀고 닿을 수 없는 길이라면 애초에 만들지 말 것을 무엇 하러 어리석은 중생을 현혹하려 그런 밑도 끝도 없는 허황된 법설을 펴시는 것이옵니까?”
서정공주가 심히 실망스런 어조로 말하였다.
“현혹시키려거나 허황된 말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원래 그곳은 살아생전에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는 염불수행지방입상의 교법을 내리셨습니다. 즉 중생의 산란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게 하고 정토의 세계를 환영처럼 보여서 믿음을 일으켜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도록 인도 하신 교법이지요. 다시 말해 중생이 십만억 불토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십만억 불토가 우리에게 다가와 이 현실에서 감득케 하는 대자대비의 교법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음이 청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불토가 청정해 지기 때문이지요. 청정한 마음이 곧 아미타불의 세계이며 청정광명의 세계인 것입니다. 다만 정토가 다가오기까지 그 수행의 높이가 얼마만큼 쌓여야하는 가는 소승도 아는 바 없사옵니다.”
홍제스님은 십만억 불토가 마음에 있다고 하였지만 믿음이 약한 공주에게 십만억 불토를 당겨 마음에 담기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달님이시여 가시렵니까? 이 몸 함께 데려가 주옵소서. 서방정토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억만 리 길 멀다 않고 따라가겠나이다.
달님이시여 홀로 떠나시렵니까? 이 몸도 함께 데려가 주옵소서 아미타불의 세계가 아무리 멀다한들 임 향한 이 걸음 멈출 수 없나이다.
몸을 갈아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려가는 것이 빠를까요? 몸을 태워 재가 되어 구름에 실려가는 것이 빠를까요?
달님이시여 함께 가기 어렵거든 가는 길이나 일러 주옵소서.
서정공주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세월을 보낼 뿐이었다. 그러한 공주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은 역시 부모인 탁순왕과 왕비였다.
“그렇게 슬픔에만 빠져 있지 말고 정신을 차리려무나. 한 번 간 사람이 슬퍼한다고 다시 오겠느냐. 이번 다라국 옥전여왕이 남제 황제 등극에 특사로 사절단을 데리고 남경에 간다하니 마음도 비울 겸 생각이 있으면 같이 따라갔다 오려무나. 시녀도 몇 명 데리고 간다니 너 하나 끼워주지 않겠느냐. 내 여왕님께 각별히 부탁을 해볼 터이니…….”
딸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탁순왕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공주의 아픈 마음이 치유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부왕의 말을 들은 서정공주는 문득 이대로 주저앉아 있다가는 영영 문룡왕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제스님, 남경은 달뜨는 쪽에 있나요, 달이 지는 쪽에 있나요? ”
서정공주가 남경의 방향을 홍제스님에게 물었다.
“천축국 가까이 있으니 달 가는 쪽에 있습지요. 하지만 천축국도 서역 십만 팔천 리에 있으니 남경을 간다하더라도 천축국에 가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옵니다.”
“가겠어요. 서방정토가 십억만 불토가 아니라 백억만 불토 저편에 있다하더라도 지금부터 시작하면 언젠가는 닿을 수 있겠지요.”
서정 공주는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길 떠날 여장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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