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홍익인간 7만년-162]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15

제36대 매륵(買勒)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1/24 [22:45]

[홍익인간 7만년-162]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15

제36대 매륵(買勒)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1/24 [22:45]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천산태백] 서기전667년 갑인년(甲寅年)에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槃命)을 보내어 해상(海上)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는데, 마조선(馬朝鮮)의 마한(馬韓) 궁홀(弓忽)이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戰船) 500척을 이끌고 가서 왜(倭)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하였으며, 12월에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삼도(三島)의 난(亂) 평정]

 

협야후(陜野侯)는 협야(陜野)에 봉해진 제후(諸侯)를 가리키느데, 단군조선 후기에  지금의 일본 땅 구주(九州, 큐슈)에 협야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이며, 이곳에 단군조선의 장수이던 언파불합(彦波弗哈)이 서기전723년경에 웅습(熊襲)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제후로 봉해졌던 것이 되고, 이 언파불합의 아들이 배반명(裵槃命, 稻飯命)이 되는 것이다.

 

배반명(裵槃命)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도반명(稻飯命)과 동일인물이며, 언파불합의 장자(長子)로서 협야후를 세습하였던 것이 되고, 배반명의 막내 아우가 반여언(磐余彦)으로서 일본서기에서 서기전660년에 초대 천황(天皇)이라 기록된 소위 신무(神武)가 된다. 역사적으로 신무왕(神武王)은 서기전660년에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천황이라 참칭(僭稱)하며 단군조선의 질서에서 이탈(離脫)한 자가 된다.

 

삼도(三島)는 지금의 일본 땅의 세 섬을 가리키는데, 구주(九州, 큐슈), 본주(本州, 혼슈), 북해도(北海島, 홋가이도)가 된다. 그리고 본주의 남쪽에 사국(四國)이라는 섬이 있기는 하나 삼도에서는 별도로 칭하지 않은 것이 된다.

 

서기전667년 12월에 삼도의 반란이 협야후 배반명이 이끄는 군사에 의하여 진압이 되었으나, 이후 반여언(磐余彦, 神武)이 다른 형제들이 모두 사망한 것을 기회로 삼아 천황(天皇)을 참칭(僭稱)한 것이 되는데, 이러한 신무(神武)를 단군세기에서는 협야노(陜野奴)라 하여 반역자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신무가 다른 형제들을 모두 살해하여 바다에 빠뜨린 것으로 보인다.

 

[제(齊)나라의 단군조선 제후국 침공]

 

서기전665년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영지국(永支國),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고대중국의 기록에서 적고 있다.

 

서기전770년부터 주나라는 소위 춘추시대가 시작되는데, 서기전679년부터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패자(覇者)가 되어 서기전668년에 단군조선의 직할 제후국이던 서국(徐國)을 병합하고, 서기전666년에 위(衛)나라를 침공하고 서기전665년에 영지국(永支國)과 고죽국(孤竹國)을 침공한 것이 된다.

 

춘추시대의 첫 패자 제나라 환공이 19년인 서기전668년에 산동지역의 서산(徐山)을 수도로 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서국(徐國)을 병합하였다가 이후 부흥을 시도하자 서기전526년에 정벌하였던 것이며, 결국 서국은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 합려왕에게 망함으로써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이라는 긴 역사를 남긴 채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영지국(永支國)은 단군조선 번한(番韓)의 요중(遼中) 12성(城) 중 하나인 영지성(永支城)으로서 일개 성(城)에 지나지 아니하나, 고대중국 기록에서는 나라(國)로 기록되고 있어 제후국에 버금가는 세력을 갖춘 것이 된다. 보통 성(城)의 책임자인 성주(城主)는 주로 지방장관인 욕살(褥薩)이 되나 대부(大夫)에 해당하는 직(職)이나 제후(諸侯)가 봉해지는 경우도 있다. 제후가 봉해지는 경우는 국(國)이 된다.

 

고죽국(孤竹國)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며,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순(舜)임금이 서기전2284년경에 임의로 설치하였던 유주(幽州)를 폐하고 봉한 나라가 되는데, 서기전2224년에 시작된 하(夏)나라 이전부터 존속하여 서기전650년경에 연나라와 제나라의 침공으로 망한 것으로 되어 약1,600년을 존속한 나라가 된다.

 

[연(燕)나라 정벌과 제(齊)나라의 구원]

 

서기전653년 무진년(戊辰年)에 매륵(買勒) 천왕께서 군사를 보내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燕)나라를 정벌케 하였더니,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의 복병(伏兵)에 걸려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하고 물러갔다.

 

수유(須臾)는 서여(胥餘)라는 이름을 가진 은나라 왕족 기자(箕子)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즉 기자족(箕子族)을 須臾族(수유족)이라 부르는 것이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 주(紂)의 숙부인 자서여(子胥餘)가 은나라의 기(箕) 땅에 봉해진 자작(子爵)이라 하여 부르는 명칭이며, 서기전1120년에 단군조선 땅에 망명하여 이후에는 단군조선의 제후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고죽(孤竹)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고죽국(孤竹國)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 중앙조정인 진조선(眞朝鮮)이 기후국(箕侯國) 즉 수유국(須臾國)과 함께 연(燕)나라를 정벌하였던 것이며, 이에 연나라가 제(齊)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고 당시 패자(覇者)의 나라이던 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고죽국에 쳐들어 온 것이 된다.

 

이때 제나라 군사들은 고죽국 땅에서 복병(伏兵)전술(戰術)에 걸려 이겨 보지도 못하고 화해를 구하고는 퇴각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단군조선에서는 강태공(姜太公)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병법(兵法)인 육도삼략(六韜三略)의 원류가 되는 고도의 전략전술(戰略戰術)을 포함하는 병법(兵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된다.

 

제(齊)나라 환공(桓公) 시대의 고대중국 기록에서는 산융(山戎)의 임금을 말로(末路)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산융(山戎)은 위치상으로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던 구려(句麗)가 되며, 말로(末路)라는 글자는 당시 단군조선의 제36대 천왕이던 매륵(買勒)과 유사한 소리가 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산융(山戎)을 단군조선의 대칭(代稱)으로 사용한 것이 된다.

 

한편,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는 서기전651년 제나라 환공이 산융(山戎), 이지(離支), 고죽(孤竹)을 정벌하였다고 하는 바, 이 기록은 단군세기의 서기전653년 기사와 관련있는 것이 되는데, 서기전653년에 단군조선이 수유국(須臾國)과 합공으로 연나라를 정벌하자, 연나라는 당시 주(周)나라 제후국 중에서 패자(覇者)의 나라이던 제(齊)나라에 긴급을 알려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제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의 보필로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고죽국(孤竹國)에 쳐들어 왔다가, 계속하여 단군조선의 영지성(永支城)으로서 영지국(永支國)이라고도 불리는 이지(離支)와 구려국(句麗國)이 되는 산융(山戎)까지 쳐들어 왔다가 소득없이 물러간 것이 된다.

 

당시 제나라 환공이 관중과 함께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고, 고죽국의 수도가 되는 무체성(無棣城)의 서북쪽에 위치한 영지성(永支城, 離支)에 이어 산융(山戎)까지 들어갔다가 모랫바람에 후퇴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모랫바람은 곧 사막(砂漠)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당시 제나라가 침공한 것이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구려국(句麗國)의 사막지대로서 지금의 장가구(張家口) 북쪽의 내몽골지역이 되는 것이다.

 

[태자 마물(麻勿) 즉위]

 

서기전647년 갑술년(甲戌年)에 매륵(買勒)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 마물(麻勿)이 즉위하였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지리산 노고단에 핀 진달래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