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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만의 폭로, 5·18가두방송 차명숙씨 "하얀 속옷 잉크색 되도록 살 터져 피흘렀다"

편집부 | 기사입력 2018/04/30 [12:35]

38년만의 폭로, 5·18가두방송 차명숙씨 "하얀 속옷 잉크색 되도록 살 터져 피흘렀다"

편집부 | 입력 : 2018/04/30 [12:35]

 

▲ 실질권자 전두환은 국민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심판만 남았을 뿐.    © 편집부

 

게엄군: “너는 5·18때 200명을 죽였다. 너 같은 것은 수사받다 죽어도 도망갔다고 하면 그만이다.”

차명숙씨: "보안대와 상무대 영창에서 받은 고문으로 하얀 속옷이 까만 잉크색으로 변하도록 살이 터져 피가 흘러나와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 차명숙씨가 30일 광주시의회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편집부

 

▲ “너는 5·18때 200명 죽인 장본인…짐승같은 고문” 5·18가두방송 차명숙씨의 기자회견. 사진=뉴시스     © 편집부



30일 광주광역시의회 브리핑룸.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고문을 당했던 차명숙(58·여)씨가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차씨는 5·18 당시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는 가두방송을 했던 장본인이다.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인 차씨는 80년 5월 당시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차씨는 “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505보안대 지하로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며 “여성들에게 가해진 고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치욕을 줬으며, 하나의 물건에 불과했다”고 증언했다. 

 

차씨는 80년 5월 당시 양재학원생으로 열아홉살이었다. 그는 5월19일 계엄군에 의해 죽어가는 시민들을 보고 자진해 거리방송을 시작했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병원에 실려온 부상자들을 돌보던 중 기관원들에게 붙잡혀 505보안대로 끌려갔다. 끌려간 날은 22일이나 23일쯤으로 보안대와 상무대 영창에서 수사를 받으며 갖은 고문을 당했다.

 

차씨는 "아직도 언제 붙잡혔는지, 어느 병원에서 붙잡혔는지 정확한 기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며 "보안대 지하에 내려가는 수많은 계단만이 희미하게 생각난다"고 말했다.

 

그는 "보안대와 상무대 영창에서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며 "계엄군에 의한 고문은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했으며 여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떠올렸다.

 

이어 "여성들에게 가해진 고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치욕적이었고 조금의 인권도 보호되지 못했으며 여성들은 끌려온 하나의 물건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그는 11공수여단 계엄군 병력이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발포를 감행한 5월 21일 병원에서 부상자를 돌보다가 기관원에게 붙잡혔다.

505보안대와 상무대 영창을 거쳐 광산경찰서, 광주교도소로 끌려다니며 갖은 가혹 행위를 당했다.

차 씨는 기자회견에서 "무릎을 꿇게 한 뒤 군홧발로 밟고 짓이겨도 신음 한 번 내지 못했고 어린 학생을 상무대 책상 위에 앉혀 물을 끼얹어 가며 어깨가 빠지도록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라고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저 또한 보안대와 상무대 영창에서 받은 고문으로 인해 하얀 속옷이 까만 잉크색으로 변하도록 살이 터지고 피가 흘러나와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 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가두방송'에 나섰다가 연행된 차명숙씨가 공개한 수감기록. 기록=차명숙씨 제공     © 편집부



가혹 행위는 교도소로 이감되고 나서도 끝나지 않았다.  

 

차 씨는 "교도관 세 명이 들어와 등 뒤로 수갑 채우고 곤봉을 끼어 양쪽에서 들고 나갔다. 이미 한 차례 고문을 받고 난 뒤였기에 2차 고문은 더더욱 두려웠고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다"라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자살을 방지한다는 명목 아래 30일 동안 징벌방에서 폭 10㎝, 두께 3㎝ 혁대를 차고 25㎝ 쇠줄에 묶인 가죽 수갑(혁시갑)을 양쪽 손목에 찬 채 먹고 자고 볼일까지 보면서 짐승만도 못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라며 마른 울음을 삼켰다.  

 

혁시갑은 수갑을 채운 손을, 허리에 채워 둔 폭 10㎝ 두께 3㎝의 가죽 허리띠에 25㎝ 길이의 쇠사슬로 연결해 놓은 계구다. 

 

차씨는 "쇠줄에 묶인 가죽수갑을 양 손목에 찬 채 먹고 자고 볼일까지 보면서 짐승만도 못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면서 "38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기억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차씨는 자신이 왜 교도소에서 다시 끌려가 고문수사를 받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최근에야 수감기록을 확인하고 다시 고문받은 이유를 확인했다.

 

그는 "수감기록에 80년 9월21일 오후 8시쯤 광주교도소 여사1호실에서 같이 수감 중이던 동료에게 '불온언사'를 발언했다고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

 

차씨가 공개한 수감기록에는 '불온언사 발언'이라는 제목에 '5·18때 전두환 첩자, 방첩대 첩자, 경찰관 첩자들이 우리 사이에 끼어 간첩이 있는 것처럼 연극을 하며 독침사건을 벌였다', '이승만 때 여순사건, 제주사건만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똑똑한 사람은 다 죽이려고 했었다', '5·18에서 정부는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학생·시민이 다쳐 죽은 것은 보여주지 않고 군인들만 다쳐 후송한 것만 보여주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있다. 조사교위, 보안교감, 보안과장, 부소장 등 결재라인 직인도 찍혀있다.

차씨는“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할 당시 ‘너는 200명을 죽인 장본인이니 평생을 죄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며 “‘너 같은 것들은 수사받다가 죽어도 도망갔다고 충분히 얘기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여기서 죽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시민군들을 학살한 계엄군이 차씨의방송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며 오히려 그를 가해자로 몬 것이다. 
 
차씨는 이날 기자회견문을 낭독한 뒤 철저한 진상 규명과 광주교도소 측의 사과 등을 요구했다. 그는 “38년이 되도록 당시의 끔찍한 기억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5·18 당시 자행된 고문수사와 잔혹 행위에 대해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관련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광주교도소는 지금이라도 고문수사와 가혹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5·18을 연구하는 단체 등은 아직도 80년의 상처를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있는 여성들을 찾아내 소중한 증언을 듣고 역사적 진실로 기록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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