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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사회참여

" 문학과 정치는 서로 배척되고 배타하는 상극(相剋)의 관계가 아니고"

김윤호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09/07/09 [09:48]

문학과 사회참여

" 문학과 정치는 서로 배척되고 배타하는 상극(相剋)의 관계가 아니고"

김윤호 논설위원 | 입력 : 2009/07/09 [09:48]

 요사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를 놓고 온 국민이 들끓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을 재협상해야 한다는 주장과 추가협상을 한 정부를 믿고 따르자는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 있다. 재협상을 주장하는 측은 국민 건강권과 검역주권이 소중하다고 내세우고 있고, 추가 협상을 인정하는 측은 국가 간의 약속과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여론조사를 믿는다고 할 때, 국민 70% 이상이 재협상을 지지하고 있다. 체제와 통일의 국가적인 문제, 비정규직의 노동문제, 양국화의 사회문제, 사교육의 교육문제, 쇠고기 수입의 건강문제 등 사회적인 문제에 대하여 문학은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문학의 기원과 본질, 목적과 기능과 관련된 가장 오래되고도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또한 가장 논란이 심하고, 가장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다.

  시대에 따라서, 개인에 따라서 문학관도 다르고, 더구나 사회참여에 대한 생각은 극과 극을 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감대처럼 예민하고 미묘한 영역의 문제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다의적인 의미와 복합적인 성격을 감안하고, 이제 나의 부족한 소견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문학은 우리네 삶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본다. 순수문학이든, 민족문학이든, 참여 문학이든, 민중 문학이든 그 명칭과 형태를 가리지 않고, 모든 문학 일반은 삶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시간과 공간, 인간이 어우러져서 만들어지는 구체적인 삶은 복잡하기도 하고 변화무쌍하고 모순에 가득 차 있다. 

  시랑과 그리움, 자연만을 노래하는 이른바 순수문학도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와 심층심리, 대자연과 대자연의 일부인 인간을 묘사하고 추구하고 노래하는 것이기에 인간과 인간의 삶에서 유리되어서는 존립근거와 존재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이익과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투쟁적으로 발전하는 역동적인 사회현상과 사회문제를 다루고 천착하고 비판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이른바 참여문학, 민중문학도 인간의 삶, 즉 사회적인 관계에서만이 사회적인 의미와 가치가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의 사회적인 생존조건이 그 문학적 뿌리요, 존립기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양성과 창의성의 민주화의 시대,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뛰어넘는 놀라운 소통의 기술정보(IT)의 디지털 시대, 21세기 IT강국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문학인들은 현란하게 변화하면서 전개되고 있는 사회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문학과 사회참여는 공존할 수 있다는 인식의 외연의 확대와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문학 만을 평생 전업적으로 하시는 문인도 소중하고 가치 있다. 문학을 하면서 다른 직업도 병행할 수 있다고 본다. 그 다른 직업이 교육이든, 사업이든,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관계가 없다고 본다. 

  다만 문학과 정치의 문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종교와 정치처럼 인간을 흥분시키고, 이성을 잃어버리고 광신적으로 되기 쉬운 인간의 활동영역도 드물다. 서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 평화를 위하여, 서로 사랑과 정의를 위하여, 서로 국민을 위하여, 서로 인류를 위하여 라고 외치면서 싸우고 죽이고 전쟁까지 하는 모순의 역샤가 바로 우리 인간의 역사였다.  종교와 정치가 일치되었던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고대와 중세를 지나서 이제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는 제정분리(祭政分離)의 근대와 현대 사회이다. 

  제정분리의 이 시대에도 천주교 사제, 기독교 목사, 불교 스님들이 국민과 중생의 문제와 고통과 아픔을 달래고 대변하고 해결하고 도움을 주기 위하여 사회 참여, 즉 정치의 뜨거운 한복판에 뛰어 들어서 강렬한 의사표시의 하나인 시국 미사와 시국 기도회, 시국 법회를 열고, 거리 행진과 단식투쟁의 정치 참여 행위를 하고 있다. 종교의 현실참여와 정치참여 행위에 대하여 찬반 의견이 극렬하게 갈릴 수 있다. 문학의 현실참여에도 뜨거운 감자처럼 극단적인 의견대립이 있을 수 있다. 

  세상은 상대방의 차이와 다양성, 개성을 인정해야 평화와 발전과 상생이 온다는 진리를 깨달아가고 있다. 이것이 역사발전의 법칙이요, 방향이요, 인류 평화와 행복의 길이다. 이른바 순수문학만 하든, 참여문학과 민중 문학을 하든, 서로의 차이와 개성과 주장을 이해하고 인정하자. 취미이든, 직업이든 문학을 하면서 현실참여, 특히 정치에 참여 한다고 해서 비난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다른 직업을 갖든 아니 갖든, 문학만을 한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과 똑같은 논리이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나의 좁은 소견을 말하고 싶다. 

  냉혹한 생존경쟁의 틀 속에서 비교적 힘없는 영역인 문화예술, 특히 문학을 하는 문학인들은 문학창작과 문학 활동만 하는 문인들도 많아야 하겠지만, 사회 참여와 정치 참여를 하는 문인들도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다. 문인이 시장, 군수, 구청장도 많이 나오고, 시의원과 도의원, 도지사, 직할시장, 특별시장, 국회의원, 장관도 많이 나오고, 대통령도 문인이거나 문학을 취미로 삼고 조예가 깊은 문학애호가가 된다면, 문화예술의 부흥(르네상스)시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문학은 아름답고 그윽한 향기와 즐거움을 온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문학은 꽃을 피우고 열매가 탐스럽게 열릴 것이다. 

  문학과 정치는 서로 배척되고 배타하는 상극(相剋)의 관계가 아니고, 서로 보완하고 성장 동력으로 삼는 상생(相生)의 관계가 될 수 있고, 또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인이 정치를 한다고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할 일은 더구나 아니다. 이해하고 도와주고 성원해 주어야 할 일이다. 문인이 정치를 하면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이, 큰 잘못이라도 범하고 있는 듯이 잘못 생각하고, 좁게 생각하는 문인들과 시민들이 있다.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작가회의(구 민족문학작가회의)도 군사독재의 암울한 시대상황에서는 한 때 상호배척의 상극의 관계에 있었으나, 민주화와 산업화를 지나서 선진민주강국으로 가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상호보완의 상생의 관계로 가야 하고, 또한 가고 있다고 본다.


  문학 등 문화예술 분야도, 정치 등 사회 분야도 그 자체의 모순과 변혁적인 추동력에 의해서 다양성과 통일성이라는 길항적(拮抗的)이고 변증법적인 변화와 발전의 동태적 상태를 보이고 있고, 다른 사회 분야와의 관계에서도 예측하기 어려운 급진적이고 복잡하고 역동적인 변화와 역학관계가 유동적인 상태로 형성되어 있다. 모두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인간 실존과 사회조건의 불확실성과 불안의 실상이다.


  자기의 생각과 이익과 입장과 다른 것이 자연스럽고 정상인 다른 사람들의 차이와 존재와 생각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대화하고, 서로 양보하고 타협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만고불변의 갈 길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영원히 서로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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