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교수, 아직도 내 말을 농담으로 받소?” “그럼, 비밀단체를 만들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 말을 끝으로 김 교수는 총리 곁을 떠나자마자 갑오동이를 위한 비밀결사대를 만들었다. 그들은 동학혁명의 역사적 업적을 널리 알리고, 국민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는, 보수 세력들의 학정에 환멸을 가져 뒤로 물러난 자들이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으나 무능하기 그지없었고, 전 정권 때의 기득권층의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한반도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한반도는 친일이니 좌파니 우파니 갈등의 골이 메워지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일본의 독도 간섭도 빈번히 일어났고, 내정 간섭의 기미마저 전 정권이 물꼬를 터주고 있었다. 분열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북조선은 김정일의 사망으로 그 아들이 세습을 했으나, 북조선 내부에 뿌리박힌 불신으로 거의 붕괴직전이었다. 전 정권은 북조선과의 살얼음 외교를 했으나, 현 정권은 북조선을 흡수 통일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중국의 수많은 민족들이 독립하려고 여기저기 들고 일어나고 있어 중국도 어수선했다. 우리의 우방국이라던 미국은 우리의 통일을 원치 않아 한반도의 통일은 멀어보였다. 비밀단체의 이름을 짓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들어간 자식이 많은 사람들은 외래어로 단체 이름을 짓겠다고 하고, 홍길동이 만든 할빈당의 이름을 쓰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미 할빈당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는 단체가 있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할빈당 이름은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결국 갑오동이로 단체 이름을 짓고 활동에 들어갔다. 각 도마다 대장을 세웠다. 그 대장의 이름을 사발통문처럼 써서 누가 우두머리인지 알 수 없도록 했다. 1894년 동학혁명을 일으켰던 그 때의 농민들처럼. 전주에 사는 성불암은 각 도마다 다니며 농악을 가르쳐 모임이 있을 때마다 농악대의 울림을 시작으로 행사를 하기도 했다. 오늘 백산산성의 행사에도 각 도의 농악대가 정읍농악의 뒤를 따랐다. 비밀 갑오동이 단체는 후에 이름을 감춘 채, ‘동학후손찾기’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는 동학혁명에 참가했던 후손들을 찾아내는 일도 같이 했다. 그 결과 자신들이 동학의 후손이라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들은 그런 조상을 가지고 있는 것에 긍지를 느끼며 결속을 다졌다. 오늘 전봉준의 후손들은 전봉준의 초상화가 그려진 깃발을 따라 등장을 하고,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의 후손과 자신의 조상의 초상화를 그려 깃발을 만들어 자랑스럽고 늠름하게 행진했던 것이다. 전봉준의 후손은 생사가 분명치 않아 동학혁명 때 가담한 이름없는 후손들이 전봉준의 후손이나 다른 후손들의 깃발을 따랐다. 사발통문의 해독문은 은밀히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동시에 갑오년에 태어나는 사람들을 은밀히 감시하는 비밀단체도 생겼다. 요상하게도 갑오년에 태어난 남자들 중 똑똑하고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용감한 자가 있으면 원인 모를 위험에 처하거나 고통을 당했다. 난새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영특하기가 그지없어 이평면에서 천재가 났다고 난리가 났었다. 6살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예사스럽지 않은 말에 사람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사발통문이 발견이 되던 해는 갑오년에 태어난 난새 아버지가 20살이 되던 해였다. 암호문이 해독이 되자 난새 아버지에게 원인을 알 수 없는 누명이 씌어지고, 사회로부터 매장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난새 아버지 김대풍을 좇는 무리들이 삼천리강산에 두루 퍼져있었다. 김대풍을 좇는 무리들도 죽음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김대풍의 이름이 더럽힘을 당하자 그를 따르던 수많은 무리가 떠나가고, 김대풍은 이평으로 내려와 딸 난새를 낳았던 것이다. 시골로 내려왔지만 김대풍의 감시는 그치지 않았다. 김대풍도 누군가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집 밖으로 나오려하지 않았다. 폐인이 되어 오직 술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살았다. 그런 그에게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난새 아버지가 갑오동이일 것이라고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의 실망은 말이 아니었다. 김 교수도 정 박사도 난새 아버지가 갑오동이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으나, 피살을 당하자 정 박사는 난새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백산산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정 박사는 교수와 난새 아버지를 태운 엠벨런스 안에서 난감해했다. 4성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흑암에 떨고 있었지만, 갑오동이가 태어나고 있다는 소리에 옆의 사람들의 손을 잡고 두려움을 몰아내며 4성에서 들리는 소리에 맞추어 죽창을 들었다 놓으며 함성을 질렀다. “다 되었다!” 하는 우렁찬 소리가 공중에서 들리자 농악대 사람들은 징과 꽹과리를 쳤다. 징징징징 꽹꽹꽹꽹 농악 소리가 멈추고 함성이 그쳤다. “갑오동이를 보여주라!” 2성에서 거센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난새와 해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난새의 출산을 돕던 젊은 남자도 그들 중에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갑오동이를 보여 달라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백산산성이 시끄러워지고, 1성에 있던 사람들은 더욱 궁금하여 2성으로 몰려 2성 사람들과 몸싸움이 벌어졌다. 3성에 있던 사람들도 4성으로 몰려올라오는 사람도 있었다. 난새의 곁에 있던 사람들도 그녀를 등지고 함성을 지르느라 그녀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알지 못했다. 행사를 이끌어가는 주최측 사람들도 사람들에게 속시원하게 해명을 할 수 없어 안달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희안하게도 2014년 갑오년인 올해, 전라도 지역에서는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특히 정읍지역 산모들은 다른 곳으로 원정출산을 갔는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간혹 여자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들렸지만 남자 아기의 탄생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영원 지역의 손 아무개가 병원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의사의 실수로 죽었다는 소문도 들리고, 고부의 최 아무개가 아들을 낳다 아기가 질식했다는 소문만 무성히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감쪽같이 죽였다는 말에 정읍, 고창, 부안, 임실, 순창과 전라북도 지역 젊은이들은 아기를 낳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남자 아이가 태어나도 죽었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 지역 젊은이들도 두려움에 떨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소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한 사내가 날렵하게 백산 아래를 향하여 뛰어 내려갔다. 그는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했다. 백산산성 주변을 이리저리 뛰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지 제 4성으로 사람들을 비집고 올라와 산성 아래와 그 주변을 멀리 내다보았다. 사방팔방이 다 보이는 곳이지만 그의 독수리 같은 눈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 다시 산을 내려갔다.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백산은 해발 47미터의 낮은 산이다. 호남평야 한가운데 바가지를 엎어놓은 형국으로 홀로 솟아있다. 산에 오르면 옛날 군현으로 김제, 만경, 금구, 태인, 정읍, 흥덕, 부안, 고부 등 8개 고을을 고스란히 바라볼 수 있다. 바로 옆으로는 동진강이 흐르고 삼국시대 당시에는 백산 바로 밑에까지 조수가 드나들었다한다. 동진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지키는 군사적 요새였던 것이다. 소정방이 1,900여척의 병선을 이끌고 쳐들어와 뭍으로 오른 곳 중의 한 곳이 바로 이 백산이었다. 29번 국도와 30번 국도가 만나는 백산성은 낮은 산이지만 너른 들판 한가운데 평지풍파를 일으키듯 훌쩍 솟아올라서 우측 멀리 신태인읍 화호가 희미하게 바라다보이고 일본인 농장과 화호병원 등 일제의 흔적들이 아직도 볼 수가 있다. 이 일대는 우리 민족이 간직한 슬픈 역사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앓는 고장이다. -아, 이 낮은 백산이 이렇게 높은 줄을 누가 미처 알았으랴. 사방이 눈앞에 환하기가 지리산보다 환하고 태백산보다 더 환하구나. 그 까닭이야 너무도 명백하니 이 산이 홀로 들판 가운데 있기 때문이로다. 이 세상에 사람이 산천의 수목처럼 가득하되 모두 그만그만 키가 같은지라 서로가 서로에게 묻혀 내려다보는 사람이 없더니 드디어 한 사람이 우뚝 솟아 세상을 내려다보거늘, 그가 그렇게 우뚝한 까닭은 다만 그가 한 자 높은 돌 위에 섰음이로다. 그 한 자의 돌을 분별하는 사람이 없다가 이제 비로소 눈이 뜨인 사람이 있어 여기 백산 위에 섰으매 그의 눈에는 온 세상이 이 들판처럼 한 눈에 환하리라. 백산, 그 이름이 백산일 줄을 내 이제야 비로소 알았노라. 어느 것도 아니던 그냥 백산이 마침내 주인을 만났으니 천변만화 그 조화가 어찌 무쌍하지 않으리오. 바람을 부르면 바람이 일 것이요, 비를 부르면 비가 올 것이니, 동국에서 제일 낮은 이산이 제일 우뚝한 제 이치를 이제야 비로소 찾지 않겠는가- 이 글은 남접의 서장옥(徐璋玉)이 백산으로 전봉준을 찾아와 단둘이 들판을 바라보며 고부봉기를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다짐하며 한 말이라고 송기숙의 장편소설 <녹두장군>에서 말하고 있다. 갑오동이의 탄생의 호기심을 잔뜩 안고 이 날의 행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신사발통문을 쓴 학생들에게 시상이 주어지고, 여러 행사가 끝이 났다. 행사 일정대로 원하는 사람은 전봉준 장군 고택, 말목장터, 만석보 유지비, 그리고 황토재기념관을 돌아 고부관아지, 고부향교, 군자정 그리고 사방통문 발견지와 동학혁명 모의탑을 답사하기로 했다. 농악대의 소리에 답사를 원하는 사람은 버스에 오르고 다른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떠난 백산산성은 언제 떠들썩했느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본래의 얌전한 모습으로 뒤돌아갔다. 난새가 아기를 낳았는지, 아기를 낳았다면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 입을 다물어버리고, 난새와 해승, 그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날의 일은 무수한 추측만 난무할 뿐,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가슴에는 한가닥 희망의 봉우리가 솟았다. 그가 자라면 그들을 이 난국에서 건져주리라는 희망을 품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낮고 작은 산이 온 세상을 내다볼 줄 알며, 드디어 백산이 제일 우뚝 솟아있는 제값을 다시 한 번 하고 있지 않는가?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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