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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69]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22

제44대 구물(丘勿)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2/01 [15:55]

[홍익인간 7만년-169]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22

제44대 구물(丘勿)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2/01 [15:55]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서기전425년 병진년(丙辰年) 3월에 백민성 욕살(褥薩)인 상장(上將) 구물(丘勿)이 우화충(于和冲)의 반란(叛亂)을 진압하였으며, 이에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마침내 3월 16일에 단(壇)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藏唐京)에서 즉위하였다.

 

[구물(丘勿) 천왕 즉위]

 

상장(上將)이자 백민성(白民城) 욕살(褥薩)이던 구물(丘勿)은 물리 천왕의 어명(御命)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며, 더불어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하는 결정적인 전공(戰功)이 있어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았던 것이 되는 바, 전조(前朝)의 정통성(正統性)을 자연스럽게 이은 것이 되어,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드리는 3월 16일에 단(壇)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藏唐京)에서 즉위하였던 것이 된다.

 

음력 3월 15일은 서기전2241년에 단군왕검 천제(天帝)께서 붕하신 날로서 어천절(御天節)이라고 부르며, 다음날인 3월 16일은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지내는 날 즉 대영절(大迎節)이라 한다.

 

구물 천왕은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고 고쳤으며, 중부여(中夫餘) 땅이 되는 장당경(藏唐京)을 수도로 삼아 동압록(東鴨綠)과 서압록(西鴨綠) 사이에 자리잡은 것이 된다. 장당경은 지금의 심양(審陽)으로서 단군조선 초기부터 이궁(離宮)으로 삼아 왔던 곳이며 제22대 색불루 천왕이 조부(祖父)인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의 사당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대부여(大夫餘)와 삼조선(三朝鮮)]

 

서기전425년에 구물 천왕은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고 고치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바꾸었으며, 이후 삼조선은 비록 단군(檀君)을 한분의 절대권자인 천왕(天王)으로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하였으나, 화해(和解)와 전쟁(戰爭)의 권한은 단군 천왕 한분에게만 있지 않았다. 

 

구물 천왕이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바꾸었다 하였는데, 서기전1285년에 제22대 색불루(索弗婁) 천왕 때부터 이미 삼한(三韓)을 진조선(眞朝鮮), 마조선(馬朝鮮), 번조선(番朝鮮)의 삼조선이라는 관경으로 사실상 운영되어 왔던 것이 되며, 다만 군사권은 이때까지 천왕(天王) 한분이 전권(專權)을 가지고 명령을 하였던 것이 된다.

 

이때에 이르러 삼조선(三朝鮮)은 비록 단군(檀君)을 한분의 절대권자인 천왕(天王)으로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하였으나, 화해(和解)와 전쟁(戰爭)의 권한은 단군 천왕 한분에게만 있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진조선의 임금은 천왕(天王), 마조선의 임금은 마조선왕(馬朝鮮王), 번조선의 임금은 번조선왕(番朝鮮王)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임금인 한(韓)은 비왕(裨王) 또는 보왕(補王)으로서 본 임금인 천왕(天王)을 보좌하는 직책이 되고,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지 못하여 천왕의 명을 받아 군사를 부릴 수 있는데, 왕(王)은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는 직책이 된다.

 

그리하여 단군조선은 삼한관경의 임금을 한(韓)이라 하고 그 외 일반 군후(君侯)들을 한(汗)이라 하여 군사권은 어명(御命)을 받아 행사하도록 하여 군사적 분쟁을 없앴던 것이다. 다만, 왕(王)이라는 제도를 두기도 하였는데 서기전1289년에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소태(蘇台) 천왕께 우현왕(右賢王)에 봉해 줄 것을 요청하여 봉해졌던 것이며, 그 손자 색불루도 군사력을 기반으로 천왕(天王)에 즉위하는 혁명에 성공한 것이 된다.

 

[해성(海城)을 평양(平壤)이라 하고 이궁(離宮)을 짓다]

 

서기전425년 가을 7월에 구물 천왕께서 해성(海城)을 개축하도록 명령하여 평양(平壤)으로 삼고 이궁(離宮)을 지었다.

 

해성(海城)을 개축하도록 명령하여 평양(平壤)으로 삼고 이궁(離宮)을 지었는데, 해성(海城)은 장당경의 남쪽에 위치한 성(城)으로서 서기전1285년에 색불루 천왕에 의하여 번한(番韓)으로 봉해진 서우여(徐于餘)가 욕살(褥薩)로 있었던 곳이며, 구물(丘勿) 천왕이 이때 해성(海城)을 평양이라 부르고 이궁(離宮)을 지은 것이다.

 

이리하여 단군조선 시대의 평양(平壤)은 서기전425년에 구물(丘勿) 천왕이 해성(海城)을 부른 이름이 되는 것이며, 마한(馬韓) 땅인 대동강(大同江)의 백아강(白牙岡)은 북부여 시대인 서기전195년에 발해만 북쪽에 있었던 낙랑홀(樂浪忽) 출신의 최숭(崔崇)이 배를 타고 건너가 정착하여 낙랑(樂浪)이라 불린 곳이고, 고구려 시대에 남경(南京)으로서 평양(平壤)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

 

서기전424년 정사년(丁巳年)에 예관(禮官)이 청하여 3월 16일에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행하였다. 구물 천왕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 번째 절에 세 번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 여섯 번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 아홉 번 조아리는 예를 올렸고, 따르는 무리들은 특별히 열 번 조아렸는데, 이를 삼육대례(三六大禮)라 한다.

 

삼육대례(三六大禮)는 삼육구배(三六九拜)라고도 하는데,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 때 사공(司空) 우(禹)가 천사(天使)인 태자부루(太子扶婁)에게 치수법을 점수받으면서 올렸던 절이 곧 삼육구배 즉 삼육대례이다. 삼(三)은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의 삼(三)이며, 육(六)은 천이(天二), 지이(地二), 인이(人二)인 천지인(天地人) 삼체(三體)의 음양(陰陽)의 합(合)으로 육(六)이며, 구(九)는 천이삼(天二三), 지이삼(地二三), 인이삼(人二三)의 합(合)으로서의 구(九)가 된다.

 

십(十)은 만유(萬有)의 시초인 일(一)이 돌고 돌아 다시 일(一)이 된 수로서 무한순환의 무극(無極)을 상징한다.

 

삼육대례(三六大禮)에서 세 번 조아림은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께, 여섯 번 조아림은 천지인(天地人)의 창조적(創造的) 존재인 음양(陰陽) 육체(六體)의 주(主)인 육신(六神)께, 아홉 번 조아림은 천지인(天地人)의 완성된 존재로서의 음양중(陰陽中)구체(九體)의 주(主)인 구신(九神)께, 열 번 조아림은 천지인의 무한순환 무극(無極)이자 만유(萬有)의 원천(再源泉)인 삼일신(三一神)께 올리는 것이 된다. 삼신(三神)은 삼일신(三一神)의 준말이 되며, 삼일신은 일신(一神)을 나누면 삼신(三神)으로서 삼신일체(三神一體)를 의미한다.

 

[일식(日蝕)]

 

서기전423년 무오년(戊午년) 봄 2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효자(孝子)와 청렴(淸廉)한 자를 천거토록 하다]

 

서기전409년 임신년(壬申년)에 감찰관(監察官)을 각 주(州)와 군(郡)에 파견하여 관리들과 백성들을 살피게 하여 효자와 청렴한 자를 천거토록 하였다.

 

단군조선 시대에도 효도상(孝道償)과 청백리상(淸白吏賞)을 제정하여 효(孝)와 청렴(淸廉)을 권장한 것이 된다.

 

[연(燕)나라가 새해 인사를 올리다]

서기전403년 무인년(戊寅年)에 연(燕)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인사를 올렸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연(燕)나라는 단군조선에 호의적(好意的)이었던 것이 되는데, 새해 문안인사로써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상국(上國)으로 예(禮)를 올린 것이 된다.

 

[홍수로 밭농사 흉년이 들다]

 

서기전401년 경진년(庚辰年)에 홍수가 일어나 밭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태자 여루(余婁) 즉위]

 

서기전397년 갑신년(甲申년)에 구물(丘勿) 천왕(天王)께서 붕하시고 태자(太子) 여루(余婁)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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