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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록전쟁에서 죽은 인물은 치우아닌 치우비

탁록전쟁에서 황제헌원이 승리했다는 사마천의 [사기]는 사기

윤복현 저널리스트 | 기사입력 2009/12/04 [20:33]

탁록전쟁에서 죽은 인물은 치우아닌 치우비

탁록전쟁에서 황제헌원이 승리했다는 사마천의 [사기]는 사기

윤복현 저널리스트 | 입력 : 2009/12/04 [20:33]
신시배달국의 제후국 단허국(단국)의 왕녀와 신시배달국 18대 거불단 한웅(단웅)사이에서 낳은 단군한검천황께서 단군한국을 여시고 치우천황의 후예인 치우씨에게 병권을 맡기고 치우천황의 후손 치두남에게는 지나인들과 북방초원세력을 경계하는 번(불)조선의 초대 단군으로 임명했다. 단군한검천황이 치우천황의 후예인 치우씨에게 병권을 맡기고 불(번)조선의 초대 단군직을 맡겼다는 사실은 그 만큼 치우천황의 명성이 위대했으며,황제헌원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나지역에서 벌어진 치우천황과 황제헌원과의 10년간의 전쟁은 과연 누가 승자였나?
 
치우는 신시배달국 14대 천황이고, 치우천황에 대적한 지나지역의 우두머리 황제헌원 역시 동이족 출신이다. 황제헌원의 출신과 관련하여 지나국[초사(楚詞)]에 쓰여 있기를 "황제(皇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난 동이족 사람이다."라고 하여 그가 비록 지나지역의 지나인들을 지배하는 입장에서 천상의 지존(至尊)이신 치우천황에게 도전하기는 하였지만 그가 동이족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영어구조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백인들과 동일한 거주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지나인들은 상고(上古)시대에 황하상류에 거주하다가 점차 남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황하유역의 여러 부족은 모두 농업.의학.불문화를 가지고 동방문명을 가지고 지나지역으로 이주한 동이족 신농씨(神農氏)를 천하의 공동 주인으로 공경하며 그를 불의 제왕이란 의미로 염제(炎帝)라 칭하며 염제신농을 섬겼던 것이다. 이 무렵 황하유역에 동이족 유웅씨(有熊氏) 부족이 점차 강성해졌다. 유웅씨는 신시배달국의 지방관이였던 소전(少典)의 부족후손으로 성이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니 이가 바로 황제(黃帝)이다. 서진(西晉)의 황보밀(皇甫謐)이 지은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따르면 황제헌원은 수구(壽丘)에서 태어나 희수(姬水)에서 자란 까닭에 ‘희(姬)’가 성이 되었고, 헌원이란 언덕에서 살았기 때문에 헌원이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소전부족의 족장부인이었던 부보(附寶)가 들판에서 기도를 올리다 큰 번개가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을 감싸는 것을 보고 임신해 2년 만에 황제를 낳았다고 한다. 황제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말을 할 수 있었고 자라면서 더욱 성실하고 영민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널리 보고 들으면서 사물에 대한 분별력이 분명했다. 이후 황제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부족의 수령으로 추대되었고 원래 서북쪽에 있던 부족의 근거지를 지금의 하북성 동남쪽인 탁록으로 옮겼다고 한다.  

▲탁록전쟁에서 황제헌원을 굴복시키고 신하로 삼은 치우천황(김산호 화백의 그림)
 
탁록전쟁은 신시배달국의 제후국가들에 해당하는 지나지역의 황제헌원이 지나지역에 농업과 의학을 가르쳐 준 동이족 염제신농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우두머리가 된 황제헌원이 신시배달국에 도전하여 일으킨 반란전쟁이였다.
 
▲ 치우천황을 상징하는 한민족의 도깨비상-초기의 호탕한 웃음상에서 시대흐름에 따라 서서히 점쟎은 웃음상으로 변화했다. 호탕한 웃음상이란 솔직하고 당당하다는 의미이고, 점쟎은 웃음상이란 주변을 의식하는 체면의식이 강하다는 의미가 된다.
탁록전쟁과 관련한 지나국의 문헌들에 따르면 치우천황의 형상은 폭군(暴君)과 난적(亂賊)으로 상당히 추악하게 묘사되어 있다. [상서(?書)·여형(呂刑]의 기록은 이런 관점을 대표하는데 치우가 난을 일으키고 혹형으로 묘족(苗族)을 살육했다고 한다. 그러나 [용어하도(龍魚河圖)]의 기재에 의하면 치우천황은 괴이한 신력(神力)을 지닌 신의 형상으로 묘사된다. “다섯 가지 병기를 제작했고 운무(雲霧)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 하니 치우천황의 능력이 아주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술이기(述異記)]에는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했고” ,“사람 몸에 소의 발굽을 지녔으며 4개의 눈과 6개의 손을 지녔다.” ,“모래와 돌을 밥으로 먹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천하의 황제헌원도 그를 어쩌지 못해 하늘의 신령(神靈)에게 도움을 빌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신령으로 묘사된 현녀는 마치 우리 민족의 시왕모가 되는 마고신앙의 반영으로 보여 진다. 즉, 동이족출신의 황제헌원은 출신성분상 마고를 숭배하는 웅족출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웅족은 단군한검천황의 외가이기도 하다.

 
황제헌원이 하늘의 신령의 도움을 받아 치우천황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기록내용과 관련하여 [황제현녀전법(黃帝玄女戰法)]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이때 사람 머리에 새의 몸을 한 여인이 나타났다. 황제가 머리를 숙여 두 번 절하고 엎드려 감히 일어나지 못했다. 부인이 말했다. 내가 현녀(玄女)인데 그대는 무엇을 묻고자 하는가?’ 황제는 ‘소자가 전투에서 이기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현녀의 전법을 얻었다.” 황제는 이렇게 얻은 병법을 이용해 신묘한 진법을 펼쳤고 곤오산(昆吾山)에서 나는 붉은 구리를 구해 보검까지 만들었고, 황제헌원이 병법과 보검을 동시에 얻자, 군대의 사기가 순식간에 올라가 결국 치우를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제가 비록 치우를 물리치긴 했지만 『현녀병법(玄女兵法)』에 “황제가 치우를 공격했으나 3년이 지나도 성을 정복하지 못했고” “9번 싸워 9번 다 이기지 못했다.”는 등의 모순적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치우는 황제헌원에게 아주 강력한 적수였으며 그 역량이 황제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황제헌원은 자신이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이라는  여신(女神)의 도움을 받아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 지나국이 치우를 조상으로 모시는 묘족 등 지나통합차원에서 시조로 수용하여 섬기는 치우상

황제헌원은 지나인들이 지나국의 시조로 모시는 인물이였다. 그러나, 최근 소수민족의 통합차원에서 황제헌원을  중심으로 염제신농과 치우를 시조로 수용하여 모시고 있다. 물론 모두 동이족 출신들이다.
 
지나지역에서 한나라 유철이 왕노릇하던 때 역사를 저술했던 사마천은 [사기]에서 "황제헌원이 지남거를 이용하여 치우의 안개에서 길을 잃지 않아 치우를 사로 잡고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마천 스스로 [사기]에서 "한나라 고조 유방은 전쟁에 나설 때 치우에게 제사를 지낸다."라는 자기모순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치우가 패배했다면 마땅히 황제헌원에게 제사를 지내야 맞을 것이다. 
 
▲ 그리스 최고 신=제우스=치우스(치우)=번개와 천둥의 신

그리고, 중동지역에서 최초로 철기를 제조하여 중동지역을 지배했다는 히트히트민족이 섬긴 신이 바로 소뿔로 상징되는 폭풍의 신 치우였다는 사실이며,그리스 최고의 신이 바로 치우스에서 어원이 파생되었다는 제우스라는 사실이다. 또한 이집트 피라미드를 건설한 왕조가 태양을 숭배한 치우왕조였다는 사실이다. 크리스마스에서 빠질 수 없는 산타크로스 또한 북유럽지역의 숲속의 샤먼 티우(치우)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에게 있어 악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 준다는 치우가면과 도깨비가 모두 치우를 상징한다는  점이다. 동방을 지배하는 치우천황이 동방패권전쟁에서 황제헌원에서 승리하지 않았다면 그 명성이 서방까지 전해질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치우천황이 황제헌원과의 전쟁에서 동방불패의 신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전설이 된 것이다. 
 
▲ 고구려.백제.신라의 치우가면

고로, 탁록전쟁에서 황제헌원이 승리했다는 사마천의 [사기]는 왜곡이거나 사마천의 착각이라 할 수 있다. 즉, 황제헌원이 잡아 죽인 인물이 치우가 아니라, 치우비라는 인물인데, 치우로 착각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단고기-신시본기]에서는 이러한 탁록전쟁과 관련한 논쟁의 문제와 진실에 대하여 치우천황이 황제헌원을 사로 잡아 신하로 만들었다고 명쾌하게 기록하고 있다.
 
▲ '치우'를 의미하는 은.주시대의 휘장문양(북경대 역사학과자료)  
"때에 공손 헌원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 백성들의 우두머리였다. 처음 치우 천왕이 공상에 입성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 혼자 즉위하여 천자가 될 뜻을 갖고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와 더불어 싸우려 했으므로, 치우 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서 에워싸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치 않고 감히 백번이나 싸워오는지라. 치우 천왕은 구군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보병 기병 3,000을 이끌고 곧바로 탁록의 유웅이라는 벌판에서 게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 수 없었고 세지도 않았다. 또 큰 안개(연막탄)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내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100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연의 회대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헌원의 무리는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저 당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 천황의 법력이 높고 강력함에 부딪쳐 마음에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치우 천왕은 불같이 진노하사 노여움에 부들부들 떠시더니 형제와 종당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쳐서 헌원의 군대로 하여금 감히 공격해 올 뜻을 품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더불어서 한바탕 싸움이 크게 일어나자 한 무리를 마구 죽여버린 후에야 비로소 멈췄으니 이 싸움에서 우리 쪽 장수 가운데에 치우비라 하는 자가 있어 불행하게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사기>에서 말하는 <치우를 잡아 죽이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인 듯 하다. "
 
신시배달국 치우천황에 도전한 지나지역의 제후에 불과한 황제헌원의 반란전쟁은 마치 한국-배달국-단군조선-부여를 계승한 고고리(고구려)를 침략하다가 패가망신당한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꼬라지와 마찬가지였다. 연개소문도 이세민을 추격하여 치우천황의 전쟁루트와 유사하게 탁록지역과 산동지역을 중심으로 중원을 휩쓸고 서안에서 항복을 받고 고고리가 동방의 천제국임을 만방에 과시한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던가!!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고, 고구려 유리왕때 이미 고구려에 대항했다가 참패당한 선비족의 후예나라인 당나라의 반란전쟁이 처참하게 패배하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 지나인들에게 크나 큰 상처를 주었다고 볼 수 있는 치우천황과 황제헌원과의 탁록전쟁은 동북방지역의 정통 동이족과 지나지역의 동이족이 결국 분리되는 기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중원문화에 동화되어버린 지나지역의 동이족은 진시황의 중원통일과 함께 만리장성축조로 만리장성 넘어의 동이족을 오랑캐 취급을 하면서 진나라서적을 제외한 동이관련 모든 서적들을 불태워 버리는 '분서갱유'사건을 통하여 동이문명과 동이역사의 우월성을 제거하고 지나(진=china)을 선언한 것 처럼 '춘추필법'을 통하여 지나지역을 천하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역사왜곡행위가 자행되었고, 오늘날까지 동방족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동북공정을 통하여 철저히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진실이 감추어지거나 왜곡되어지는 것은 아니며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나문명의 시원자체가 만리장성넘어 동북지역의 요하문명이며, 지나지역의 황하문명이나 대문구문명자체가 요하문명을 가지고 이주해 온 동방족의 문명이고, 지나지역에 농업.의학.문자.역학를  전파하여 지나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 준 문화인들이 모두 동이족 출신들인 염제신농.태호복희.창힐로 부터 비롯되었으며,지나지역의 나라성립자체도 신시배달국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였던 하.은.주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진나라.한나라.송나라.명나라를 제외하고 북위.수.당.원.청 등 중원을 지배한 나라들이 대부분 동북방 지역에서 내려온 동이족의 나라들이니 어떻게 지나국이 역사적으로 천하의 중심이며 아시아문명의 시원이라 할 수 있겠는가!!
 
고로 이러한 역사.문명사적 열등감에 사로 잡힌 지나인들이 어찌 한민족사를 왜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세계의 중심을 가름하는 기준은 결코 뒤집어질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며, 피를 타고 흐르는 민족정기인 것이다.따라서, 한국과 지나국이 미래지향적으로 공존공생하는 길은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인정하고 위대한 한국.배달.조선의 홍익인간이념의 정신문명을 공유하고 실현하는 길 뿐이다.

[자료]신시배달국 치우천황과 탁록전쟁

[한단고기-신시본기] "우리 치우 천왕께서는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사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니, 능히 하늘에 제사지내 삶을 아시고, 땅을 여시사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여 삶을 숭상할 수 있으셨다. 온갖 사물의 원리는 빠짐없이 몸소 살펴보니, 그 덕이 미치지 않는 곳 없었고, 지혜는 뛰어나지 않음이 없었으며, 힘 또한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셨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범무리들을 따로 떼어서 하삭에 살도록 하고는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셨다. 유망의 정권이 쇠약하여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될만한 인재 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은 쇠를 캐내어 도개, 모극, 대궁, 호시를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겁에 질려 굴복케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더라. 한 해 동안에 아홉 개의 제후의 땅을 정복하고 다시 옹호산에 웅거하여 구야로써 수금과 석금을 개발하여 예과와 옹호의 창을 만들어내고,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공상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이며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 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그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에 유망은 소호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은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고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케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유망과 함꼐 도망쳐 버렸다. 치우 천왕은 즉시 하늘에 제사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
 
<관자>가 말하는 바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때에 공손 헌원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 백성들의 우두머리였다. 처음 치우 천왕이 공상에 입성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 혼자 즉위하여 천자가 될 뜻을 갖고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와 더불어 싸우려 했으므로, 치우 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서 에워싸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치 않고 감히 백번이나 싸워오는지라. 치우 천왕은 구군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보병 기병 3,000을 이끌고 곧바로 탁록의 유웅이라는 벌판에서 게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 수 없었고 세지도 않았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내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연의 회대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헌원의 무리는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저 당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 천황의 법력이 높고 강력함에 부딪쳐 마음에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 <운급헌원기>라는 책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말한다>라고까지 썼으니, 역시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상상해 알 것이다. 치우천왕은 더욱 더 군대의 흠을 갖추고 사방면으로 진격했던바 10 년 동안 헌원과 싸우기를 73 회였으나 장수는 피로의 기색이 없고 군은 물러설 줄 몰랐다. 뒤에 헌원은 여러차례 싸웠으나 매양 졌으므로 원한은 더욱 더 커졌다. 군대를 일으켜 우리의 신시를 본떠 크게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수레도 만들어 감히 싸움터마다 출전하는지라. 치우 천왕은 불같이 진노하사 노여움에 부들부들 떠시더니 형제와 종당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쳐서 헌원은 군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해 올 뜻을 품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더불어서 한바탕 싸움이 크게 일어나자 한 무리를 마구 죽여버린 후에야 비로소 멈췄으니 이 싸움에서 우리 쪽 장수 가운데에 치우비라 하는 자가 있어 불행하게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사기>에서 말하는 <치우를 잡아 죽이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인 듯 하다. 치우 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을 움직여 새로이 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종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고, 헌원은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 치우 천왕이 돌아가신 지 수천년이 된 지금 오히려 만장의 과열이 있어 능히 후인으로 하여 그  흥분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하다. 지금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치우 천왕의 능은 산동성의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높이가  7척으로 진나라와 한나라 때 주민들은 10월이면 늘 여기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마치 필강 같은 것이 뻗는데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고 한다.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사내다운 기백은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매우 다른 바가  천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하는 듯 하다. 헌원이 이로써 망연히 사라지니 유망도 이에 따라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치우 천왕의 공덕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그 명성 위엄이 떨어지지 않고 있음이라. 헌원 이래로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했다. <사기>에 이르되 <산을 뚫어 길을 내고 한번도 편안히 앉은 적 없다. 탁록의 강에 도읍을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에서 살았던>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헌원이 살았을 때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는 기록일 것이다. 또 <상서> 여형예서는 '고훈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키다 라고만 적은 것은 그의 위엄이 무서워 기를 빼았긴 탓' 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그의 훈을 전하는 까닭은 이로써 후인을 위하여 게명으로 삼자는 뜻도 역시 깊다. 그 뒤 300년은 별일이 없었는데 다만 전욱과 한번 싸워 이를 이겼을 뿐이다. 대저 신시개천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이 나셨다. 웅씨의 비왕으로서 마침내 신시에 대신하여 구역을 통일하고 관경으로 삼한을 나누었으니 이를 단군조선이라고 한다. "
 
[자료]그리스의 '제우스'는 동이 '치우'의 모방신

그리스 신화가 유럽중심주의 (eurocentricizm)에 의해 왜곡 날조되었다는 '블랙아테나'출간은 본격적으로 수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킬 것 같습니다.

'블랙 아테나'의 저자 버넬은 19세기 유럽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인의 인종적 기원을 논함에 있어
그리스 원주민을 '황인종'이라고 고백하며 번민하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버넬은 19세기 유럽학자들이 그리스의 헬레네스인들을 셈족과 동양인의 혼혈로서 인식하고 또 그 원주민을 동양인이라고 한 것은 백인 우월성을 이야기하려 했다고 해석하지만 현대 유전학이 밝히는 사실은 좀 더 복잡합니다.


그리스의 신화체계가 이집트와 동방 오리엔트의 영향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집트의 아시아적 파라오,힉소스의 왕들과 후리(Hurri)=쿠티(Khuti)=쿠리(구리=고리=치우족)왕조
, 그리고 우라르트를 포함하는 소위 시노-코카시안(Sino-Caucasian)문화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의 최고신 Zeus의 본질적 측면을 살펴 봅시다.

wikipedia에서는 Zeus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Zeus is the continuation of *Dyeus, the supreme god in Indo-European religion, also continued as Vedic Dyaus Pitar (cf. Jupiter), and as Tyr (Ziu, Tiw, *Tiwaz) in Germanic and Norse mythology.

==> 제우스는 인도-유러피언(아리안)의 신앙에서 디에우스(Dyeus)라는 최고신의 연속체이다.또한 독일과 노르딕신화에서는 '티르', '찌우'(Ziu), '티우(Tiw), 티와쯔(Tiwaz)로 나타나며 베딕 (리그베다)에서는 '디아우스 피타' (쥬피터)이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은 현재까지 인정되는 아주 표준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우스'(Zeus)가 유럽과 북구에서는 찌우(Ziu)/티우(tiw)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울러 노르딕의 신 Ziu는 신화학사전에 의하면 전쟁의 신(God of war)이며 불의 신 (God of Fire)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치우'는 우리 한겨레의 북방 방언으로는 '티우'에 가까왔을 것입니다.그것은 현재 평안도를 비롯해 서북사투리에서 'ㅈ'발음이 'ㄷ'으로 나타나는 구개음화현상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한자의 고대음가(북방어기준)에서 'ㅈ'/'ㅊ'발음이 대개 'ㄷ'/'ㅌ'로 나타나는 것도 과거 '치우'의 옛 북방발음이 '티우'였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반면 남방어기준으로는 s/z 의 발음은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의 제우스와 우리 동이의 치우가 어떤 관계로 설정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와 이집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또 실제로 이들을 지배했던
히타이트의 신 "Siu"를 매개 고리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히타이트의 가장 원형적인 종족은 후리안(Hurrian)으로 불려지며 이들이 세운 미타니왕국은 비인도유러피언 문화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후리(Hurri)인들의 언어는 이제까지 알려진 바로는 인도유러피언어와는 다른 교착어체계였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아울러 18세기까지 유럽 사학자들은 후리인들을 코카서스 백인종이 아니라 동아시아계 몽골로이드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우세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저 솔본의 글을 리뷰해 보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텍사스 오스틴대학의 언어연구소에서는 히타이트에 대한 온라인 강의가 있습니다.
이곳의 Sara E. Kimball 과 Jonathan Slocum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One of the culturally intriguing aspects of this text is the god Siu-summin "our god," or "Our Sius," a god who appears nowhere else in Hittite texts. The word sius, which is otherwise the generic word meaning "god," is derived from Indo-European *dyeus, the father god of the sky

- Linguistics Research Center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 (히타이트) 텍스트가운데 흥미로운 장면은 "시우-수민"(Siu-summin) 즉 "우리 하느님" 또는 "우리의 시우"라 불리는 신의 이름이다. 시우는 히타이트 경전에만 등장한다. '시우'라는 단어는 인도-유러피언어에서 신을 뜻하는 '디에우스' 즉 '하늘의 아버지'에서 비롯되었다.

텍사스 대학의 킴볼과 슬로쿰은 히타이트의 신 Siu가 인도유러피언 어 Dyeus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꼭 마차를 말앞에 메어 놓은 꼴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스스로 히타이트어를 인도 유러피언어의 기원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해석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런사유로 18세기와 19세기를 통틀어 방대한 신화와 상징의 자료를 정리한 러시아 학자 아리엘 골란은 단호하게 제우스의 인도 유러피언 기원설을 부정합니다.

아리엘 골란에 의하면 제우스는 인도 유러피언이 아닌 다른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골란은 제우스신의 기원을 인도 유러피언이전의 문제로 소급하고 있습니다.

제우스의 기원을 인도유러피언 이전의 소급문제로 가야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인도유러피언의 기원'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인류학자 콜린 렌프류 교수의 목소리를 주목해야 합니다.

콜린렌프류 교수는 프로토 아리안, 즉 인도유러피언의 원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인도 유러피언들의 조상은 9천년전 중앙아시아 또는 아나톨리아로 이주해온 아시아계 사람들이라고 주장했고 그러한 주장이 현재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콜린렌프류 교수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또 이 '제우스'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그리스와 이집트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히타이트와 그들의 선조 후리인들을 돌아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후리(Hurri)인들은 이집트를 정복한 '쿠티'Khuty/ kurri와 동일시 되곤 했는데 우리는 후에 중앙아시아 흉노의 수장들 이름에서 '구티'라는 이름들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아울러 이 후리인들이 왕조를 세울 당시 히타이트에는 '얄라-간'(Yala-gan), 쿠티간(guti-gan)등 칸의 이름들이 등장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나중에 밝혀 보겠지만 백제를 세운 '구태'역시 이러한 맥락에 놓여 있을 것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어쨋든 '후리'=쿠티='쿠리'로 연결되는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구리'의 신 '치우'가 유라시아를 정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Ziu, tiw, dyeus, Zeus로 발전해 나아갔을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솔본-

 
[보충자료] 치우에 대한 노르딕 전승
 
지나국 문헌에는 신농은 소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치우도 쇠뿔을 달고 소의 발굽을 가졌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슈메르도 소머리에서 온 말입니다. 슈메르인들은 바로 환국문명을 이어받은 신농.치우의 후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Ziu /Tiw(지우/치우)

Tiw (t?`), Norse Tyr (tur), ancient Germanic god. Originally a highly revered sky god, he was later worshiped as a god of war and of athletic events

- 켈트신화의 전쟁신이며 가장 높은 天神(sky God). 고대 독일방언으로는 '찌우'라고 불리며    켈트어로는 '티우'/Tiw라고 부르고 아사툴(Asatur)가운데  '튀르'(tyur)라고도 불림.   나중에 전쟁신으로 숭배받음. 화요일 Tuesday는 바로 Tiw's day에서 유래.


This is Bull of Frost (Chys Khan), which is Yakutian colleague of Russian Grandpa Frost (Ded Moroz) and Santa Claus

- '치스 칸'이라 불리는 야쿠트인들의 대샤먼이며 '숲속의 황소'라고 불림.문화인류학자들 사이에서 이 '치스 칸'이 산타클로스의 원형인 것으로 논의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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