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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43]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96

조선(朝鮮) 제21대 소태(蘇台) 천왕(天王)의 역사, [상장(上將) 서여(西余)가 번한(番韓) 소정(小丁)을 죽이다]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1/04 [14:14]

[홍익인간 7만년-143]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96

조선(朝鮮) 제21대 소태(蘇台) 천왕(天王)의 역사, [상장(上將) 서여(西余)가 번한(番韓) 소정(小丁)을 죽이다]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1/04 [14:14]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서기전1289년경 상장(上將) 서여(西余)가 은나라의 북박(北亳)을 습격한 뒤, 병사들을 탕지산(湯池山)에 주둔시키고 자객을 보내 번한(番韓) 소정(小丁)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 등을 함께 싣고 돌아왔다.

 

즉 상장 서여가 번한 소정을 자객을 보내어 살해한 것이 된다. 아마도 천왕의 권세가 약해진 시기에 번한 자리를 차지할 욕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실재역사로 보아 상장 서여는 해성(海城)의 욕살(褥薩)이 되었던 것이며, 서기전1285년에 제22대 색불루 천왕에 의하여 번한(番韓)에 봉해진 인물이 된다.

 

탕지산(湯池山)은 역사상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이 있는 곳으로 단군조선 번한(番韓)의 요중(遼中) 12성에 속하는 탕지(湯池)에 있는 산이며, 지금의 난하 중하류 지역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난하 동쪽 바닷가 지역에 또한 번한 요중 12성의 하나로서 번한의 동서남북중 5경(京) 중에서 동경(東京)에 해당하는 험독(險瀆)이 위치하고 있다. 험독은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자리가 될 것이다.

 

[고등(高登)이 모반(謀叛)을 일으키다]

 

서기전1287년 갑오년(甲午年)에 고등(高登)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開城)에 웅거하면서 소태(蘇台) 천왕에게 항거하였다.

 

개성(開城)은 개원(開原) 즉 개사원(蓋斯原)에 있는 개사성(蓋斯城)이다. 고등은 개사원 욕살 출신이다. 개사원에 장당경(藏唐京)이 소재하며 개사성 부근에 장당경이 있는 것이 된다. 장당경은 단군조선 초기부터 존재한 이궁(離宮)에 해당한다.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고등(高登)을 토벌(討伐)하러 가다]

 

서기전1287년에 고등(高登)이 모반(謀叛)을 일으키자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군대를 일으켜 고등을 토벌하고자 하여 홍석령(紅石嶺)의 경계지점에 이르렀는데, 소태 천왕께서 고등을 용서하여 우현왕(右賢王)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토벌을 멈추었다.

 

[개사원 욕살 고등(高登)이 우현왕(右賢王), 두막루(豆莫婁)로 봉해지다]

 

서기전1287년 고등이 모반을 하고 있던 중 우현왕(右賢王)으로 봉해 줄 것을 거듭 청하므로 소태 천왕이 마지못하여 이를 허락하고 두막루(豆莫婁)라 부르게 하였다.

 

우현왕은 단군조선의 오른쪽 즉 서쪽을 맡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두막루(豆莫婁)는 큰마루(大宗), 큰머리(大頭)라는 의미의 이두식 표기가 된다.

 

소태 천왕이 고등을 우현왕으로 봉하자 모반자 고등을 토벌하러 갔던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토벌을 멈추고 되돌아 온 것이 된다.

 

[우현왕 고등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右賢王)이 되다]

 

서기전1286년 을미년(乙未년)에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이 죽고 그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고등의 아들은 우현왕이 되어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 되고 손자(孫子)가 대를 이은 것이 된다.

 

고등은 고구려에서 시조로 받들며 제사를 모신 인물인데, 서기전1285년 가을 9월에 제22대 색불루 천왕이 장당경(藏唐京)에 고등왕(高登王)의 묘(廟)를 세웠다. 장당경은 곧 개사원(蓋斯原)에 있는 이궁(離宮)이 된다. 

 

색불루는 서기전1285년부터 후기 단군조선을 시작한 인물로서 서기400년경 신라시대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符都誌)에서는 약칭 부루(夫婁)로 기록되기도 하는데, 임검씨(壬儉氏) 시대가 약 천년으로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1286년까지 1048년이며, 부루씨(夫婁氏) 시대가 서기전1285년부터 서기전426년까지 860년이며, 구물(丘勿) 천왕으로 시작되는 읍루씨(浥婁氏) 시대가 서기전425년부터 서기전238년까지 188년으로 부루씨 시대와 읍루씨 시대를 합하면 1048년이 되어 천왕 자리가 이어진 것이 합 2096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서기전238년부터 서기전232년 북부여에 공식적으로 접수되기까지 오가공화정(五加共和政) 6년을 합하면 단군조선의 역년은 2102년이 된다.

 

[기수(奇首)로 봉해진 서우여(徐于餘)와 우현왕 색불루, 마한 아라사의 반대]

 

서기전1286년에 소태 천왕이 해성(海城)에서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禪讓)하고자 하며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보고 서우여를 봉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니,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천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도 사람을 보내어 소태 천왕께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는 것을 중지토록 간하였으나, 소태 천왕은 고등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한 아라사와 우현왕 고등은, 소태 천왕이 해성의 욕살 서우여를 살수(薩水)의 기수(奇首)로 봉하고 선양하려 하는 것을 극구 반대한 것이 되는데, 소태 천왕은 이러한 청을 끝내 물리친 것이다.

 

기수(奇首) 서우여(徐于餘, 西余)를 일명 기자(奇子)라고 하는데 성명이 한서여(桓西余)가 되며, 은(殷)나라 왕족으로서 기(箕) 땅에 자작(子爵)으로 봉해진 기자(箕子) 는 성씨가 자씨(子氏)로서 성명이 자서여(子胥餘)이며, 둘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아마도 서여(西余), 서여(胥餘) 또는 서우여(徐于餘)가 아마도 수유(須臾)와 같은 말로서 잠시, 잠깐이라는 뜻을 지닌 말로 보인다.

 

서기전1286년에 단군조선의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가 기수(奇首)로 봉해졌다 얼마 안되어 폐하여지고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서기전1160년경 기(箕) 땅에 자작(子爵) 즉 기자(箕子)로 봉해진 자서여(子胥餘)가 서기전1119년에 주(周) 무왕(武王)의 신하가 되지 않고 자작(子爵)의 봉작을 버리고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망명하여 단군조선의 기후(箕侯)가 되었던 것이다. 소위 단군조선의 기후국(箕侯國)을 수유국(須臾國)이라고도 한다.

 

서우여는 해성(海城)의 욕살(褥薩)인데, 욕살이 되기 이전에는 상장(上將)을 지낸 것이 된다. 즉 서우여가 고등과 함께 은나라를 정벌한 공적(功績)이 있는 상장 서여(西余)라는 인물인 것이며, 아마도 그 공적으로 해성의 욕살에 봉해진 것으로 된다.

 

[우현왕 색불루의 군사혁명과 마한 아라사의 토벌]

 

서기전1286년에 우현왕 고등의 손자인 우현왕 색불루가 소태 천왕께 서우여에게 선양(禪讓)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간청하다 듣지 않자,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부여(夫餘)의 신궁(新宮)에서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였다.

 

이에 마한 아라사는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海城)에서 싸웠는데 전쟁에 지고는 전사(戰死)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마한 아라사는 색불루의 반역행위를 용서하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러 갔던 것이며, 해성(海城)에서 색불루의 군사와 전쟁을 하다가 사망한 것이 된다.

 

부여의 신궁(新宮)은 백악산아사달에 있는 궁궐로서 서기전2049년에 신경(新京)이라 불려지던 상춘(常春)에 있으며, 서기전1984년 상춘의 구월산(九月山)의 남쪽에 건립된 것이다. 구월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의 다른 표기가 되는 이두식 표기이다.

 

상춘의 백악산은 녹산(鹿山)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색불루 천왕이 수도를 정한 백악산아사달은 서기전1285년부터 서기전426년까지 880년간 후기 단군조선의 수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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