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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정읍시 영원면 백정기 의사 기념관을 찾아

윤봉길·이봉창 등 의사와 함께 독립투사로 대한민국 삼의사이다

이영노 기자 | 기사입력 2015/04/16 [11:14]

[포토]정읍시 영원면 백정기 의사 기념관을 찾아

윤봉길·이봉창 등 의사와 함께 독립투사로 대한민국 삼의사이다

이영노 기자 | 입력 : 2015/04/16 [11:14]
▲ 백정기 의사 기념 석탑     © 이영노
▲ 기념관 입구    © 이영노
▲  기념관 입구   © 이영노
▲백정기 의사 상     © 이영노
▲백정기 의사 추모관    © 이영노
▲     © 이영노
▲  백 의사 영전에 추념   © 이영노 기자
 
▲ .백정기 의사 상하이 육삼정 의거 생전모습     © 이영노
[플러스코리아/이영노 기자]정읍시 영원면에 훌륭한 의인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다.

바로 백정기 의사다. 

그의 자취를 찾아 돌아본다.

백정기 의사는  “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평화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라고 외쳤던 사람이다.  

백정기 의사는 1896년(高宗 建陽) 1월 19일 부안군 남하면 내진리에서 아버지 백사순(白士順)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일찍 부친을 여의었다.

수원 백씨(水原 白氏)인 선생은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성장하였으며 호는 구파(鷗波), 자는 용선(溶善), 수원 백씨로서 가정 환경이 어려워 주경야독하였지만 남달리 총명하여 사서삼경은 물론 신학문에도 능통하였다. 

15세가 되던해 우리나라가 강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비록 어리지만 소년의 가슴에도 일제에 대한 울분과 이에 대한 저항 의식 및 구국일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향리인 정읍으로 내려와 만세세위를 선도하였고, 동지들과 서울, 인천을 오가며 일제기관의 파괴와 방화, 요인암살 등을 계획하다 일경의 추격을 받고 그해 8월 중국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중국을 근거지로 수차례 국내를 왕래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펴다 일시 일제 경찰에 구금되었으나, 의사의 기지로 무사히 나와 1922년에 북경(北京)으로 재차 망명한다. 

1924년 일본 동경에 잠입하여 은신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여 일왕 처단과 수력발전소 파괴

등을 계획하였으나 불의의 관동대지진으로 뜻을 못 이루고 북경으로 다시 돌아왔다. 

북경에 온 의사는 이회영(李會榮), 신채호(申采浩)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크게 감화되었다. 

 의사는 보다 더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고자 1924년 6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였다.

무정부주의는 국가를 부정하고 개인의 완전한 자유나 독립이 보장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서 이의 실천을 위해 폭력테러리즘적인 방법을 도입하였다.  

의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고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하여 상해 임시정부 기치하에 통일 단합하고 중국, 미국, 영국, 러시아 등과 공동 투쟁하여야 된다는 연대항쟁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조직된 이 연맹에 가담 활동하였다. 

여기서 의사는 중국동지들로 조직된 남화(南華) 청년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1925년 7월의 일본, 영국 두 나라 자본가들을 상대로 유명한 상해(上海)파업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더불어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동원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1927년 여름 농촌의 자치자위(自治自衛)운동을 한·중·일 3국동지 합작으로 일으키게 된다. 

의사는 이정규(李丁奎)형제와 정화암(鄭華岩)과 더불어 복건성 천주시 민남 25현 민단편련처)(福建城 泉州市 民南 25縣 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농촌계몽과 직화에 힘써 그 조직이 수천명으로 커지자 토비(土匪) 및 공비(共匪)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南京)에서 동방무정부주의자동맹이 조직되었는데 의사는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의사는 기관지 『동방(東方)』의 편찬위원으로 활동 중 과로로 인해 폐병을 얻어 북경에서 잠시 요양을 하였다. 

 요양하는 중에도 동지들과 같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고 또한 1930년 길림성 해림시(吉林城 海林市)로 가서 김종진(金宗鎭), 이강훈(李康勳)등과 같이 김좌진(金佐鎭), 이을규(李乙奎) 등이 조직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가담하여 재만한교(在滿韓僑)의 조직강화와 혁명사상 최고에 전략하는 한편 독립운동전선을 분열시키려는 반동분자의 구축과 일제의 주구 색출에 적극 노력하였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나자 의사는 북경을 거쳐 상해로 들어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산하 단체로 남화구락부(南華俱樂部)를 두는 한편 중국인 동지들과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여 한중공동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의 실행을 위해 행동대를 편성하였는데 이른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일명 BTP(BLACK TERRORIST PARTY)라고 불리었다. 

흑색공포단은 토의 후 곧장 실력행사에 들어가 곳곳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여 방화, 파괴하였으며 특히 천진(天津)에서는 중국인과 백 의사, 이강훈, 원심창(元心昌) 등과 같이 일본의 군수물자를 싣고 들어온 일본군함 만톤급 1척을 대파시키는 대전과를 세워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었다. 

1933년 의사는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내의 육삼정(六三亨)이라는 고급일식점에서 일본 군부의 거물들이 중국의 군별들과 회합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즉 일본 육군대신 황목정부(荒木貞夫)가 주중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에게 미화 2천만불 상당의 거금을 주어 중국 국민정부내의 附日分子와 고급장성을 매수하여 항일유격대와 독립군을 탄압시키고자 그 회의를 1933년 3월 17일에 연다는 것이다. 

연맹은 곧 회의를 소집하고 이에 참여할 대원을 뽑았는 바 의사는 강력히 요청하여 이강훈, 원심창 의사 등과 같이 3인이 육삼정에 폭탄을 던져 아수라장을 만들고 왜적을 처단한다는 계획을 만들었다. 

폭탄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때 사용되었던 것과 동형으로 백범 김구(白凡 金九) 주석이 주고 간 것으로 사용하고 투척연습과 현장 확인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거사당일 육삼정 부근 송강춘(松江春)이라는 음식점에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중 이미 사실이 누설되어 급히 밀어닥친 일·중 합동경찰에게 거사직전 체포되어 상해에서 취조를 받은 후 같은해 7월 5일 일본 장기(長岐)로 압송되었다. 

백 의사 등은 장기지법(長岐地法)의 판결을 받았는데 백의사와 원심창 의사는 무기징역, 이강훈 의사는 15년 징역을 언도받았다. 

백 의사는 1934년 6월 5일 적의 땅인 일본의 감옥에서 폐병이 악화되어 39세의 젊은 나이를 일기로 순국하였고, 원심창과 이강훈 의사는 복역 중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7월 6일 의사의 유해는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의사와 더불어 조국으로 옮겨져 전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을 치룬 후 현재는 선생의 유해는 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묘에 안치되어 있다. 

-백정기 기념 홍보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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