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100주년
지난 2023년 9월 1일은 일본 간토(關東) 지역에서 1923년 9월 1일 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 사건은 1923년 9월 2일~6일까지 일본 간토지방 일대에서 일본 군경과 무장한 민중들이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한 흑역사이다.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는 지난 9월 6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와 여당에 ‘당장 진상규명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간토대지진 학살 피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할 정부가 ‘색깔론’으로 앞에서 공격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100년 전의 간토학살 광풍이 재현되는 것과 같다”고 규탄했다. 지난 9월 1일 윤미향 무소속 의원은 ‘재일조선인총연합회’가 주최한 간토대지진 학살 추모식에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1923년 9월 1일 토요일 11시 58분,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일대에 진도 7.9의 대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원지는 가나가와(神奈川) 현 앞바다인 사가미(相模) 만에서부터 도쿄 만, 지바(千葉) 현이 있는 보소(房總) 반도까지 간토 지역 남쪽 바다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칸토 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인 오전 11시 58분은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이 날 도쿄를 비롯한 지진피해지역에서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업소에서 불을 사용하였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대부분 목재 건물인 피해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것이다. 지진 사망자의 90%가 화재로 인한 사망이다.
설상가상으로 기상여건도 화재 광풍을 부채질했는데, 지진 전날인 8월 31일 일본 큐슈 지방에 태풍이 상륙했다. 이 태풍이 일본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고 도쿄를 비롯한 칸토 지방에 거센 남풍이 불고 있었다. 목재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도시구조에다가 지진이 발생해 지붕을 덮고 있던 기와들이 벗겨진 틈으로 강풍까지 부는 바람에 불티들이 사방으로 날려 화염 소용돌이까지 발생했다.
4만여 명의 피난민이 몰렸던 스미다 강 바로 근처에 있던 육군 피복소 창고에서는 거대한 화염 소용돌이가 발생해 단 15분 만에 3만 8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도쿄 지역과 요코하마 지역, 치바현, 카나가와현, 시즈오카현 등에서 10만 명에서 14만 2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7천 명이 실종되었다. 10만 9천여 채의 건물이 전부 파괴되고 10만 2천여 채는 반파되었다.
간토 대지진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후 근대사회로 진입하여 맞이한 최대의 재난이었다. 피해액은 지진발생 전년도 국민총생산액의 1/3에 이르렀다.
이틀 만에 규모 6 이상의 여진이 간토지방에서만 무려 15번이나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패닉에 빠졌다. 지진 발생 다음날인 9월 2일에 계엄령이 공포되었고, 군이 치안에 동원되었다. 계엄령 국면에서 6만4천명의 육군병력과 전국에서 소집된 경찰력이 결집하였다. 그리고 무고한 조선인들이 일본의 군경과 민간인에게 학살당하는 만행이 벌어졌다. 재난을 당한 조선인들은 구조를 기다리다가 또는 안전한 곳을 찾아다가 만난 경찰과 일본 민중에 의하여 비인륜적 죽임을 당하였다.
● ‘여성‧임산부‧아이’까지 무차별 학살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는 9월 1일부터 나돌기 시작하였고, 9월 2일에는 ‘조선인 폭동설’이 더욱 확대되었으며 전날보다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직접 유포하였을 뿐 아니라 유언비어를 믿고 조선인을 학살하는 일본인들의 행위를 방조하였다.
조선인 학살은 9월 2일에서 6일까지 집중적으로 자행됐다. 군대와 경찰이 조선인을 연행하고 죽이자, 일본 민중은 유언비어를 사실로 확신하면서 자경단(自警團)을 구성하였다. 특히 제대한 군인들이 자경단에 대거 포함되면서 학살을 주도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자경단은 일본도와 죽창, 도끼 등으로 무장하고 중요한 장소나 지점에 검문소를 설치하였으며, 조선인 특유의 인상, 풍채, 특유의 발음, 풍속 등을 이용하여 조선인을 색출하였다. 학살당한 조선인에는 청장년층만이 아니라 여성, 임산부, 아이까지 섞여 있었다.
조선인 학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허구맹랑 유언비어였다. 유언비어는 경찰에 의하여 유포되었고, 그것을 의심 없이 믿은 일본 민중이 조선인을 무차별로 학살하였다.
이 때 학살당한 조선인 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간토대학살’이 일어나자 당시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여기에 가장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임정은 그 기관지 ‘독립신문’(1923년 12월 5일)에서 6,661명을 제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조선인대학살 당시 간토(關東)지방에 약 2만 명의 조선인이 살았는데, 간토대진재 때 일본 관헌이 조선인을 강제 수용한 숫자는 1만1천여 명이었다. 그렇다면 1만 1천명 이외의 9천여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 한일 양국 ‘진상 철저히 규명해야’
그 비극이 일어난 지 100년을 맞아서도 일본은 이 상처를 아물게 할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하지 않는다.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공식 기록이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를 향한 현지 일부 언론의 비판이 잇따르는 가운데 아사히신문은 지난 9월 10일 사설을 통해 “사실(史實)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해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발언을 되풀이한 데 대해 “위험한 역사수정주의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회피하면서 사건을 덮어왔다. 일본 정부는 학살 후 조선인 폭동을 오히려 기정사실화 하였고, 학살에 대한 국제적 시선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을 학살한 자경단원에 대한 형식적인 재판을 진행하였다. 이는 무고한 조선인의 죽음에 일말의 윤리적 도덕적 가책이나 책임도 공감하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두 나라 사이에는 이 문제를 정식 의제로 상정하여 비극적 역사의 상처를 풀어보려고 하는 의도가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이런 미증유 상처의 회복을 위해 국민을 대표하는 우리 국회에서는 어떤 노력을 했는가?
19대 국회에서 유기홍 의원 등 103인이 2014년 4월에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출한 적이 있다. 20대 국회에 들어와서도 이명수 의원 등 10인이 2016년 9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두 법안은 임기만료로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법률로써 성사시키지 못한 이 현실, 이게 대한민국 국회의 민낯이다. 간토대학살 100주년을 맞아 올해도 여야 의원 100명의 이름으로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 법안을 제출했으나 언제 의결될 것인지 장담할 수 없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발생한 조선인 학살은 진상규명과 일본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 동시 진행형의 사건이다. 여기에는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학살 진상조사단의 조사를 방해하고 조선인 사체를 은폐한 책임도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조선인 학살에는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명백하게 일본 민중의 책임도 존재한다. 조선인을 학살한 일본 민중들은 자신의 행위를 국가를 위한 행위로 정당화하였으며 학살당한 자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였다.
‘간토조선인대학살 100주년’을 맞아 양국 정부는 차별과 편견에 바탕을 둔 인권 침해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각 기관에 자료 조사를 지시해 실태에 다가가고, 피해자에게 ‘석고대죄’ 해야만 한다.
원본 기사 보기:모닝선데이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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