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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65]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18

제39대 두홀(豆忽)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1/29 [02:18]

[홍익인간 7만년-165]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18

제39대 두홀(豆忽)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1/29 [02:18]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천산태백] 서기전545년 병진년(丙辰年)에 연(燕)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연(燕)나라 사절의 입조(入朝)]

 

연(燕)나라는 서기전653년에 단군조선으로부터 정벌(征伐)을 당할 때 제(齊)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제(齊)나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죽국(孤竹國)에 쳐들어 왔다가 화해를 구하고 물러갔던 것인데, 이후 서기전400년경까지는 단군조선과 대체적으로 평화를 유지한 것이 된다.

 

연나라는 서기전1120년경 주무왕(周武王)의 아우인 소공(召公) 석(奭)이 봉해진 나라인데, 처음에는 은(殷)나라의 제후국이던 연(燕) 땅에 봉해졌으나 나라이름을 은나라 때 이름인 연(燕)을 피하여 언(匽)이라 하였던 것이며, 이후 1100년경 삼감(三監)의 난 등으로 은(殷)나라 잔존세력을 토벌하면서 황하북부 지역을 평정하여 수도를 황하북부의 안(安)으로 옮긴 것으로 된다. 주나라의 제후국인 연(燕)이라는 국명은 진시황(秦始皇) 시대에 언(匽), 안(安) 등을 연(燕)으로 고쳐 적은 것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후 연나라는 수도를 서기전653년경에 안(安)의 북동쪽에 위치한 이(易)로 천도한 것이 되는데 이를 계(薊)라 한 것이 되며, 서기전339년경에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범하였다가 연나라 공자(公子)인 진개(秦開) 등이 번조선(番朝鮮)에 인질로 잡혔으며 약28년만인 서기전311년경에 석방되어 연나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연나라는 이왕(易王, 또는 역왕)이 서기전323년에 주나라 천자(天子)를 무시하고 왕(王)을 칭하였고, 서기전311년 이후 연나라 장수인 진개(秦開)가 이전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번조선(番朝鮮)을 침공하여 소위 복수를 하였는데, 서기전281년에 번조선과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은 것이 된다. 만번한(滿番汗)은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으로 고하(沽河)에 가까운 지역이 된다.

 

이후 연나라는 서기전226년에 진(秦)나라에 수도를 점령당하고 요동(遼東)으로 달아났는데, 이때 지금의 북경(北京)이 요동 땅에 생긴 수도로서 연나라 수도 계(薊)가 이(易)에서 옮겨진 것이 된다. 지금의 계(薊)라는 지명은 먼 후대에 생긴 것이 된다. 즉 지금의 계(薊) 이전의 계는 지금의 북경(北京)인 것이다.

 

연(燕)나라는 서기전222년에 진(秦)나라에 완전히 망하였다. 이후 연(燕)이라는 이름이 계속 존속하였는데, 한(漢)나라 때에 연(燕)으로 봉해져 이어져 오다가, 서기전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여 흉노(匈奴)로 망명하고, 그 신하였던 위만(衛滿)은 번조선(番朝鮮)에 망명한 사실이 있다.

 

[초(楚)나라 사절의 입조(入朝)]

 

서기전544년 정사년(丁巳年)에 초(楚)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초(楚)나라와 단군조선 본국은 직접적인 국경을 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서국(徐國)이 서기전1236년에 봉해졌다가 서기전980년경에 서언왕(徐偃王)이 세력을 팽창하여 반경 500리(里)에 36국(國)을 거느려 종주(宗周)에 버금가는 대국(大國)이었는데,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수도를 점령하니, 이에 서국은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옮겨 축소되었던 것이다.

 

이후 서기전668년에 서국은 제(齊)나라에 병합되었다가 이후 독립을 하였던 것이며, 서기전530년에 초나라로부터 정벌을 당하였고, 서기전526년에 제나라로부터 정벌을 당하였으며, 결국 서기전512년에 서국은 오(吳)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하였던 것이다.

 

초(楚)나라는 주(周)나라 제후국 중에서 가장 먼저 칭왕(稱王)을 한 나라로, 서기전741년에 웅거(熊渠)가 칭왕을 하였으며, 서기전479년에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서기전447년에 채(蔡)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334년에 월(越)나라를 멸망시키고 서기전249년에 노(魯)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3년에 진왕(秦王) 정(政)의 진(秦)나라에 망하였다.

 

[슬후(膝侯)의 아들 섭이(攝珥)의 입조(入朝)]

 

서기전542년 기미년(己未年)에 슬후(膝侯)의 아들 섭이(攝珥)가 입조(入朝)하였다.

 

슬후(膝侯)는 슬(膝)나라의 제후를 가리킨다. 슬(膝)나라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분명한데 어디에 위치한 나라였는지는 불명이다.

 

[송(宋)나라 정상충(鄭尙忠)의 입국(入國)]

 

서기전536년 을축년(乙丑年)에 송(宋)나라 사람 정상충(鄭尙忠)이 자기 나라 사람 50명을 거느리고 입국(入國)하였다.

 

이 경우는 송나라 사람인 정상충이 50명을 거느리고 단군조선에 살기 위하여 귀화(歸化)한 것이 된다. 이 기록으로 위(魏)나라 사람인 공빈(孔斌)이 지었다는 홍사(鴻史) 서문(序文)에 중화(中華)와 동이(東夷)는 1,000년을 넘게 우방(友邦)으로서 서로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았다라고 적힌 내용이 정확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송(宋)나라는 서기전1122년경 주무왕(周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이던 미자(微子) 자계(子啓)를 하남성(河南省) 상구(商丘)에 봉한 제후국이다. 미자(微子)는 기자(箕子)의 조카가 되며, 은나라가 망하자 은나라의 제사를 잇기 위하여 옷을 벗고 한손에는 제기(祭器)를 들고 한손에는 양(羊)을 끌며 이마에는 띠를 두르고 무릎으로 걸으면서 호소하며 군문(軍門)을 나서자, 이에 무왕(武王)이 용서하여 송나라에 봉하고서 은(殷)나라의 대(代)를 잇게 하였던 것이다.

 

송나라는 춘추시대 중엽에 조(曹)나라를 멸망시키는 등 융성하기도 하였으나, 서기전286년에 제(齊), 초(楚), 위(魏)의 연합군에 망하였다.

 

노(魯)나라 사람 공자(孔子)는 그 조상이 송(宋)나라 사람인데, 그 후손이 노나라에 옮겨 살았던 것이다.

 

[큰 가뭄이 들다]

 

서기전535년 병인년(丙寅年)에 큰 가뭄이 들었다.

 

[제(齊)나라 사절이 오다]

 

서기전533년 무진년(戊辰年)에 제(齊)나라의 사절이 왔다.

 

제(齊)나라는 서기전1122년경에 주무왕(周武王)이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을 산동(山東)지역에 봉한 제후국이다.

 

강태공의 선대는 원래 강씨(姜氏)로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후손인데, 하(夏)나라 때 여(呂)에 봉해져 여씨가 된 것이다.

 

강태공은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라 하는데, 서기전1211년생으로 서기전1140년 72세로 은나라의 제후국이던 서방의 주(周)나라 서백(西伯) 창(昌)에 의하여 등용되었으며, 이에 무왕에 의하여 문왕(文王)으로 추봉된 서백 창(昌)이 태공(太公)이라 불리는 할아버지인 고공단부(古公亶父)가 기다리던(望) 인물이라 하여 여상을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던 것에서, 강태공(姜太公)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제(齊)나라는 주(周)나라 초기에 강성하였다가 쇠퇴하였는데, 이후 서기전700년경 춘추시대에 다시 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서기전679년에 환공(桓公)이 패자(覇者)가 되었다.

 

고대중국기록에서는 서기전668년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산동 남부지역의 서국(徐國)을 병합하였으며, 서기전665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영지국(永支國)과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였다 하고, 서기전651년에는 산융(山戎), 이지(離支), 고죽(孤竹)을 정벌하였다라고 적고 있는데, 산융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던 구려(句麗)를 가리키며 단군조선의 대칭(代稱)이 될 수 있고, 이지(離支)는 곧 영지(永支)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영지국(永支國)은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인 영지성(永支城)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서기전653년에 단군조선이 수유국(須臾國, 箕侯國)의 군사와 합공으로 연(燕)나라를 정벌하였으며, 이에 연나라가 제(齊)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제나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다가 복병(伏兵) 작전에 걸려 화해(和解)를 구하고 물러갔던 사실이 있는데, 서기전651년에 제나라가 산융(山戎), 영지, 고죽(孤竹)을 정벌하였다는 기록과 시차(時差)가 있긴 하나 상관(相關)된 기록이 된다. 

 

이리하여 서기전651년경에 고죽국(孤竹國)과 기후국(箕侯國, 수유국)이 제(齊)나라에 망한 것이 되고, 이때 고죽국과 기후국의 백성들이 대거 동쪽의 번조선 땅으로 이주한 것이 되며, 특히 기자(箕子) 자서여(子胥餘)의 작은 아들의 후손이 되는 선우씨(鮮于氏)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중산국(中山國)을 세웠다가 서기전415년에 무공이 즉위하였고, 서기전296년에 조(趙)나라 무령왕에 의하여 멸망하였던 것이다.

 

제나라는 서기전567년에 산동지역의 래이(萊夷)를 멸망시켰으나 래이는 이후 다시 부흥하여 서기전284년까지도 존속하였던 것이 되며, 서기전668년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부흥한 서국(徐國, 徐夷)을 서기전526년에 정벌하였고, 서기전386년에 전씨(田氏)가 주인(主人)이 되었는데 서기전334년에 선왕(宣王)이 칭왕을 하였던 것이고, 서기전286년에 위(魏)나라, 초(楚)나라와 연합하여 송(宋)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1년 전국(戰國)시대에 마지막으로 진(秦)나라에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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