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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관=식민사관
2008/05/20 [04:05]
- 쥐나라의 동북공정=신라사관=일제 식민사관
- <삼국사기 신라국본기>로 문무왕 하편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함형 원년(670년) 7월에 이르러 입조사 김흠순 등이 와서 경계선을 그으려 하는데 지도를 검사하여, 백제의 옛 땅은 전부 돌려주라 하니 황하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고 태산이 아직 숫돌과 같이 되지 아니하여 (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3.4년간에 한번 주고 한번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다 실망하고 모두 말하기를 (이하생략)” (주 太山 = 泰山)
<= 신라 애들이 당나라에게 중국의 백제땅 모두 넘긴다고 하니 신라백성들이 김춘추.김유신세력에게 실망했다는 내용아니요?ㅎ 김흠순....김유신의 동생으로 흠춘(欽春)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화랑이 되었고 백제 정벌 전쟁에서는 태자인 법민 유신 품일과 함께 신라의 군사를 이끌었다.
신라의 김유신장군은 양하도총관(兩河道摠管)에 임명되어 군량을 평양에 운송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백제 패망시 김춘추가 당으로부터 받은 벼슬이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이다. 우이는 산동성을 나타내는 지명이다. <= 요건 당나라에 와서 지방제후들이나 하라고 임명한 건 같고..ㅎ..당나라가 원래 한반도까지 다 삼키려다 실패했지만, 신라애들 결국 당나라에게 고구려.백제영토 다 말아먹고 겨우 만주일부와 한반도에 만족한 주제에 역사적 열등감은 있어 가지고 한반도는 지네 땅이라고 하고 백제와 고구려는 전부 중국에다가 처 박아 넣으려고 애쓰는구만..일제 식민사관이나 신라사관이나 거기서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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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어린
2008/05/20 [13:05]
- 질문있습니다
- 그렇다면 신라 무열왕릉은 분명히 경주 선도산에 있습니다. 비석에 분명하게 나와있지요. 왜 신라가 반도와 대륙에 나눠 있다면 무열왕의 유택을 경주에 둔 것일까요? 백제나 신라가 대륙이었다는 의견을 믿고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신라왕들 중 유일하게 출처가 분명한(비석의 글이 온전함) 무열왕의 유택이 경주 선도산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추가 설명 부탁드립니다. 신라 통일의 왕으로 모든 신라인들이 추종하던(적어도 그랬던) 무열왕릉이면 중국 대륙에 있어야 했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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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
2008/05/20 [13:05]
- 식민사관 매식자분들 입장하세요..
- 위에 리플처럼 비과학적 악풀말고, 과학적, 정황적 구체적 내용으로 위 내용을 부정해 보시지요. 그러지 못할거면 위 글을 인정해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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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훈 칼럼리스트
2008/05/20 [15:05]
- 신라 태종 무열왕의 장지는 영경사(永敬寺) 북쪽입니다.
- 영경사 북쪽이 어딘인지는 현재 알 수가 없습니다. (중국 땅으로 봅니다) 경주에 있는 태종무열왕능은 후대에 이장을 했거나 아니면 시신도 없는 무덤일지도 모릅니다. 비석이야 얼마든지 후대에 세울 수 있는 거지요.
신라의 왕들의 장지는 대개 XX절 근처라고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지명은 모르겠고, 선덕여왕은 낭산(狼山)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경주에 선덕여왕의 무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낭산은 경주에 있는 산이름이 아니고, 양자강 하류에 아직도 그 지명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있던 왕릉은 없어지고 지금은 공설운동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 왕릉이 중국의 것이라면 문화재로 보전을 하지 갈아엎어 운동장을 만들겠습니까?
일제가 조작한 신라의 천년왕도가 경주입니다. 국민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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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어린
2008/05/20 [16:05]
- 그렇다면
- 저는 지식이 약하기 때문에 질문으로 이어가렵니다.
백제가 대륙에 있다는 말은 신라가 한반도 전체(대륙의 일부와)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반도 이곳저곳에서 적어도 경주와 같은 유물들이 좀더 나왔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유독 경주에만 왕릉이 밀집한 것이 좀 의아합니다. 가야나 한성의 유적들은 너무도 경주의 유물들과 차이가 많습니다. 성훈님에 대한 반박의 글이 무령왕릉의 예로 아주 첨예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저도 성훈님의 주장을 믿고 또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만, 경주에 있는 무열왕릉비가 후대에 세워졌거나 시신이 없는 무덤이란건 오로지 님의 추정이 아닐런지요? 기록에는 영경사 북쪽이라고 되어 있으나 선도산 앞의 무덤들 중 어느 한 무덤 앞에는 분명히 비석이 존재해 그 주인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무열왕릉의 귀부와 이수는 양식과 재질 분석결과 7세기 당대 세워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무열왕릉의 비석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비석에 이수부분에 분명이 태종무열왕의 묘라는 표식 있으니까요. 유물이 주인을 말해주는데도 조작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조금 비약적인 것 같습니다. 기록의 분석은 유물의 분석과 함께 항상 여러 각도로 같이봐야 하지 않습니까? 만약 (이것도 논거가 또 옆길로 샐수 있겠으나) 무영왕릉의 무덤이 이장되었거나 시신이 없었다는 님의 주장은 증거가 필요할것입니다. 고로 여쭙고싶은 것은 백제는 대륙에 근거하고 반도전체는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너무 약합니다. 저는 백제의 증거는 지식이 약해 모르겠지만 신라가 대륙의일부와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님의 말씀에는 수긍이 가지 않다는 말입니다. 만약 신라가 대륙과 반도 모두를 장악했다면 분명히 무열왕릉은 대륙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증거제시가 있으시면 추가 논지를 부탁드립니다. 성훈님의 글이 좋은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ps: 그리고 성훈님의 글을 읽어보면 박창범 교수가 시뮬레이션 한 주장을 너무 믿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아직까지는 한 개인의 주장일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전문가이시겠지만 좀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연구를 하여 분석한 결과를 도출한 후 그런 결론이 나야 할듯 합니다. 왜냐믄 한사람이 제출한 통계는 다수가 믿기에는 언제나 힘들기 때문입니다. 오류라는 것이 존재하지요. 다수가 인정할 수 있는 통계란 그렇습니다. 다수가 공통의 연구를 한 이후 같은 결과 혹은 수긍이 있어야 합니다. 제 말은 박교수의 주장이 참인거짓인지는 아직 모른다는 말이지요. 전문가가 연구해 놓은 자료가 있는데 일반인들이 뭘 알고 못믿겠다고 그러냐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님께서 그렇게 믿은 박교수의 주장이 혹 내후년쯤 당사자가 잘못된 시뮬레이션이라고 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고로 님께서는 너무 위험한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시는 겁니다. 저도 님의 주장이 정말 그렇게 들어맞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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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복현
2008/05/20 [17:05]
- 백제는 한반도 온조백제가 중심이 되는 역사입니다
백제사는 한반도(수도) 온조백제가 중심이 된다!
1)마한(한반도 지역)50여개국 속의 백제(=온조백제)
한치윤은 1765(영조 41)~1814(순조 14). 조선 후기의 실학자.반성리학적 입장에서 역사학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한국사의 정통론을 체계화하여 조선 후기 실학파의 한국사연구를 대표하고 있다
.※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世紀四, 三韓편을 보자.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在西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南與倭接, 辰韓在東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有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間地, 合方四千餘里,
한(=한반도 남부지역의 삼한을 총칭)은 3종이 있다. 하나는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서쪽으로는 54개 국이 있었다. 그 북쪽에는 낙랑(최씨 낙랑국)이 있고, 남족으로는 왜(=대마도.오키나와를 비롯한 일본열도)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경상도 지역)에 있었는데 12국이 있었다. 그 북쪽에는 예맥(강원도 지역)이 접해 있었다. 변진(소위 가야)은 진한의 남쪽에 있었는데, 역시 12국이 있었다. 그 남쪽에는 역시 왜와 접해 있었는데, 삼한은 모두 78국이 있었다. 그 중 한 나라가 백제(=온조백제=십제)다. 큰 나라는 1만 여호를 갖고 있었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이들은 모두 산이나 바다 지간의 땅에 살았다. 방경(=직사각형을 의미하니 한반도 남부지역은 빙 둘러 방경4천리가 맞다할 것이다)은 모두 4천여 리이다.
2) 삼한(三韓)의 위치와 강역
※이십오사(二十五史)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韓, 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趙一淸曰弁韓後漢書作弁辰, 然弁辰別是一國, 則此當作弁韓, 以當三韓之數…王會汾曰, 晉梁二書, 皆作弁韓…朝鮮史, 謂三韓誰曰分立實則辰弁二國, 僅爲馬韓所支配, 非勢均力敵也… 漢書朝鮮傳,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朝鮮雍閼, 師古曰, 辰謂辰韓之國也, 後漢書光武帝紀建武二十年秋, 東夷韓國人率詣樂浪內附, 東夷有辰韓, 卞韓馬韓謂之三韓國也, 梁書, 辰韓始有六國, 梢分爲十二, 新羅其一也, 馬韓有五十四國百濟其一也, 舊唐書, 百濟國, 爲馬韓故地,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한(韓=한반도 남부지역)은 대방(帶方=한반도 북부지역)의 남쪽에 있다. 동서(=동해와 서해)로 바다가 있고, 남쪽으로는 왜(倭=일본열도)와 접하고 있다. 나라의 방경은 4천리다.
3종(=단군조선해체이후 한반도 3한)이 있었는데,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조일청의 말에 의하면, 변한은 후한서에 보면 변진(=경상도 서남부 지역)으로 되어있다. 변진은 별도의 한 나라로 보일 것이나, 한 나라다. 이 당시에는 마땅히 변한이며, 당연히 삼한에 속한다.
왕회분의 말에 의하면, 진서·양서 두 책에는 변한으로 되어있다… 한서 조선전에 의하면, 진번은 진국이다. 위의 책을 볼 것 같으면 천자 조선국이었다. 사고의 말에 의하면 진은 진한의 나라다(=흉노 김알지 세력이 들어오기 전까지). 후한서 광무제(AD 25년) 건무 20년 가을에, 동이 한국인들이 무리지어 낙랑 땅에 이르렀다. 동이는 진한, 변한, 마한이 있었는데, 이를 삼한국이라 한다. 양서에는, 진한은 처음 6국(=신라의 기원인 6부촌)이 있었으나, 점차 12국으로 갈라졌다. 신라가 그 중 한 나라다. 마한은 54개 국이 있는데, 백제(=온조백제=십제)는 그 중 한 나라다. 구당서에 의하면, 백제국은 마한의 옛 땅이다. 마한은 서쪽에 위치에 있는데, 그 백성들은 서쪽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며, 씨도 뿌리고 곡식도 심었으며, 양잠을 했고, 목화도 심고 무명옷도 만들었다(서쪽은 곡식이 풍성한 평야지대가 산재한 충청.전라도 지역을 가리킨다). 각기 거느리는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큰 자는 스스로 신지라고 이름했다(단군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마한의 적자임을 보여준다..마한은 단군3조선의 하나로써 단군조선의 해체이후 진왕이라는 부단군격이 왕으로 추대되어 통치했으며, 북쪽에서 유입되어 세운 진한과 번한은 마한에게 조공을 바쳤다.이 마한을 근초고왕시기때 백제가 복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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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한반도의 온조백제가 결국 중심이 되어 한반도의 마한을 복속하고 일본열도, 나가 중국 동북부.동남부지역과 동남아시아까지 경영하게 되는 동아시아 해상제국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3면이 바다인 한반도 지역의 마한인들은 원래 선박제조술과 항해술이 뛰어 나서 일찍이 군선500여척을 이끌고 왜인들의 중심지 [해도]로 쳐들어가서 반란을 진압하고 일본열도를 복속시켰다는 [한단고기-마한세기]기록이 있다. 온조백제는 이 마한인들의 선박제조기술과 항해술과 나중에 "땅을 가지고 온조백제에 귀순합류한(한단고기-고구려본기)" 비류백제의 강한 북방군사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해상제국을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만주와 요서지역의 비류백제가 고구려와 전연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온조백제에 합류한 근초고왕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근초고왕시기 때 백제는 갑자기 강성해졌으며, 마한전역을 복속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초고왕.근구수왕때 서해를 건너 비류백제의 기반인 요서지역을 기반으로 중원.산동지역 등 중국의 동북부 지역과 양자강 지역인 중국 동남부 지역, 나가 동남 아시아까지 해상을 통하여 진출하여 탄탄한 백제의 기반을 다졌다고 볼 수 있으며, 그 토대위에서 후대인 동성왕이 북위와의 전쟁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역량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400여년간을 백제가 지배한 중국지역에 수많은 백제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했을 것이며, 한반도백제와 관련한 백제지명들과 유적들이 얼마든지 지어질 수 있고, 건설될 수 있는 것이다. 서해를 못 건넜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백제를 중국에다만 가두고 있는 것이다. 고대 백제인들은 돛을 달고 항해를 했다. 고대인들의 의지는 현대인들보다 오히려 강했다고 보면 얼마든지 이해가 될 것이다.
백제사에 대해 간략히 요약하면 고구려의 고추모의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소서노와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떠났다. "남쪽으로 이주하여 진.번 사이, 북으로는 대하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바다와 접해했는 외진 곳에 터를 잡고 10년간 장사를 하여 부를 쌓았다. 소서노는 살만한 땅이라고 고추모에게 편지를 쓰니 고추모도 기뻐하며 '어하라'라 칭했다. 비류가 즉위하자 따르는 자들이 없었다. 온조는 마한이 쇠퇴할 것이라는 신하들의 얘기를 듣고 배를 만들어 남쪽으로 떠나 서쪽으로 바다와 접해있는 지역에 성을 쌓고 신하10명이 따랐다 하여 '십제'라 했다..비류세력은 땅을 가지고 귀순했다 (한단고기-고구려 본기)" 이 한단고기 내용을 정리하면 소서노와 비류.온조는 지금의 발해만 지역에 정착하여 장사를 한 후 돈을 많이 벌었고, 소서노는 고추모에게 여왕의 칭호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비류가 소서노의 뒤를 이어 왕에 올랐으나, 따른 무리가 적었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유리에게 왕위를 빼앗긴 분노를 대충 짐작할 수 있으며, 결국 온조는 비류와 합류하지 않고 단독적으로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고, 이후 비류세력이 온조백제에 귀순합류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문헌들을 보면 비류세력이 만주지역에서 고구려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 패하고 온조백제에게 땅을 가지고 귀순합류했다는 내용에서 백제의 중심은 결국 한반도 온조백제임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비류는 우태의 아들이지만, 아바지의 나라인 고구려와의 충돌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온 온조는 우태의 아들이 아니고 고주몽의 아들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온조세력이 배를 타고 남하하여 1차로 터를 잡은 지역이 백제관련 토성과 유물들이 발견되는 지금의 북한 예성강지역으로 추정되며, 고구려의 남하에 밀려 2차로 지금의 한강지역에 터를 잡고 성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의 강동지역에서 발견된 한강이남의 풍납토성은 백제한성을 둘러싼 성으로 볼 수 있으며, 초기 백제의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며, 삼국사기에서도 기록하고 있듯이 백제초기에 교류했던 중국의 동진의 토기들이 다량 출토된 점이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된다. [대부]라는 글자가 쒸어진 유물은 백제 한성을 점령한 고구려 군대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이집트보다 규모가 큰 무덤이 열쇠모양의 전방후원분인 일본의 인덕왕릉인데, 이 일본의 인덕왕릉보다 규모가 큰 무덤 10여개 이상이 풍납토성 부근인 서울 강동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서울 석촌동 피라미드는 백제초기 무덤이라기 보다는 마한시대의 무덤으로 보아야 맞다. 백제초기무덤들이나 고구려 무덤들은 시체를 두는 지하석실을 만든 후에 흙을 덮는 봉토고분양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서울 강동지역은 초기 백제왕들이나 왕족들의 무덤들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백제의 분국이나 마찬가지인 일본의 인덕왕릉이 바로 서울 강동지역의 대형 전방후원고분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 초기수도지역인 집안지역의 1만 5천기 무덤들 또한 고구려 무덤들이라기 보다는 고구려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무덤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국정부는 집안지역의 피라미드 무덤들이 고구려유적이라고 하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고구려유적지라고 해야 서안지역의 피라미드의 연대가 올라간다. 사실, 서안지역의 피라미드 연대보다 백두산지역인 집안지역의 피라미드 연대가 더 올라간다. 집안지역의 피라미드연대보다는 한반도 피라미드 연대가 더 올라간다. 피라미드 무덤의 원형이 남방식 고인돌 무덤이다. 세계 고인돌의 70%가 한반도, 그것도 호남지역과 북한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 고인돌 무덤양식이 피라미드 무덤으로 발전한 것이다. 원래 한반도에 피라미드 무덤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시대때 훼손시켜 버렸다고 한다. 이것도 일본인들이 고대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데서 오는 무지와 역사적 열등감에서 기인한다 할 것이다.
집안지역의 1만 5천기 피라미드 무덤들과 석촌동 피라미드 무덤들은 모두 백두산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단군왕검의 개국과 관련하여 한민족의 화합단결를 선언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백두산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자료]서울 강동지역에서 발견된 세계 최대의 한국의 전방후원분
일본의 전방후원분
구굴로 비교해 본 한일 전방후원분
위성사진에 명시된 고도를 이용해 양국 고분의 크기를 재본 새드박스는 이번에 한국에서 발견된 고분이 일왕의 무덤인 인덕릉보다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강동구 일대 고분 중 하나는 1983피트 상공에서 찍은 위성사진에 화면이 꽉 찼는데 일본의 인덕릉과 용산릉은 각각 1911피트와 1756피트에 불과했다.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에 위치한 인덕릉은 이집트 피라미드보다도 큰 세계 최대규모의 고분으로 알려져 있어 새드박스의 분석이 맞다면 이번에 발견된 우리 고분이 세계에서 가장 큰 고분이 되는 셈이다. KBS는 지난달 31일 서울강동문화원이 백제문화연구원에 의뢰해 탐사를 벌인 결과 전체 길이가 00∼150m에 달하는 고분 10개가 발견됐으며 일본식 고분 양식인 전방후원분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앞으로 한일 양국간 큰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한편 KBS는 ‘역사스페셜’을 통해 인덕릉에서 발굴된 청동거울(동경)이 백제 무령왕릉 속 동경과 형제처럼 닮았다는 점에 착안,일왕이 백제후손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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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jjsjsjsj
2008/05/20 [17:05]
- 대륙
- 대륙은 분명 이민족의 영토이며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단군역사입니다....
아직도 정신못차리는 위 같은 역사나좀 안다는 사람들이 오ㅐ곡된 역사서만 탐독하고
식민 매국적 발상을 하는 것이지요....잘 기억 하세요 한국영토는 한반도를포함
일본일부와 대륙전체가 한국 영토임을 아세요 그렇게 협소한 긴가민가 한 사학가지고
선량한 학구들 사학 흩트리지말고요...다시말하지만 대륙은 우리 대륙임니다..편협한
사고 이제그만 버리세요들 우리 는 대륙의 원 주인임을 깨우처야 미래가 보입니다
미처 버린 지금의 사학책으로는 한국의 미래가 없어요...얼마나 더 흘러야 정신들
차릴건가요 지금 일본은 한국을 다시 처먹으려 독도망언과 망발에 고유영토라 뻘짓인데요
좀들 정신들 차리세요 사학에 관심이 있으면 올바른 사서를 찾을려노력해서 제대로된
글을 써야지 긴가민가 글은 아무리 학식이 분분하다해도 미래 어린 사학자들에게는
독일 뿐이예요.....반세기도넘은 이나라에 아직도 저 몬난 이병도 사고가 있음은
통탄하지안을수없음이지요 그자도 죽음에 임박해서는 단군조선은 신화가아닌
실존의 역사라 밝혔어요... 그러할진데 아직도 정신없는 이나라 역사인식은
이모양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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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훈 칼럼리스트
2008/05/20 [18:05]
- 간단히만 설명드리겠습니다.
- 현 무열왕능비가 옮겨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경주의 왕능들은 거의 후대에 이장되었거나 새로 만들어진 무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낭산에 묻힌 선덕여왕의 무덤입니다. 김춘추가 당으로부터 직책이 우이도행군총관입니다. 우이도는 산동성을 말합니다. 백제와 신라의 전투는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그런 사람의 무덤이 경주에 있다는 것은 억지입니다.
박창범교수의 논문은 혼자 연구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논문이 발표된 지 20년이 넘었건만 아직 반박 논문이 없습니다. 그만큼 정교하고 사실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학자의 논문이 대충 시뮬레이션 정도로 보고 나중에 잘못된 것이라고 수정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님의 생각일 뿐입니다. 박교수의 일식분석 말고도 여러 증거들이 삼국에 대륙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박교수의 논문은 과학적인 증거의 하나일 뿐입니다.
한반도는 고구려의 지배에 있다가, 신라가 마립간에서 왕이란 칭호를 쓰는 지증왕 때부터 독립한 것으로 봅니다. 진흥왕순수비는 의혹은 있으나 뭐라 얘기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한반도 동신라는 대륙 서신라의 분국 수준이기 때문에 유물이나 유적이 한반도 전역에 많지 않은 겁니다.
백제가 왜와 접(接)하고 있다는 것은 육지로 붙어있다는 말입니다. 그건 대륙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황하의 물줄기는 백제 건국 시에는 천진으로 가고 있습니다. 東西의 海 중 西의 海는 바로 황하를 말하거나, 대야택이나 독산호 같은 큰 호수를 말할 수도 있고, 대평원을 바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해라는 지명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海가 바다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방이라는 지명이 대륙 하북성 황하 위에 에 엄연히 있고, 위례성은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인데 그게 어떻게 한반도에 있단 말입니까? 한반도에 있었으면 김부식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식민사학에 쩔은 신문기사를 올리는 것은 저를 음해하려는 것으로 판단되어 댓글을 생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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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알기
2008/05/21 [01:05]
- 삼한을 바로 알아야 안 헤갈린다
- 온조백제가 속해있던 삼한 땅 方4천里의 크기는 얼마인가?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三韓 땅 方4千里를 두고 안원전류의 환빠들은 "한반도의 종단이 3000리인데 三韓 땅이 方4千里라면 필시 이 三韓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엄청난 크기로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라는 망상적 자아도취 속에서 헤매기 십상이오. 그러다보니 三韓과 인접한 백제가 대륙에 위치하게 되고 또 그와 인접한 낙랑이 위로 올라가게 되며 당연히 고구려는 하북성쪽으로 위치가 다 뒤바뀌어 한반도 역사가 모조리 중국땅에 기반한 것인즉, 환빠들의 정체가 도대체 동북공정을 시도하는 짱깨들의 논리와 무엇이 다를 바가 있다는 말이오.
方可四千里~ 에서 可는 부사요. 수치를 나타내는 수사(數司) 앞에서 쓰이면 "대략~" 이라는 뜻을 갖소. 그렇다면 그 대략 方四千里는 어떻게 해석해야 옳으오? 九章算術(구장산술), 周髀算經(주비산경)같은 고대 중국의 수학서들을 보건대 積方(적방)이라는 단어가 있소. 이때 積方(적방)은 당연 면적이 되오. 예컨대 가로 2里 , 세로 3里 의 땅이 있다고 했을 때 총 면적이 얼마이냐 묻는다면 積方이 얼마이냐 하고 묻소. 그러면 답은 積方 6里가 되오이다. 이때의 里는 엄밀하게 말해서 (里)² 즉, 평방里의 개념이오. 미터법으로 따지자면 ㎡의 개념이라 보면 되겠소.
그러나 고대 중국의 수학서에서는 평방里, 또는 평방尺 이런 개념은 사용 하지 않소. 일본 학자들이 가끔 이런 소릴 하는데 낭설이오. 면적에 쓰인 里나 步, 尺은 평방의 의미를 갖지만 면적을 뜻할 때나 길이를 뜻할 때나 이 단위글자는 같게 사용되외다. 심지어는 부피를 나타낼 때도 里를 사용하기도 하오. 고대 중국에서는 단지, 개떡같이 말하고 찰떡같이 알아들었다고 생각될 뿐..고대 중국인들이 어찌 평방의 개념을 다 알겠소이까?
구장산술(九章算術)에 "廣從步數相乘得積步。 以畝法二百四十步除之, 即畝數。 百畝為一頃。"라는 말이 있으니 세로와 가로의 길이인 步數끼리 서로(相) 곱하여(乘) 적보(積步)를 얻는다 되어 있소. 만약 步대신 里를 사용한다면 積里(적리)라 할 수 있으니 積里라 함은 곧 면적을 뜻한다 할 수 있겠소이다.
실상이 그러하온대, 方의 개념 역시 면적을 뜻하기도 하고, 사각형 토지의 한 변을 뜻하기도 하고, 사방 둘레의 합을 뜻하기도 하였소. 따라서 方이라는 개념은 그때 그때 문맥에 맞게 합리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보는 바이요. 이것이 소햏의 연구 결론이외다.
그렇다면 중국 25사에서 종종 등장하는 方의 개념이 둘레로 사용되는 경우를 살펴 보겠소. 고대 국가나 지방군현의 경우 강역을 정확하게 상고할 길이 없어 증명이 곤란하나 대마도 땅의 크기는 고대나 현대나 큰 차이가 없으므로 좋은 비교사례가 될 것이오.
삼국지 동이전 倭조에 의하면,
始度一海,千餘里至對馬國.其大官曰卑狗,副曰卑奴母離.所居絕島,方可四百餘里,土地山險,多深林,道路如禽鹿徑.라고 되어 있으니 대마도의 크기는 대략 方4백여里로 계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소이다. 이를 환빠들의 지적처럼 한 변의 크기로 계산하여 사각형으로 잡아보면 積方 160,000里에 달하오. 이는 우리나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합한 면적이요. 언제부터 코딱지만한 대마도가 이리 컸단 말이오?
그렇다면 대마도의 최대 종축을 얘기하는가?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으나, 실제 거리를 측정해 본 결과, 대마도의 최대 종축은 漢代의 개념으로 약 130리 정도에 불과하오. 400리의 거리는 오늘날 165km에 해당되는 거리로 서울 시청에서 강원도 끝 강릉시청 거리 쯤 되어이다. 아무리 널널하게 잡아도 대마도의 길이는 이 거리의 1/3을 벗어나기 어렵소. 이로서 삼국지 동이전의 倭조에서 이야기 하는 대마도의 方400里는 한변의 길이도 아니도, 최대 종축의 길이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소. 오히려 이 400여里의 뜻은 둘레를 뜻함이 밝혀졌소.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구글어스의 대마도를 가지고 실측해 보기로 하는게 좋을 것 같소이다.
보다시피 쪽바리들의 대마도를 가지고 변계(邊界)의 둘레를 재어보니 대략 180km 정도 값이 나왔소이다.
이것을 고대 중국의 里의 개념으로 변환을 해보면, 진수의 삼국지가 편찬될 무렵에 1里는 414m, 즉 0.414km 정도 되오. (中國歷史地名大辭典, 鹽英哲, 凌雲書房,1980에 의함).
그렇다면 이 180km는 삼국지 시절의 434里가 되오이다. 그러니 위 三國志 魏書 상에 나타난 바, 대마도의 크기가 대략 400여리다. 한 것은 딩동댕이고 빙고라고 말하고 싶소이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문제의 기록 삼한시대 땅덩어리를 증명해 볼 차례요. 위에 맨 처음 문장에서 소개하였던 바대로 三國志 魏書상에 나타난 삼한의 크기는 대략 方4천里라 했소. 역시 이 것을 한변의 크기로 본다면 4,000里 × 4,000里 = 1천600만里가 면적이 되오이다. 도저히 말이 안되는 개념이라 할 수 밖에 없소.
위 대마도의 경우 섬이므로 비교적 고대와 현대의 땅덩어리가 어느 정도 일치하기 때문에 실측하여 비교하기가 수월했으나 삼한의 경우 구체적 강역을 상고할 길이 없으므로 대략 통설의 입장을 따라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 비정하여 지도를 가지고 실측해보기로 하겠소이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 즉, 낙랑군 동부에 해당되는 강원도 북부와 대방군 이하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사방 둘레를 측정하여 본 결과 약 1,476km로 값이 나왔소이다. 이를 역시 삼국지 시절의 里단위로 환산하여 보면 3,565里가 산출되오이다. 4,000리보다 약간 적은 숫자가 나왔으나, 앞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삼한의 땅덩어리를 정확하게 상고할 수가 없어 나오는 오차라고 보이오. 실제로는 이 지도상의 표시강역보다 더 크다고 생각되오. (강원도 쪽으로 좀더 올라갈 수 있다고 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