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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70]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23

제45대 여루(余婁)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2/02 [10:58]

[홍익인간 7만년-170]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23

제45대 여루(余婁)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2/02 [10:58]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서기전396년 을유년(乙酉年)에 제나라의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제(齊)나라 사절 입조]

 

제나라는 서기전665년경에 중국측 기록에서 영지국(永支國)이라 기록되는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이던 영지성(永支城)과 영지성의 남동쪽에 위치한 고죽국(孤竹國)을 침범하고, 서기전653년에 단군조선이 소위 기자(箕子)의 나라인 기후국(箕侯國) 즉 수유국(須臾國)의 군사와 함께 연(燕)나라를 치자 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서기전651년에 제(齊)나라 환공이 영지(永支)와 고죽(孤竹)을 치고 북진하여 지금의 내몽골 땅이 되는 구려국(句麗國) 즉 산융(山戎)을 침범하였다가 산융의 벌목작전과 모랫바람 때문에 회군하였다.

 

제나라는 서기전679년부터 서기전633년경까지 주나라 춘추시대의 패자였는데, 주나라 천자(天子)를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린 격이 된다.

 

제(齊)나라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과 산융이라 기록되는 구려국 땅을 침범한 것은 연(燕)나라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연나라는 전국시대인 서기전284년 소왕 때 한(韓), 위(魏), 조(趙), 진(秦)의 연합군과 함께 제(齊)나라를 대파할 때까지는 제나라  때문에 존속한 것이 되고 한편으로는 제나라의 속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장령(長嶺)의 낭산(狼山)에 성을 쌓다]

 

서기전396년 을유년(乙酉年)에 장령(長嶺)의 낭산(狼山)에 성을 쌓았다.

 

장령(長嶺)이 서기전396년 당시에는 단군조선의 영역 내에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요동(遼東) 땅이 되는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지역에 있는 긴 고개로서 당시 요수(遼水)가 되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의 동쪽에 있다. 장령(長嶺)은 장령(長岺)과 같은 말이다.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은 것은 아마도 연나라를 대비한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6년째인 서기전380년에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범하였다.

 

[대동율령(大同律令) 공포]

 

서기전393년 무자년(戊子年)에 법령을 개정하여 대동율령(大同律令)이라 하여 천하에 공포하였다.

 

신왕종전(神王倧佺)의 시대 즉 소위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에는 계율(戒律)이나 율법(律法)이 곧 나라를 다스르는 법이 되는데, 단군조선 시대에는 실체적인 법규범을 만들어 공포하여 실시하였는 바, 서기전1282년에 공포된 8조금법(八條禁法)이 있으며, 이때 이르러 대동율령이 공포된 것이 된다. 

 

이 대동율령(大同律令)이 8조금법에서 나아가 60여개조로 확장하여 구체적으로 더 자세하게 만든 법이 될 것이다.

 

[빈민 구제]

 

서기전391년 경인년(庚寅年)에 큰 흉년이 들어 창고의 쌀을 다 풀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단군조선은 백성의 삶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하던 진정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시대이며, 군사력(軍事力)은 다른 나라를 정벌(征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침범하는 적(敵)을 막고 국내적으로는 난(亂)을 진압하여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

 

단군조선은 비록 대국(大國)이나 함부로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라고 공자(孔子)의 7세손이 되는 위(魏)나라 출신의 공빈(孔斌)이 서기전268년경 자신이 쓴 홍사(鴻史)의 서문(序文)에서 밝히고 있기도 하다.

 

[감천이 솟다]

 

서기전387년 갑오년(甲午年)에 감천(甘泉)이 대묘(大廟) 앞에서 솟아 나왔다.

 

대묘(大廟)는 선대 천왕(天王)들의 신주(神主)를 모신 종묘(宗廟)가 될 것이다.

 

[양생론을 바치다]

 

서기전385년 병신년(丙申年)에 곽태원(郭太原)이 양생론(養生論)을 저술하여 천왕께 바쳤다.

 

아마도 양생론은 호흡(呼吸)과 음식물(飮食物)과 관련된 양생법(養生法)을 밝힌 이론이 될 것이다.

 

[연나라의 침범]

 

서기전380년 신축년(辛丑年)에 연(燕)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郡)을 침범하므로 수비 장수 묘장춘(苗長春)이 이를 쳐부수었다.

 

이때부터 연나라가 서서히 동침을 시작하게 되고 번조선과 큰 전쟁을 치루면서 서기전339년에는 연나라 공자(公子)인 진개(秦開)가 번조선에 서기전311년경까지 약 28년간 인질(人質)로 잡히기도 하였으며, 서기전323년에 이르러 이왕(易王) 10년이 되는 해에 왕(王)이라 칭하게 된다. 이때 번조선의 읍차(邑借)이던 기후(箕詡)가 당시 비어 있던 번조선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또한 번조선왕이라 칭하면서 보을(普乙) 천왕의 사후윤허(事後允許)를 받았다.

 

이때 서쪽 변두리 군(郡)은 번조선의 서쪽 땅으로서 요서(遼西) 지역이 되는데, 시대상으로 볼 때 단군조선에서 본 요서지역은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 지역이 된다. 한편, 고대중국에서 본 요동과 요서의 구분은 여전히 대요수(大遼水)인 지금의 영정하(永定河)가 된다. 소위 요수(遼水) 즉 대요수(大遼水)는 최소한 한(漢)나라 때까지도 지금의 영정하가 된다.

 

서기전650년경에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 원래의 大遼水) 서쪽이 되는 요서지역에 위치하였던 고죽국(孤竹國)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여 그 주류와 많은 백성들이 번조선 땅으로 들어왔던 것이 되고, 이때 연나라는 수도를 안(安)에서 이(易)로 옮긴 것이 되며, 이 이(易)를 계(薊)라고도 불렀던 것이 된다.

 

서기전365년에 연나라의 침공으로 단군조선의 요동(遼東)이 되는 요수에서 패수(浿水)에 걸치는 지역을 연나라에 함락당하였다가 삼조선 연합군이 복병작전 등으로 연나라와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패퇴시키고 수복하였는데, 이후 줄곧 연나라와 진나라와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단군조선의 소위 요수(遼水)가 패수(浿水)라 불리는 지금의 난하(灤河)로 옮겨진 것인데,, 그러나 여전히 고대중국에서는 영정하를 요동과 요서의 구분으로 삼아 영정하 동쪽을 요동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서기전226년에 연나라는 진나라 군사에 패하여 요동(遼東)으로 피하였는데 이곳이 지금의 북경(北京)으로서 계(薊)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북경의 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계(薊)는 먼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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