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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이 빠진 요택으로 본 '요수'는 어디?

요택은 황하와 심수가 만나는 하남성 일대의 습지대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5/19 [17:08]

당태종이 빠진 요택으로 본 '요수'는 어디?

요택은 황하와 심수가 만나는 하남성 일대의 습지대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05/19 [17:08]
본 글은 아래 5부작의 마지막 (5부)입니다.
(1부) 식민사학계의 잘못된 이론과 민족사학자의 이론
(2부) 역사동호인들의 이상한 요동.요서 이론
(3부)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현 산서성 분하
(4부) 안시성, 환도산성, 평양성이 있는 요동은 어디?
(5부) 당태종이 빠진 요택으로 본 요수는 어디인가?

당태종의 전쟁기록에 언급된 요수는 현 하남성 낙양 근처의 황하

한서지리지에 언급되어 있는 대요수(大遼水)는 예전에 압록수로 불렸던 산서성 분하로 보인다. 그러나 <자치통감>과 <당서(唐書)>의 기록에는 요수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수양제/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의 진군로를 보면 낙양 북(北)에서 요수와 요택을 지나 요동성에 도착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여기서의 요수는 바로 황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아래는 중국에서 당태종의 요동정벌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논문으로 제목은 “唐太宗东征高丽始末及其失败原因 (당태종의 요동정벌의 자초지종과 실패원인)”에 언급된 구절이다. 이 논문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을 위해 <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당태종의 요동정벌을 상세하면서도 쉽게 설명한 글이다.

▲  사사의 기록에 있는 당태종의 요동(고구려)정벌애 대해 가장 쉽고 자세히 쓴 글.

 
同年十月十四日,唐太宗乘车驾由长安行幸洛阳....  十一月初,营州都督张俭等帅唐军进至辽水西岸,正值河水泛滥,久不得渡。太宗以其畏惧怯懦,召回洛阳....(생략).... 贞观十八年十一月十四日,诏令刑部尚书张亮为平壤道行军大总管,沪州(今属四川)都督左难当为副,率江淮、岭南及缺中诸州兵及长安、洛阳 3,000 募兵,战舰 500艘,从莱州渡海趋平壤;

(번역) 10월 14일 당태종은 장안에서 낙양으로 향하였다....
11월 초 영주도독 장건 등은 당군(唐軍)을 데리고 요수 서안에 이르렀고, 당시 하천이 범람하는 시기여서 오랫동안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태종은 실망하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정관 18년 11월 14일 조서를 내려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부군의 총관으로 하고 노주(사천에 속함)도독 좌난당을 부관으로 하여, 강회, 령남과 결중의 여러 주에서 인솔한 병사와 장안 락양 등에서 3,000의 병사를 모집하고, 군선을 500척으로 래주에서 바다(황하?)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였다. (번역 끝)

장안에서 요수까지 20여일이 걸린 것으로 보아 이 요수는 분명 현 요녕성 요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자치통감>에 보면 장안에서 출발한 수양제의 선두부대가 20여일 후 낙양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양제나 당태종이나 거의 같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당시 래주는 산동성 래주가 아니라 하남성 낙양 부근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장안에서 10월 14일 출발한 당태종이 11월 초에 요수까지 갔다가 하천이 범람하여 낙양으로 되돌아 온 것이 한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낙양과 요수가 가깝지 않고서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지리적인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11월 초에 범람하는 큰 강은 낙양 근처에서는 황하 밖에 없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현 황하를 요수라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당태종이 장안(서안)에서 요수에 갔다가 낙양에 돌아오는데 20여일 걸렸다면 요수는 낙양 근처 아니겠는가?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당태종은 요수에서 강이 범람해서 돌아 왔으므로, 요택은 요수를 건너고 난 다음이므로 요수의 북쪽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단고기>에 언급된 요서 10성의 하나인 요택의 위치는 요택(遼澤)은 황하 북안 왼쪽”이라는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기록인지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이후 당태종은 5월 10일 요수와 요택을 건너 흙으로 만든 다리를 다 없애는 배수의 진을 치는 과감한 작전을 감행한다. 군졸들의 전투심을 다그치기 위해 이 다리들을 다 없앴기 때문에, 안시성에서 패해 돌아갈 때 연개소문에게 쫓겨 퇴로(흙다리)가 없어진 요택에 빠져 죽을 고생을 하는 것이다. 아래와 같이 원문을 인용하기로 한다.

五月十日,唐太宗亲率六军经北平(今河北卢龙)、辽泽(今辽宁北镇与辽中之间泽地)渡过辽水,此时太宗遇到的难题与隋炀帝是一模一样的,是时辽泽泥淖二百馀里,人马不可通,将作大匠阎立德布土作桥大军才勉强得过,此时的辽泽上面还浮有很多当年隋军将士的遗骨,太宗当时就命人将之收敛埋葬。

(번역) 5월 10일 당태종은 친히 6군을 거느리고 요수를 건너고 북평(지금의 하북노룡), 요택(지금의 뇨녕북진의 요중의 습지)을 지났다. 당시 태종이 만난 어려움은 수양제와 만났던 것과 같았다. 사람이 지날 수 없는 진흙탕이 200여리 되어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없었던 것이다.  염립덕이 흙을 부어 다리를 만들어 그나마 건널 수가 있었지만 요택 위의 수면에는 수나라 병사들의 유골이 떠다녔다. 태종은 명령하여 그들을 매장하라고 명하였다.

渡过辽水之后太宗下令毁去桥梁,以此向士卒表示背水一战的决心。....(생략)... 辽东城对于唐军是有特别的意义的,炀帝三征,均止步于辽东城,因此对于唐军来说辽东城是必须越过的一道坎。

요수를 지난 후 태종은 다리를 파하고 사졸에게 배수진을 치고 싸우려는 결심을 하였다. ..... 요동성은 당군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의가 있었다. 수양제의 3차례에 걸친 요동정벌 모두 요동성에서 앞으로 행군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요동성은 당군이 기필코 넘어가야 할 고비였다. (번역 끝)

위 기록에서 보듯이 요수와 요택을 지나면 맨 먼저 당도하는 곳이 고구려의 요동성이었다. 왜냐하면 요동성은 고구려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는 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성들은 다 험한 산에 의지해 있으나, 요동성은 평지에 구축된 견고한 성이라는 것을 <자치통감>과 <신.구당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식민사학계는 이 요동성을 현 요녕성 요하 근처에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일제의 식민사학을 그대로 계승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엉터리 이론이며, 재야 역사사이트에서는 <한단고기>의 기록을 인용하여 요동성을 현 난하 근처의 하북성 북동부 진황도시 창려로, 요택은 한참 밑에 떨어져 있는 하북성 남부의 황하구로 비정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요서 10성이 요동성 서쪽에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어떻게 서쪽에서 진군해 오는 당군이 요서 10성의 동쪽에 있는 요동성을 먼저 공격할 수 있겠는가? 사서의 기록은 전혀 참조도 안하고, 이미 지명 조작이 된 중국지도만 보고 우리 역사 지명을 비정한 한심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  모 역사싸이트에서 중국에서 이미 지명조작한 지도만 보고 우리 역사를 해석한 지도.  이 지도에는 황하 입구에 요택이 있고 서에서 동으로 안시성, 요수, 요동성이 있다고 하나, 이 배치는 사서의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분명 사서에는 당태종은 요수를 건너 요택을 지나 요동성을 거쳐 안시성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한심한 지명비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태종이 빠진 요택은 어디인가? 

위 글에서 보듯이 요수와 요택은 붙어 있어야 하며, 이곳을 지나면 바로 철옹성이며 고구려로 들어가는 길목인 요동성과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먼저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기다 빠져 혼줄이 난 요택이 어디인지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아래와 같다.

(沼泽排水) 自广宁(今北镇)以东至辽河有大片低洼沼泽地,古称辽泽(소택배수 : 광령이동에서 요하까지에 있는 큰 웅덩이 소택지까지로 고칭 요택이라 한다) 遇雨泥泞,泽内有绕阳河及柳河等多条支流。隋唐东征辽东都临时大力修筑桥梁道路(수와 당의 고구려 정벌 시 임시로 교량도로를 수축했다)明代沿泽之南路开河名路河,东起海城县境,西至广宁,长200余里,(동쪽은 해성현에서 시작하여 서쪽은 광령까지로 200여리이다) 后缩短到170里,用以排泽水,运粮饷,防边疆,堤岸作为陆路,至明末淤废。清代屡次修沈阳至广宁道路百余里

여기서 요택을 밝히는 중요한 지명인 광령을 다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검색하면 아래와 같이 여러 군데가 나오는데 이 중에 황하와 인접하고 있는 곳은 네 번째의 하남성 수무현 서남 이외에는 없다. 수무현은 황하 북쪽에 있는 하남성 초작(焦作)시에 있는 현으로 아래 지도와 같다.    

(广宁郡 광녕군)
1. 东晋置,后魏因之,后废,故治在今河北琢鹿县西。(하북 탁록현 서)
2. 东晋时西秦置,西魏更名广安,北周废,故治在今甘肃漳县西南五十里。(감숙성 장현 서남 오십리)
3. 南齐置,今阙,当在广西境。(광서성 경)
4. 东魏置,北周废,故城在今河南修武县东南。(하남성 수무현 서남)
5. 后魏置,北周废,故城在今山西寿阳县东。(산서성 수양현 동)
6. 北齐改新蔡郡置,隋废,故治即今河南新蔡县治。(하남성 신채현)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양만춘장군에게 눈알이 빠져 도망가다 빠진 요택은 바로 황하 북안 하남성 일대의 습지로 볼 수 있다. 지금은 황하와 심수의 퇴적물이 쌓여 늪지대가 많이 없어져 제원시 서쪽 일대만 황하습지(黃河濕地)로 남아 있으나 당시에는 길이가 200리나 되는 넓은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낙양 북쪽 황하북안과 제원시 일대에 아직도 황하습지가 남아 있다. 지금은 관광지이다.

 
<한단고기>에서 언급된 요서 10성 중 “遼澤在黃河北流左岸(요택은 황하가 북류하는 물줄기의 좌측에 있다)”이란 기록은 지금의 황하 북쪽에 있는 하남성 일대를 말함이다. 특히 지리학적으로 볼 때, 산서성에서 흘러온 큰 강인 심수(沁水)와 바다라고도 불린 황하가 만나는 하남성 초작시 무척현(武陟縣) 좌.우 일대는 늪지대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

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볼 때의 요택은 심수의 동쪽부터라고 나와 있으나, 필자의 견해로는 분명 당태종이 빠져 죽을 고생을 한 요택은 황하 북쪽 심수의 서쪽에 있는 요택이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사서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당태종과 수양제가 산서성 남부에 있는 고구려평양성으로 갈 때 요수는 건넜지만 심수를 건넜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동쪽 요택을 이용했더라면 심수를 건너야 고구려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치 바다와도 같이 넓은 황하의 소낭저수고(小浪底水庫)와 심수 사이에는 작은 강들이 많아 지리학적으로 이 일대는 습지대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 그 습지대는 워낙 유명해 아직도 현 지명 황하습지로 나와 있다. 지금은 제원시 서남부에 남아 있지만, 당나라 때는 제원시 남부 황하변에 길이가 200리나 되는 습지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낙양에서 황하를 건너 산서성 남부로 들어가려면, 평지로 된 도로는 왕옥산(王屋山) 앞을 지나 원곡(垣曲)을 지나는 길 밖에는 없다. 나머지 길들은 높은 산을 거쳐 가야 한다. 당태종은 고구려 산성의 견고함이 두려워 평지를 이용했다고 사서의 기록에 나와 있다. 이 평지에 있는 원곡이 요동성으로 보이며, 요동성을 지나면 산서성 남부의 운성분지로 들어설 수 있다.

따라서 사서에 기록된 당태종의 진격로나 도주로를 검토해 보면, 분명 당태종은 심수 동쪽의 습지대(요택)가 아닌 심수 서쪽의 습지대(요택)로 지나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의 이 견해는 하남성과 산서성의 지세(地勢)가 표시된 지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있다.

▲  바다와 같은 황하와 심수 같은 큰 강이 만나는 하구 좌우로는 습지대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 황하는 낙양 북쪽에 있는 소량저수고를 지나면 평야지대로 언제 어떻게 범람할 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요택은 절대로 식민사학계의 이론인 요녕성 요하나 재야의 역사싸이트가 주장하는 하북성 황하구 근처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택이나 요수는 낙양에서 먼 거리에 있으면 절대로 수양제와 당태종의 전쟁 기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요수과 요택을 지금의 요녕성 요하에서 찾는다든가, 일부 재야 역사싸이트(www.cooX.XXX))에서 말하는 요수는 난하이고 요택은 하북성의 황하구(黃河口) 근처라는 이론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은 중국 사학계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지리사전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를 이용해 우리 역사의 고대지명을 밝히면 중국에서도 아야 소리하지 못할 것인데, 엉터리 이론인 식민사학은 말할 것도 없고, 재야의 모 역사 싸이트에서는 중국에서 이미 지명조작한 지도만 보고 우리 역사의 지명을 비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임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래서야 우리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찾을 수 있겠는가!!!



ASDFA 09/05/19 [23:49] 수정 삭제  
  年十月十四日,唐太宗乘车驾由长安行幸洛阳.... 十一月初,营州都督张俭等帅唐军进至辽水西岸,正值河水泛滥,久不得渡。太宗以其畏惧怯懦,召回洛阳....(생략)....
저 글에 당태종이 요수서안까지 같다는 글이 어디나오세요.
당태종이 낙양 있었기에 召回란 단어를 쓰지.
처음부터 틀리리 뒤는 볼필요도 없네.
남원윤 09/05/26 [10:22] 수정 삭제  
  직접 그 논문을 찾아보세요.. 너무 딴지가 심하시군요..
태원 21/06/18 [12:47] 수정 삭제  
  고대로부터 중국 화하족과 동이족의 경계는 난하와 대흥안령산맥이었습니다... 중국인들이 동이와 북적을 막기위해 만든 장성의 위치로 유추할수도 있어요... 산해관은 천하제일관이라 했고 중국과 이민족간의 관문이었습니다... 역사적, 지리적, 사료적으로 보아 고구려와 수,당나라의 경계도 난하라고 보는것이 합리적입니다... 한사군 낙랑의 위치가 난하 동쪽지역이었다는 것만 보아도 위만조선의 위치가 난하 동쪽 발해만지역이었다는걸 알수 있어요... 한사군을 쫓아내고 조선의 고토를 회복한 고구려의 영토 역시 그렇게 보는것이 타당합니다... 부분적인 사료 한두가지만 보고 전체 역사 사료를 뒤집으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태원 21/06/18 [13:03] 수정 삭제  
  현재 중국의 지리적 분할에서도 동북3성 요령성의 경계는 난하지역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지리적 경계를 무시할수는 없어요... 역사 사료는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많으므로 그런 경우 고대로부터 지속된 지리적 경계를 바탕으로 국경을 유추하는것이 의미있는 방법입니다... 신라와 백제가 수백년간 나누어져 있었던 이유도 지리상의 경계가 있었던 영향이 컸죠... 중국 중원은 황하를 제외하고는 큰 지리적 경계점이 없으므로 국가, 이민족이 뒤엉켜 수백년간 살수 있을정도로 안정적인 곳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이합집산하고 싸우며 뭉치고 흩어질수밖에 없지만 지리적 경계점이 명확한 경우 국경이 오랜세월 유지가 가능하죠... 중국인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생각하며 세운 만리장성의 의미는 일개 사료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의미가 있습니다... 만리장성이 중국과 동이족간의 국경이라고 보는것이 타당합니다... 그 이전에는 난하와 대흥안령산맥이었죠... 지엽적인 사료에 편협된 역사관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당신이 근거로 든 사료와 전혀 다른 내용의 사료도 많이 있어요... 지형과 유적을 근거로 한 합리적인 역사 사료 해석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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