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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91] 단군조선 군후국(君侯國)의 역사 14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군후국(君侯國) 12- [삼한관경 내 제후국 (天君國, 天侯國)]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3/02 [10:41]

[홍익인간 7만년-191] 단군조선 군후국(君侯國)의 역사 14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군후국(君侯國) 12- [삼한관경 내 제후국 (天君國, 天侯國)]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3/02 [10:41]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천산태백] 기후국(箕侯國)의 시조는 은(殷) 왕족 출신으로서 망명자인 기자(箕子)이다. 즉, 서기전1122년에 은나라가 주(周)나라에 망하자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던 주왕(紂王)의 숙부인 기자가 서기전1120년에 패잔병 5,000명을 이끌고 단군조선 땅이던 태항산(太行山) 서쪽의 서화(西華)지역으로 피하여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기후국(箕侯國)의 시조가 되었던 것이다. 이 기후국 시조 기자(箕子)의 후손인 기자족(箕子族)을 수유족(須臾族)이라고도 부른다. 수유라는 말은 소리가 유사한 기자의 이름인 서여(胥餘)에서 나온 것이 될 것이다.

 

(20) 기후국(箕侯國)

 

1) 시조 및 연혁

 

기자(箕子)라는 말은 기(箕) 땅의 자작(子爵)이라는 말이며, 원래 은나라의 제후국으로서 하남성 지역의 황하 유역에 있었다가,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고 단군조선 영역으로 피하여 단군조선의 신하가 되었던 것이며, 이 기자(箕子)의 나라가 곧 기후국(箕侯國)이 되는 것이다.

 

기후(箕侯)라는 명칭은 기자(箕子)라는 제후를 가리키는 일반칭이거나, 자작에서 승격된 후작(侯爵)이 될 것인데, 아마도 단군조선에 망명함으로서 기후(箕侯)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은나라는 단군조선의 천하 제후국이 되는 천자국(天子國)이므로, 은나라의 제후의 하나인 기자(箕子)는 일반 제후인 자작(子爵)이 되며, 서기전1120년경 단군조선 본국에 망명을 함으로 인하여 단군조선의 제후가 되어 천후국(天侯國)에 해당하는 것이 되는데,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에 망명하여 제후가 되어 사실상 한단계 위의 천후국(天侯國)이 된 은 기자(箕子)를 천자국(天子國)인 주(周)나라가 조선(朝鮮)에 봉하였다라는 고대중국의 기록은 모두 위계질서에도 반하여 어불성설이며 망발에 불과한 것이 된다. 천후(天侯)의 위계(位階)는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순이 된다.

 

은(殷) 기자는 단군조선에 망명한 이후 사사(士師)이던 일토산(一土山) 사람 왕수긍(王受兢)으로 하여금 단군조선의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박달나무판에 새겨 달라 하여 읽었다라고 전하는 바, 서기전2333년경에 새긴 청석본(靑石本) 삼일신고는 북부여로 전승(傳承)되었고, 단목본(檀木本) 삼일신고는 기후국(箕侯國)에서 번조선(番朝鮮)으로 전승되었다가 서기전194년 이후 위씨조선(衛氏朝鮮)에 전승되었으나, 모두 병란 중에 잃었다라고 한다.

 

2) 강역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기후국(箕侯國)은 태항산(太行山) 서쪽 지역에 위치하여, 동쪽으로는 태항산 동쪽에 고죽국(孤竹國)이 소재하고, 서쪽으로는 오르도스 지역에 흉노(匈奴)가 소재하며, 남쪽으로는 태원(太原) 이남에 주(周)나라가 위치하고, 북쪽으로는 대동(大同) 이북에 구려(句麗)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3) 역사

 

서기전1120년에 단군조선 영역에 망명하여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존속하다가, 서기전650년경에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연합군에 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약470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 제36대 매륵(買勒) 천왕 때인 서기전665년에 제나라가 고죽국(孤竹國)과 영지국(永支國)을 침공하였던 사실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서기전653년에 단군조선이 기후국(箕侯國, 수유국)과 함께 연(燕)나라를 정벌하였던 것이 되고, 이에 연(燕)나라가 제(齊)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제나라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던 것이며, 이때 연제(燕齊)의 군사가 우리의 복병(伏兵)에 걸려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하고 물러갔는 바, 이후 서기전651년에 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고죽국(孤竹國)과 영지국(永支國, 단군조선의 永支城)과 산융(山戎)을 침공하였던 것이고, 이때 고죽국과 기후국이 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죽국, 영지국, 산융이라는 국명 또는 지명 외에 수만(鄋瞞)이라는 명칭이 보이는데, 이 수만이 수유와 관련된 용어가 아닌지 연구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서기전651년경 기후국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침공으로 망하자 기후(箕侯) 자서여(子胥餘)의 장손족은 동쪽의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이동한 것이 되는데 서기전323년에 기후의 먼 후손인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번조선왕이 되어 이후 서기전194년까지 존속하였던 것이며, 기후(箕侯) 자서여(子胥餘)의 차손족은 후대에 선우중산국(鮮于中山國)을 세웠던 것이 되고, 선우중산국은 서기전403년에 시작되었다고 기록된 전국(戰國)시대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 사이에 소재한 나라였으며 서기전296년 조(趙)나라의 무령왕(武寧王)에게 망하였던 것이다.

 

흉노(匈奴)의 왕을 선우(禪于, 禪虞, 鮮于)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기후족의 후손인 선우씨(鮮于氏)가 흉노에 들어가 왕이 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흉노의 왕에는 김씨(金氏)도 있었는데, 서기전110년에 한무제(漢武帝)에게 항복하였던 휴도왕(休屠王)인 김일제(金日磾)가 바로 김씨였다.

 

4) 기씨(箕氏)의 나라 후삼한의 마한(馬韓)

 

서기전194년 발해만 유역에 있던 번조선(番朝鮮)의 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기고, 배를 타고 마한(馬韓) 땅이던 한반도의 평양에 도착하였다가, 토착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다시 남하하여 금마(金馬)에 이르러 정착하여 마한왕(馬韓王)이라 칭하였다.

 

원래 단군조선의 마한 땅인 지금의 한반도는 서기전323년 이후에 마한(마조선)이 망하고, 서기전195년에 발해만 유역의 낙랑홀(樂浪忽)에서 이동해온 최숭(崔崇)이 대동강 평양(백아강)을 중심으로 낙랑국(樂浪國)을 열었고, 서기전209년에는 단군조선의 진조선(眞朝鮮)과 번조선(番朝鮮) 땅에서 동으로 남으로 이동하여 온 단군조선의 유민(遺民)들이 한반도 남부의 동쪽과 남쪽에 자리잡고서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세웠는데, 소백손(蘇伯孫, 일명 蘇伯琳이라고도 함)이라는 사람이 서라벌(경주)에 진한을 세웠던 것이고, 변한의 건국자는 불명이다.

 

마한의 기준왕은 서기전193년에 붕하고, 번조선의 상장(上將)이던 기탁(箕卓)이 기준왕을 이어 제2대 마한왕이 되었으며, 이후 후삼한의 진왕(辰王)이 되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통솔하였던 것이 된다. 제2대 탁왕은 번조선의 상장(上將)으로서 기씨(箕氏)가 되며 기준왕(箕準王)의 아들로 추정되는데, 번조선이 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 월지(月支)로 이동하여 소위 중마한(中馬韓)을 세웠다가, 금마(金馬)에 세워진 마한왕 기준(箕準)이 붕하자 마한의 대를 이은 것이 된다.

 

후삼한 마한의 제9대왕인 계왕(稽王)이 서기전18년에 온조(溫祚)에게 한강(漢江) 유역을 떼어 주어 나라를 세우게 하였던 것이나, 서기9년 제10대 학왕(學王) 때 오히려 백제(百濟)에게 망하였는데, 마한이 망할 당시에 마한왕 기씨(箕氏)의 아들들이 각 기(奇)씨, 선우(鮮于)씨, 한(韓)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원래의 성씨인 기씨(箕氏)도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은 물론이다.

 

즉, 후삼한의 마한을 세운 기준왕(箕準王)의 7세손이라 하는 기훈(箕勳)은 실제 제8대왕으로서 원왕(元王)이라 하는데, 기훈의 세 아들 중 우성(友誠)은 덕양기씨(德陽奇氏) 즉 행주기씨(幸州奇氏)의 시조가 되고, 우량(友諒)은 상당한씨(上黨韓氏) 즉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가 되고, 우평(友平)은 북원선우씨(北原鮮于氏)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또는 원왕(元王)의 아들 량(諒)이 선우씨(鮮于氏)의 시조가 되었다라고도 한다.

 

한편, 기후국(箕侯國)의 땅이던 태원(太原)을 본관으로 하는 태원선우씨가 있는데, 시조가 되는 중(仲)은 단군조선 기후국(箕侯國)국 시조 자서여(子胥餘)의 둘째 아들이며, 우(于)라는 땅에 봉해져 조선(朝鮮)의 선(鮮)을 합하여 선우씨라고 하였다 한다. 이 태원 선우씨의 선대가 춘추전국시대에 조나라와 연나라 사이에 위치하였던 선우중산국(鮮于中山國)을 세운 것이 된다.

 

일부기록에서 마한이 제8대 계왕(稽王) 때 백제에게 망하였다라고 하나, 실제 서기9년에 백제에게 망한 마한왕은 제10대 학왕(學王)이며, 서기전16년부터 서기9년 사이에 재위하였는 바, 그 이전의 왕은 제9대 계왕(稽王)으로서 기훈의 세 아들 우성, 우량, 우평은 서기9년 백제에게 망할 당시의 인물들로서 계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것이다.

 

기준왕의 마한 세계(世系)는 제1대 무강왕(武康王, 箕準 : 서기전194년~서기전193년), 제2대 강왕(康王, 卓 :서기전193년~서기전189년), 제3대 안왕(安王), 제4대 혜왕(惠王), 제5대 명왕(明王), 제6대 효왕(孝王), 제7대 양왕(襄王), 제8대 원왕(元王:서기전58년~서기전32년), 제9대 계왕(稽王:서기전32년~서기전16년), 제10대 학왕(學王:서기전16년~서기9년)이 된다.

 

한편, 기준왕을 이은 제2대 강왕인 탁(卓)이 기준왕의 아들이 아니라면, 이후의 마한왕(馬韓王)들은 탁왕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바, 그 후손 중에서 기씨(奇氏), 한씨(韓氏), 선우씨(鮮于氏)가 나온 것으로 기록되므로, 탁(卓)의 성씨가 원래 기씨(箕氏)인 것이 되므로, 기준왕의 종실(宗室)이 되는 셈이다. 이는 북부여기에서 상장 탁(卓)이라고 이름만 적은 것은 원래 성씨인 기씨(箕氏)를 생략하여 적은 것이 될 것이다.

 

(21) 협야(陜野)

 

1) 시조와 연혁

 

협야국(陜野國)의 시조는 배반명(裵槃命)의 아버지가 되는 언파불합(彦波弗哈)으로 추정된다. 즉 단군조선 제35대 사벌(沙伐) 천왕 때인 서기전723년에 삼도(三島)의 웅습(熊襲, 熊本, 구마모또)에 반란이 일어나자, 단군조선 조정에서 장수(將帥) 언파불합을 파견하여 진압하게 하였던 것이며, 언파불합이 지금의 일본 땅인 구주(九州, 큐슈)에 위치한 웅습(熊襲)을 토벌하여 평정함으로써 공을 인정받아 마한(馬韓)의 관할에 속하는 땅인 구주 지역 남쪽의 협야(陜野)라는 땅에 제후로 봉해진 것이 될 것이다.

 

서기전667년에 협야후(陜野侯)로 불려지는 배반명(裵槃命)은 처음 협야후로 봉해진 언파불합의 장자(長子)가 되는 것이며, 다른 형제들은 협야후의 족속이 되는 것이다. 배반명(裵槃命)은 일명 일본서기에서 적고 있는 도반명(稻磐命, 벼반명)이다.

 

2) 영역

 

협야국은 구주(九州, 큐슈) 지역의 남쪽에 위치한 제후국으로서 웅습(熊襲, 熊本, 구마모또) 이남에 지름 100리 정도의 군(郡) 단위 크기의 나라가 될 것이다.

 

3) 역사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의 협야국(陜野國)은 서기전723년경 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이 봉해진 제후국이며, 협야후의 무리로서 협야후 배반명(裵槃命, 稻磐命)의 막내 아우였던 반여언(盤余彦)인 신무(神武)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천황(天皇)이라 참칭한 해인 서기전660년까지 약63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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