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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71]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24

제45대 여루(余婁)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2/03 [06:26]

[홍익인간 7만년-171]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24

제45대 여루(余婁)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2/03 [06:26]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천산태백] 서기전379년 임인년(壬寅年)에 온천이 성(城) 남쪽 삼사(三舍: 90리) 쯤 되는 곳에서 새로 솟아났다.

 

[온천(溫泉)이 솟다]

 

여기의 성(城)은 도성(都城)으로서 장당경(藏唐京)을 둘러싼 성(城)을 가리키며 그 남쪽에서 90리 떨어진 곳에 온천(溫泉)이 솟았다는 것이다.

 

삼사(三舍)는, 군대(軍隊)가 하루에 가는 거리로 보는 30리(里)를 사(舍)라고 하는데서, 90리 거리가 된다. 1리(里)는 약 400미터이며 30리는 12킬로미터가 되고 90리인 삼사(三舍)는 36킬로미터가 된다.

 

[정(鄭)나라 사람이 누시계(漏時計)를 바치다]

 

서기전377년 갑진년(甲辰年)에 정(鄭)나라 사람 누경(屢景)이 누시계(漏時計)를 가지고 입조(入朝)하였다.

 

누시계는 물시계가 된다.

 

단군조선 전기인 서기전1846년에 자명종(自鳴鐘), 경중누기(輕重漏器)가 발명되었는 바, 경중누기와 자명종이 결합되면 자명누기(自鳴漏器)가 될 것인데, 여기 누시계처럼 생활에 필요한 기구들이 지속적으로 연구발전되어 발명되었던 것이 된다.

 

[대부례(大夫禮)를 대산후(大山侯)에 봉하다]

 

서기전376년 을사년(乙巳年)에 대부례(大夫禮)를 대산후(大山侯)에 임명하였다.

 

대부례는 직책이 대부(大夫)로서 이름이 례(禮)인 인물인지, 아니면 대부례(大夫禮)가 원래 인명인지는 불명이나, 대산후(大山侯)라는 제후(諸侯)에 봉해진 것이다. 대부(大夫)와 제후(諸侯)라는 직위를 비교해 보면 아마도 대부였던 례(禮)라는 인물이 승진하여 제후로 봉해진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는 단군조선에서는 군후(君侯)가 되는 한(汗)의 아래 직에 대인(大人)을 두었던 반면, 고대중국은 제후(諸侯) 아래에 대부(大夫)를 두었던 것으로 볼 때, 단군조선의 대인을 여기서 대부라고 적은 것이 될 것이다.

 

대부례(大夫禮)는 단군조선의 번조선(番朝鮮) 사람으로서 연(燕)나라가 도(道)에 어긋나는 짓을 하자 연나라로 건너가서 도(道)에 관하여 가르침을 주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가뭄]

 

서기전372년 기유년(己酉年)에 크게 가물어 초목(草木)이 말랐다.

 

[연나라의 요서(遼西) 침범]

 

서기전365년 병진년(丙辰年)에 연(燕)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와서 요서(遼西)를 함락시키고 운장(雲障)을 육박하였는데, 이에 번조선이 상장(上將) 우문언(于文言)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眞朝鮮)과 막조선(莫朝鮮)도 역시 군대를 보내와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伏兵)을 숨겨두고 협공(夾攻)하여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고는 요서(遼西)의 모든 성(城)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여기서 요서(遼西)는 패수(浿水)라 불리는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데, 이는 단군조선에서 패수를 기준으로 구분지어 패수 서쪽이 되는 요서(遼西)이며, 여전히 고대중국에서는 원래의 대요수(大遼水)였던 지금의 영정하(永定河)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로 구분하였던 것이 된다.

 

원래 요(遼)라는 말은 멀다(遠)라는 뜻이 되는데, 요중(遼中)이라는 말이 단군조선의 번한 땅 중에서 패수(浿水)의 서쪽으로 요수가 되는 영정하 부근에 걸치는 지역이 되는데, 이리하여 요(遼)라는 말은 단군조선의 수도인 아사달에서 보아 멀다라는 것이 된다. 즉 요(遼)라는 명칭은 고대중국에서 처음 만든 말이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먼저 생긴 명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단군조선은 서기전365년경부터 요중(遼中)의 땅을 요서라 하여 요서지역을 패수의 서쪽으로 보는 반면, 요(遼)라는 지명을 그대로 차용하였던 고대중국은 서기 220년경의 한나라 때까지 원래의 요수였던 지금의 영정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구분지었던 것이 된다. 이는 본국(本國)이 언어체계나 문자를 바꾸더라도, 그 언어나 문자를 그대로 차용한 나라는 오랫동안 바꾸지 못하고 유지하는 습성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된다. 

 

운장(雲障)은 패수(浿水)가 되는 지금의 난하(灤河) 바로 동쪽에 있던 번조선의 요새(要塞)로서 상하 두곳이 있어 상하운장(上下雲障)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오도하(五道河)는 다섯 갈래의 강이 있는 곳이 되는데, 단군조선에게는 요서지역이 되며 당시 연나라에게는 요동지역이 되는 곳으로서, 영정하(永定河)와 난하(灤河) 사이에 있는 강이 된다.

 

당시 연나라의 침공이 대대적인 것이어서 진조선(眞朝鮮)과 마조선(馬朝鮮)에서도 군사를 파견하여 막게 하였던 것이며, 복병작전(伏兵作戰) 등을 통하여 연제(燕齊)의 연합군을 격퇴시키고 단군조선의 요서(遼西)지역인 난하 서쪽 지역을 모두 회복한 것이 된다. 이때 단군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서기전650년경에 고죽국이 망하면서 요서지역을 내어주게 됨으로써 대요수(大遼水)인 영정하(永定河)로 삼았던 것이 된다.

 

[우문언(于文言)의 추격]

 

서기전364년 정사년(丁巳年)에 연(燕)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며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이 이를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연운도는 섬으로서 연나라의 동쪽이 되는 발해만이나, 단군조선과 국경이 되는 영정하 하류, 또는 지금의 천진(天津) 부근이 되는 옛 유수(濡水)가 되는 탁수(涿水)의 하류 지역이나, 영정하와 탁수 사이에 위치한 섬이 될 것이다.

 

[송나라 사람의 입경]

 

서기전362년 기미년(己未年)에 송(宋)나라 학사(學士) 오문언(吳文偃)이 입경(入京)하였다.

 

이때 송나라 사람인 오문언이 단군조선의 서울인 장당경 안으로 들어와 살았다는 것이 된다.

 

송(宋)나라는 은나라 마지막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이었던 미자(微子)가 주무왕(周武王)에 의하여 서기전1122년경에 봉해진 나라인데, 서기전286년에 제(齊)나라에 망하였다.

 

주나라 제후국인 송(宋)나라의 시조인 미자(微子)는 기자(箕子) 서여(胥餘)의 조카가 되는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라는 책에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 태자부루(太子扶婁)가 우순(虞舜)의 사공(司空) 우(禹)에게 전수하였던 치수법(治水法)이 실려 있는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실려 있다. 송미자세가의 홍범구주는 소위 상서(尙書)에 실려 있는 홍범구주와 서문과 본문의 글자가 다른 것이 있을 뿐 내용은 같다고 보면 된다.

 

[예기(禮記)]

 

서기전355년 병인년(丙寅年)에 노(魯)나라 학자 소문술(蘇文述)이 예기(禮記)를 가지고 입조(入朝)하였다.

 

노(魯)나라는 주나라 시대에 산동지역의 곡부(曲阜)에 있던 제후국으로서, 서기전1100년경 주나라 초기에 주공(周公)의 아들이자 성왕(成王)의 사촌인 백금(伯禽)이 봉해진 나라이다. 노나라는 서기전249년 초(楚)나라에 망하였다.

 

송나라 사람이었던 공자(孔子)의 선대는 송나라에 살다가 망하여 노나라로 들어와 살았던 것이 된다.

 

역사상 곡부(曲阜)는 배달나라 제후국이던 염제신농국(炎帝神農國)의 땅에 있었던 것이 되고, 또한 이곳은 서기전2357년에 염제신농국의 후계국인 단웅국(檀熊國)의 비왕(裨王)으로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섭정하던 곳이기도 하다. 즉, 노나라 지역은 고대중국의 내륙(內陸) 동이(東夷)지역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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