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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 전설] 룡마바위와 태자묘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20/07/15 [12:07]

[조선력사 전설] 룡마바위와 태자묘

이형주 기자 | 입력 : 2020/07/15 [12:07]

 

▲ 영화 마의태자(1956)     © 이형주 기자

 

룡마바위와 태자묘

 

935년에 후기신라의 마지막 왕이였던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이때에 태자가 일어나 《나라의 존망은 하늘의 운명에 달려있거늘 어찌 힘이 다할 때까지 싸워보지 않고 천년의 력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주고말리까?》라고 부왕의 결심을 반대하였다.

태자는 아버지를 설득시킬수 없다는것을 알고 군사를 일으켜 고려와 싸우든지 아니면 금강산 골안에서 중이 되여 일생을 깨끗이 바치든지 둘중의 한길을 택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태자는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금강산에 이르러정안사의 법사를 만났다.

법사는 태자가 온 까닭을 알고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일편단심 사직을 지키려는 그 마음 갸룩하기 비길데 없는줄 아옵니다. 옛날 백이, 숙제가 수양산에 숨어서 절개를 지켰다고 하지만 태자처럼 군사를 거느리고 기울어진 나라를 건져내려고는 하지 않았소이다. 하지만 태자님, 대세는 이미 고려의 통일에 기울어지고있소이다. 고려는 동족간의 싸움을 그만두고 하나의 나라안에서 살려는 우리 백성들의 마음을 틀어쥔줄 아오니 이러한 때 군사를 일으킨다는것은 제머리를 바위에 대고 찧는것이며 닭알을 집어던지는것과 같이 허망한 일인줄 아나이다.》

법사의 말을 듣고 고려를 반대하여 싸운다는것이 무모하다는것을 깨달은 태자는 군대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다음 금강산의 바위를 집으로 삼고 베옷(마의)에 초식을 하면서 일생을 깨끗이 바칠 결심을 하였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마의태자는 자기가 림종에 다달았다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그가 사랑하는 룡마를 타고 비로봉마루에 오르니 금강산의 전경이 한폭의 그림처럼 안겨오는것이였다.

 마의태자는 말에서 내려 저 멀리 서쪽 개경(오늘의 개성)을 향해 섰다.

구름속에 아득히 보이는 저 산너머에 자기를 기다리는 그리운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지는 듯하고 뜨거운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헤여질 때 못마땅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물속에 우렷이 떠올랐고 친지들의 얼굴도 눈앞을 스쳐 지나는것이였다.

그들모두에게 마음속으로 영결을 고하고난 마의태자의 몸은 서서히 식어갔고 주인을 잃어 슬픈듯 울며 서있던 룡마도 돌로 굳어져갔다.구룡연에서 비사문을 지나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룡마바위》와 《태자묘》는 이렇게 생겨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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