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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고구려.백제)뿌리-고리족은 누구인가?

고리(KOREA)족은 고대 중국.몽골.만주.한반도.일본역사의 주역

윤복현 시사칼럼 | 기사입력 2009/01/14 [03:27]

부여(고구려.백제)뿌리-고리족은 누구인가?

고리(KOREA)족은 고대 중국.몽골.만주.한반도.일본역사의 주역

윤복현 시사칼럼 | 입력 : 2009/01/14 [03:27]
신시배달국에서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까지 그 중심세력인 고리족이 한반도를 포함하여 중국과 만주와 몽골,일본 등 동북 아시아를 지배했다. 또한 이후에도 이 지역은 같은 고리족 혈통으로 갈라져 나간  금나라, 거란(클한=궐안), 몽골제국, 그리고 만주의 청나라까지 이민족의 지배를 허락하지 않고 지배했었었다. 그러나, 근대의 100년 이내에 이민족들(러시아, 유전학적으로 동남아에서 기원하여 고대 동북방 지역에서 내려온 동이족-염제신농씨.태호복희씨- 문화로 번성하게 된 중국 한족)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 고대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선조들의 기상을 부활시켜 대 한국연방시대를 열어야 겠다

 
우린 어느새 과거를 잊은 채 좁아터진 한반도를 두 동강으로 갈라서 대립하고 있으며, 한족에게 패배하고 한반도로 들어와 쿠테타로 권력을 찬탈하고 선비족 당나라를 끌여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공멸시킴으로써 아시아역사의 주역을 중국으로 전환시켜버리고, 한반도에 안주해 버린 나머지, 일본열도로 망명하여 일본으로 다시 태어난 백제세력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의 원흉이 되었던 신라 흉노족의 유전자들은 중국과 중앙 아시아와 유럽을 지배했던 북방유목민의 기질을 상실하고 오늘도 한반도에 갇힌 채, 동족인 북한과의 화해협력노선보다는 남북합의를 위반하고 북한을 자극하면서까지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차원의 적대노선으로 오로지 자신들만의 기득권과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오만으로 외세에 밀붙여 살아 가고자 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우물안 개구리들의 노선으로는 이 민족의 미래가 암울하고 불투명하다 할 것이다. 광활한 초원을 누비며 대륙적 기상을 떨쳤던 우리 선조들의 대아적인 유전자를 부활시켜서 한반도를 넘어 유라시아 대륙으로 말대신 철로로 달려 단군후예들을 만나고 인류가 공생공영할 수 있는 주역으로써 한민족 연방시대로 나가야 할 것이다. 
 
[한단고기]기록에 따르면 단군3조선의 중앙통치를 담당한 진조선의 22대 색불루단군(서기전1285~)부터 44대 물리단군(~서기전426)까지 모두 고씨단군이고, 47대 고열가 단군이 고씨단군이다. 45대 구물단군(서기전425~)부터 46대단군까지는 고씨인지 불명인데 고씨일 가능성이 많다. 구물단군은 백민성욕살로 물리단군의 명을 받아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정벌하고 추대받아 단군이 되었다. 단군왕검이 개국한 단군조선은 처음에는 오가들이 만장일치제도인 화백회의에서 단군을 추대하였는데, 21대 소태단군으로부터 선양받은 색불루단군부터는 민주주의 방식의 승계가 아니라, 대를 이어 고씨단군이 되었다.
 
▲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시조 천왕랑  해모수 ( 출처- 다물넷 )

47대 고열가 단군이 단군조선을 폐문하고 산으로 들어가자, 부여를 개국한 해모수는 서기전239년 임술년 4월 8일 웅심산(熊心山)의 난빈(蘭濱)을 수도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서기전232년 단군조선의 5가 연합정권을 접수하여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이었다. 해모수는 고씨단군의 종실이고 고리국(藁離國) 출신이며 고리국은 해모수의 고향으로 선조의 나라이다.  해모수의 고리국은 단군조선의 구려국(句麗國)과 동일한 나라로 고구려라고도 한다. 그래서 해모수의 북부여를 고구려라고도 한다. 해모수의 원래 성씨가 고씨이기 때문이다. 고주몽의 성씨가 해씨이기도 하고 고씨이기도 하다. 즉 해(解)와 고(高)는 같다. 해는 태양으로서 하늘 높은 곳에 있어 세상을 다 비춘다. 고추모가 나라이름을 고고리(고구려)라 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문구 문명이 발견된 산동반도에서 출토된 동이족의 팽이형 토기와 아사달 모양(네모 안).  [아사달 문양]의 위 부분에 태양과 山 형태가 나온다.태양(원)은 아사달족(고대한국인)들이 [해뜨는 동방] 사람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해는 동방에서 '탄생'한다. 말하자면 동방은 태양의 고향.
그래서 고대한국인들은 세계 어디를 가던지 자신들을
[태양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표현했다.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의 주역인 치우왕조도 태양(라)을 숭배했다.

 
 고대 한국인들(동방족)은 태양을 환한님의 상징으로 숭상하였기 때문에 한반도와 만주에서 이동하여 유라시아.아메리카 문명을 건설한 고대 한국인들을 태양족이라고도 불리였다. 백두산지역(4천년전에 기록했다는 중국지리서 '산해경'에 소호금천씨족은 "동해밖 골짜기-백두산지역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에서 산동반도로 이동하여 슈메르문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대문구문명(모계사회국가)을 건설한 소호금천씨의 유적지에서도 태양이 떠오르는 그림이 출토되는 배경이라 하겠다.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본부여 시조 고두막 (출처 - 다물넷)

 
기원전194년 번조선의 기준왕이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빼았기고 위만이 번조선을 차지하였는데, 기원전108년에 위만조선의 내부분열과 함께 한나라의 침입으로 나라를 잃자 부여의 고두막(高豆莫)이 의병을 일으켜 동명(東明)이라 칭하고 한나라의 침입을 토벌하고 골본부여를 개국하였다. 참고로 위만조선은 내부분열로 망했지, 한나라의 침공으로 망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한나라가 설치했다는 한4군의 이름은 사마천의 [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한나라 육군과 수군 장수들이 전쟁에서 참패하여 참수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위, 한4군의 실체는 고두막의 부여군과 번조선지역의 동이족의 연합군대가 한나라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회복한 땅으로 조선4군이라 해야 맞다. 따라서 한4군이란 이름자체는 1차 자료인 사마천[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를 비하해서 부를 필요는 없는 것이며, [조선4군]으로 불려야할 것이며, 조선4군의 위치는 중국 요서지역으로 인식해야 한다.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당시 조선민족의 영웅인 고두막은 47대 고열가 단군의 현손이라고 전해진다.
 
이렇게 단군조선 22대 단군부터 부여(고구려=백제=일본)의 통치자들이 중국문명의 시원이 되는 홍산문화와 청동기문화가 일어나 요서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던 고리국의 왕족이였던 고씨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뿌리와 실체를 알아 보도록 하자.
 
1.중국문헌의 예.맥.한(韓)
 
지금 학계에서 말하는 한민족(韓民族)은 아득한 고대로 올라가면 세 종족으로 나뉜다. 중국문헌에는 이들 3종족을 예.맥.한(韓)으로 분류하고 있다.
 
먼저 한반도 남단에 자리 잡고 살던 한(韓)족이다. 즉, 47대 고열가단군을 마지막으로 단군조선연방의 해체이후, 한반도남부지역의 마한, 변한, 진한 3한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단군3조선 중 마한(왕검성-북한 평양)에 속하는 한반도 마한족이 한반도의 토착민들이다. 한반도는 마고문화가 깊게 배인 고인돌의 천국이다. 단군3조선 중 문명의 시원지를 의미하는 '천일'에 해당하는 마한의 '마'는 '마고'에서 온 말이다. 한반도인들은 마고문화를 간직한 마고의 후손들이다. 세계70%가 분포하고 있는 한반도 고인돌은 마고전설이 깃든 흔적이다. 호남의 고인돌은 특히 마고전설로 가득하다. 한반도의 마고전통을 간직한 한반도 북부지역의 한국인들은 한반도인들의 후손들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는 그들의 어머니땅인 것이다. 다른 종족으로는 한반도 지나서 북쪽과 요동벌에 걸친 중국 동북지방 서쪽에 살던 예(濊)족이다. 또 다른 민족으로 우리 민족의 주류인 북방계 유목민족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만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던 맥(貊)족이다. 즉, 중국 동북지방 동쪽, 즉 옛날에 있었던 부여와 고구려다. 그러니까 한민족은 예족과 맥족과 한(韓)족이 합친 민족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 중국 사서에 나타난 맥족의 시기와 장소(숫자는 이동 순서 : 1은 추정). 맥족의 등장에 관한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다. 그러나 맥족이 B. C 3세기 경 만주 중부의 송화강(흑룡강 최대지류) 유역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맥족은 고대 중국사서의 고리국(槀離國)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이고, 이들이 중국문헌에 등장하는 동호(東胡)라고 추정한다. 박원길 교수는 이 맥족의 원래 이름은 ‘코리’라고 추정한다. 즉 ‘위략(魏略)’이나[위략에는 고리(槀離 : 중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까오리])] ‘몽골비사’의 기록처럼, 맥족의 원래 명칭은 모두 코리(Khori)를 음역한 것이다. 특히 몽골은 ‘몽골비사’에서 몽골의 기원이 이 코리족의 일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흑룡강 중상류 일대는 고대 부여의 북쪽 지역이기도 하다.그런데 고리 족들이 이동한 경로를 유심히 보면 전설속의 치우천황(蚩尤天皇)의 탁록대전(鹿大戰 : 연대 미상)의 결과 이들이 산서지방 쪽으로 이동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예와 한(韓)은 한 걸음 앞선 농경민족이었고, 맥족은 비교적 늦게 까지 수렵민족이었다. 중국문헌에는 예족은 주로 하천지역에 사는 종족으로,맥족은 사냥을 하는 수렵종족으로 특징짓고 있으며, 예족은 요동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맥족은 본래 홍산문화와 청동기문화이 일어난 요서지역에 거주했으며, 청동기문화가 동진한 맥족에 의해 예족에게 전파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융합하여 예맥족을 형성했다고 보고 있으며, 이 예맥족은 부여와 고구려의 직계선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동지역에 거주하고 주로 하천에서 생활한 예족(=숙신=조선족)은 부드러운 기질이라고 볼 수 있고, 사냥한 맥족은 강인한 기질이였다고 보여지며, 단군조선과 부여.고구려을 형성하는데 있어 지배층은 맥족이였고, 피지배층은 예족이였다고 본다. 그리고 중국문헌에 기록하고 있는 맥족이 바로 한단고기에서 골본부여 시조인 고두막의 종족인 고리족이다. 맥족(=고리족=단족)의 고리국의 위치가 유라시아대륙으로 나가는 길목인 요서지역으로 홍산문명이 일어난 지역이다. 고리는 단군조선을 형성했던 5색인종 아홉겨례를 의미하는 고려.구려.코리다. 즉, 단군조선을 통치했던 황금종족으로서의 중심종족이 맥족이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겠다. 그래서 힘이 없는 상태를 '맥알이'가 없다고 표현하는 이유다. 맥족(고리족=코리=단족=하늘숭배=유목.수렵생활)과 예족(숙신=색슨=조선=조센=곰족=어로.농경생활)이 대통합한 나라를 '단군조선'이라 부른 배경이라고 하겠다. 고구려가 광개토태왕비문을 통하여 스스로가 맥족이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역사적 배경이라 하겠다.비문은 고구려의 지배종족이 맥이었다는 사실을 수묘인(守墓人)호구에 대한 부분에서 새로 들어온 한(韓)과 예(濊)에 대한 구절로서 지배민족인 고구려 자신이 맥족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맥족은 오랫동안 생존해 있었으면서 백제(=일본)라는 또 다른 맥족의 파생 국가를 탄생시켰고 중국을 위협할 정도의 강력한 국력을 보유하기도 했었다.
 
2.고리국에서 나온 부여(고구려=백제=일본)

고구려 노선을 계승한 묘청의 난을 진압시킨 신라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통하여 의도적이든 아니면 지식이 모자라서 그랬든 하여간 고두막(동명성왕)과 고추모라는 역사적인 두 인물을 한사람으로 축약시키는 바람에 고구려의 역사가 150~200년간 축소되어 버렸다. 고구려역사의 축소는 광개토대왕비의 판독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광개토태왕비는 명백히 북부여에서 고구려가 출발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고구려는 북부여의 해모수왕조를 무너뜨리고 고두막왕조인 골본부여를 승계한다는 뜻에서 고추모와 동명성왕인 고두막을 동일시한 했는데, 이것은 [한단고기]의 기록이 증명하듯이 동부여에서 망명한 고추모가 고두막의 아들 고무서를 이은 골본부여의 3대 단군으로 승계한 배경때문이다.
 
그러나 고추모는 골본부여의 토착세력에게 쫓겨나 남하하여 고추모를 지지하는 비류부족과 연타발과 소서노의 도움으로 지금의 압록강변의 골본성에서 고고리(고구려)을 개국한 것이다. 참고로 소서노는 골본부여 2대 단군 고무서의 둘째 딸이 아니다. [한단고기]에 고무서의 둘째딸은 혼인을 하지 않는 공주로 기록되어 있고, 고추모와 만난 소서노는 이미 동부여 해부로 서손으로 죽은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온조라는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애를 낳을 수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구려초기까지 내몽골지역에 골본부여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끊임없이 부여와 후한세력이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는 중국기록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태조대왕(太祖大王) 69년(A.D 121년) 12월 왕이 마한, 예맥의 1만여 기병과 같이 현도을 포위하니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 한병과 합력하여 막아 싸워 왕군이 대패하였다. 十二月 王率馬韓.濊貊一萬餘騎 進圍玄?城 扶餘王遣子위구태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후한서-부여전]에는 永寧元年(120년),乃遣嗣子尉仇台詣闕貢獻,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後漢書/列傳/卷八十五東夷列傳第七十五/夫餘) "영녕(永寧) 원년, (부여왕은) 아들 위구태를 보내 조공하였다. 천자는 위구태에게 인수와 금과 비단을 주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고구려와 싸운 위 기록들의 위구태의 실체는 중국의 [북사][수서]기록에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仇台)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요동태수 공손탁이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라고 기록하고 있어 동명성왕 고두막의 후손임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골본부여와 고추모의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전쟁을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구태세력은 고구려를 후면에서 공격하기위하여 구태세력이 한반도로 남하하여 대방고지(황해도)에 나라를 세우고, 이후 온조백제를 통합하여 해상제국 백제의 주역이 되니 중국문헌들이 기록하고 있는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백제에서 시조에게 제사드리는 대상은 바로 '구태'였음이 [주서(周書)]·[북사(北史)]·[수서(隋書)]에서 한결같이 "백제에서는 시조 구태의 묘를 왕성에 세우고 사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의 내용이다. 백제관련[중국사서들]의 공통점은 구태가 후한 시기 요동에 웅거했던 공손탁의 딸을 아내로 하였고, 동이강국이 되었으며, 초기에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가서 그로 인해 백제가 되었다는 기록들이 증명한다 하겠다.

구태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왜가 자주 등장한다. 광개토태왕의 비문내용을 보자.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백제)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 연선(連船)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

위 광개토태왕비문내용의 역사적 배경은 이렇다. 이미 구태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지역을 거점으로(일본 아스카지역과 한강변지역에서 발견된 대형 전방후원분의 초기형태로써 호남해안지역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의 초기무덤들은 바로 구태백제의 거점지역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시 가야의 흉노족 김수로 세력과 가까운 대마도와 구주지역 등 일본열도를 북방의 기마부대로 점령하고(일본열도에 북방기마유목민들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배경) 친위세력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태백제는 한반도로 이주하기 전에 요서지역에서 후한세력과 연합하여 요동지역에 있는 고구려를 지속적으로 공격한다. 고두막의 골본부여세력인 구태백제와 고구려가 부여의 정통성을 두고 패권을 다툰 전쟁이 지속되는 배경이다. 그리고 왜는 가야흉노족 김수로세력이 김해지역의 철을 무료로 제공하고 군사를 요청하자, 왜는 가야의 군사지원 요청을 수용하여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의 흉노족 김알지세력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자, 가야.왜의 연합공격에 다급해진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고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하는 이유다. 당시 왜는 구태백제와 가야의 지원세력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 일본열도로 연결되었던 구태백제세력의 거점지역으로 추정되는 전남 해남의 초기 전방후원분 무덤-전라도 해안지역으로 분포되어 있다. 멀리 바다가 보인다. 전남해안지역의 소규모 전방후원분은 일본 아스카 지역과 서울 한강변의 대형규모의 전방후원분의 초기 유형이다. 이것은 당시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여 세력을 구축했던 구태백제세력의 활발한 활동상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부여에서 나온 고구려와 백제와의 전쟁의 본질은 누가 부여의 주인인가를 두고 벌인 패권전쟁이였다. 그럼 부여의 실체는 무엇인가?
 
동명성왕 고두막에 대한 전거는 굳이 한단고기를 운운하지 않아도 중국사서에 최초 등장한다.
 
『삼국지』위서에 보면, 위략을 인용한 글이 있다.

《魏略》曰:舊志又言, 昔北方有<高離>之國者, 其王者侍婢有身, 王欲殺之, 婢云:[有氣如鷄子來下, 我故有身.] 後生子, 王捐之於혼中, 猪以喙噓之, 徙至馬閑, 馬以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也, 乃令其母收畜之, 名曰<東明>常令牧馬. <東明>善射, 王恐奪 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以弓擊水, 魚鼈浮爲橋, <東明>得度, 魚鼈乃解散, 追兵不得渡. <東明>因都王<夫餘>之地.

"[위략]에 옛기록에 또말하기를 옛날 북방에 '고리지국'이있었는데 그 왕을 모시던 여자가 임신을 하였으므로 죽이려 하였다. 여자가 말하기를 닭과 같은 기운이 아들을 내려주고부터 임신을 했다하고, 후에 아들을 낳았다. 왕이 아이를 뒷간에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주고 마굿간에 옮겨놓으니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하늘이 아들을 낸 것이 아닌가 하여 그 어미에게 돌려 주어 '동명'이라 이름하고 말을 기르게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므로 왕이 나라를 빼앗길까 우려하여 죽이려 했다. 동명이 달아나다가 남쪽 '시엄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 자라등이 떠 올라 다리를만들어 동명을 건너게하고 흩어지니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동명이 부여땅에 도읍을 정하고 왕이 되었다."

[위략]에서 말하는 고리(高離)는 고려(高麗)와 발음이 같은 '구리.구려.코리'다. '고리국'은 요서지역 시라무렌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맥족의 나라이다. 고리국왕의 시비녀가 임신을 했다가(아비가 누군지 몰라서) 버려지고 그 버려진 아이가 동명인데 도망하여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고구려 시조라고 하는 주몽의 탄생설화와 같다. 이것은 고구려가 해모수의 북부여(=고두막의 골본부여)를 계승했다는 의미로 고구려개국신화다. 신화는 역사적 사실의 함축한 문학적 쟝르다. 따라서 신화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역사적으로 풀이해야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한단고기]에는 "고두막한이 동명성왕이고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동명이라 불렀는데, 신라(=진한유민들+박혁거세의 부여족+흉노족)의 옛 땅이라고 했다. " 이 기록을 가지고 일부 신라사관론자들은 엉뚱한 해석을 하겠지만, 그것은  신라를 구성했던 흉노족의 땅이 아니라, 신라의 기원이 되는 진한유민들(진시황의 노역에서 한반도남부로 도망해온 진한유민들)의 나라 진한(부여)이였음을 기록하고 있는 대목이다. 즉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바로 동명왕 고두막한의 나라 출신이라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바로 고두막한의 거서간이었던 것이다. 거서간(居西干)은 서쪽 보루의 방어장을 뜻한다. 박혁거세가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파소를 따라 한반도의 동쪽 진한땅으로 가서 본국 즉 원래의 진한땅에서 온 연유로 추대를 받아 거서간이 되었던 것이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바로 북부여 제실녀[帝室女]였다. 제실녀란 공주가 아닌 신분을 가리키는데, 서기전57년에 박혁거세가 13세이므로 파소가 박혁거세를 출산한 때는 서기전69년이므로 북부여 단군 고두막한 때인데, 즉 파소는 고두막한의 손녀 즉 고무서의 큰딸로 추정되는 것이다.
 
신라 흉노족(김씨 왕족)의 옛 땅은 본래 본래 흑룡강지역이다. 흉노족의 시조가 단군조선의 지방장관(열양의 욕살)이였던 색정인데, 정치를 못하여 민심을 잃자, 약수로 유배를 보냈다. 후에 유배에서 풀어주자 약수에서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단고기]는 기록하고 있으니 흉노족의 옛땅은 흑룡강지역인 것이다. 북만주 초원지역에서 몽골지역으로 이동하여 후에 중국 북부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지배한 흉노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토벌이후 사분오열된 흉노족은 다시 몽골제국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고리족(알랑고아)이 모계인 징기즈칸의 부계성씨가 보르지킨인데, 이들이 바로 흉노족의 중심부족이라는 것이다(단국대 윤내현 교수).

따라서 일제 식민사관론자들과 중국의 동북공정론자들이 위서로 취급하고 있는 [한단고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의는 고대사의 주역이였던 우리 동방족의 역사에 대해서 단편적이고 왜곡축소한 중국측 역사를 서로 연계해줄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위작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완벽하고 사실적이라는 점에서 [한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 위대한 우리민족사의 진실을 담고 있는 보고인 것이다.

고두막한은 위만조선이 내부분열로 멸망한 이후 요서지역을 넘보는 한나라에 맞서 해모수의 북부여가 혼란한 시기에 의병들를 모아 한나라와 대적했던 당시 해모수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영웅적 인물로서 동명성왕이라 했다. 분명 동명성왕은 사람이름이 아닌 존칭이다. 이름이라면 한자식으로 짓지 않앗을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동명성왕은 '동방밝한'으로 불러야만 할것이다.
 
그럼 부여의 옛땅(고리국)은 어디일까? 요서지역 중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지역이자 거란(클한)의 본거지였던 내몽골 시라무렌강유역이다.  광개토태왕이 내몽골지역을 정복한 역사적 배경이며, 고구려이후 북방초원의 강자였던 거란(클한)은 고리족의 후예임을 증명한다.

동명성왕은 고두막한을 일컫는다. 동명성왕과 고추모의 관계는 고두막이 개국한 골본부여 3대 단군이 고추모인 것이다(한단고기).

▲백제 금동대향로의 머리를 장식하는 봉황
또 하나, 고리국의 시비녀가 감히 애를 배어 버려질 때 [위략]왈.."계자(鷄子)가 내려와.."하는 구절이 있다.


鷄子란 닭(엄격히 말하면 鳳<봉황>)이란 뜻인데, 이는 북방기마민족의 공통적인 신령인 새(鳥)에 관한 암시라고 보면 된다.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와 우리 한반도에 남아있는 샤만의 전통은 새를 영계의 안내자로 보고 있다. 부여족의 후예인 고구려는 삼족오를 숭상했고, 백제는 부여금동대향로에서 알 수 있듯이 봉황을 숭상했다. 봉황은 천국의 새이며, 동방에서 나온다고 고대 [산해경]에 기록되어 있다.[산해경]에서 의미하는 동방은 동해밖 무궁화피는 대인.군자국의 나라가 있는 땅이니 한반도다. 이 동방에서 봉황이 나와 사해(세계)를 날면 평화와 덕이 실현되었다라고 [산해경]에서 기록하고,  고대 한반도인들(마한)은 어질고 순박하여 살리기를 좋아한다고 또한 중국의 [후한서-동이전]이 기록하고 있으니 고대 한반도인들은 모두 왕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로 봉황을 의미한다 하겠다. 이 봉황들이 만주를 걸쳐 유라시아.아메리카대륙을 날았으니 세계문명의 주역은 동방족이였던 것이다.
 


또한 계자(鷄子)는 신라의 흉노족 김씨들의 조상인 김알지설화에서 계림(鷄林)의 닭울음과 연계되어진다.  고리국의 시비녀 아들 고두막한은 계자의 후손이란 얘긴데, 이는 북방기마민족의 후손이란 것이고, 북방기마민족의 조상은 봉황을 상징하는 고대 한반도사람들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들 북방의 유목민들(진한 유민들.부여에서 망명한 박혁거세 세력)이 조상들의 고향이였던 한반도로 들어와 지금의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한민족사는 한반도문명을 시원으로 사해로 퍼졌고, 사해에 퍼진 후손들이 조상의 고향인 한반도로 들어와서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인돌.온돌.청동검이 분포되는 한반도와 만주는 분리할 수 없는 동방문명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한민족의 터전이다.
 
▲다물해야하는 100년전 대한민국 영토 만주. 조선의 고종황제는 원구단에서 환한님께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국]으로 정하고, 조선영토가 탐라에서 읍루지역에 해당하는 말갈까지 4천리임을 밝혔다. 일본관동군이 강제로 가져간 임진왜란 승첩비 북관대첩비가 반환되었는데, 북관대첩비문이 증명하는 내용은 함경도가 만주지역임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8도는 만주지역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음을 증명했다. 따라서 국가.집단이기주의에 의한 역사왜곡이나 축소행위는 명백한 범죄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마'에서 나온 만주의 '만'은 '사람'을 의미하는 영어의 MAN(만=맨)으로 "살리는 사람들(고대 한국인들=동방족)"의 땅이라는  의미다. 2009년은 100년 전 대한민국의 영토였던 만주반환소송시한이다. 조선의 고종황제의 직인이 들어가지 않는 을사늑약에서 비롯된 반칙적인 중일협약이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정당성이 명백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라면 마땅히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해야한다. 국민적 요구가 일어나야 한다. 만주반환소송과 요구는 남북.해외거주 동포들의 대동단결을 고취할 것이며, 국제적으로는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동조를 얻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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