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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비문과 위치 조작의 진실

비를 옮긴 장본인은 중국이고,비문은 중국과 일본이 훼손했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3/10 [22:38]

광개토태왕 비문과 위치 조작의 진실

비를 옮긴 장본인은 중국이고,비문은 중국과 일본이 훼손했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3/10 [22:38]
며칠 전 광개토태왕 비를 옮겼다는 몇 가지 의문점을 언급했으나 사실 확실한 물증은 아직 없다. 그러나 심증은 99.9%로 거의 확실하다. 그럼 누가 언제 왜 비를 원래 장소에서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겼을까를 유추해 보기로 한다. 

누가 언제 왜 비를  옮겼을까?

우선 비를 옮긴 시기는 조선의 강계읍지가 교정 발행된 1872년부터 비가 최초 발견된 1876년 사이로 봐야 한다. 일제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때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이므로,  일제가 주동해 이 비를 옮겼다고 볼 수는 없고 청나라가 비를 옮겼다고 본다. 그럼 청나라는 왜 이 비를 옮겼을까?

▲  동치제가 6살에 즉위하자 섭정은 주로 서태후가 했다.
비가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872~1876년 사이의 청나라는 동치제(1861~1875)와 광서제 초기시대였다.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는 이른바‘동치중흥’이라 불리는 자강(自强)의 기치를 내세운 ‘양무운동(洋務運動)’을 3기로 나누어 추진했다. 이 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끝내게 되는데, 일면 성공한 듯했으나 보수 사상에서 탈피 못하고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못해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여하튼 당시 그러한 자각이 있어 국가의 문물을 재정비하게 되고 서구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운동과정에서 분명‘중국 역사세우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일환으로 호태왕비가 중국인에 의해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예전부터 중국은 이런 역사왜곡을 이미 많이 해왔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서에 나오는 요하(遼河)의 위치 변경이고, 중국은 호태왕의 업적을 중국의 수치로 여겨 중국 25사에서 그 기록을 이미 다 지워버렸다. 

또한 중국(청나라)이 비를 옮겼다는 사실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라는 책에서 비문을 답사한 내용을 적어놓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략) 광개토태왕의 비문 가운데 선비 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사람 잉쯔핑(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그가 필담으로 한 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碑가 오랫동안 풀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잉시(榮禧:만주인)가 이를 발견했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도부로 쪼아내서 알아 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이 비문에 호태왕이 선비를 정복한 큰 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때문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타고 자꾸 나아갔다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존호 이상으로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이였으므로 연(燕)나라 신하인 풍발이 연왕(燕王)을 죽이고, 고구려 선왕의 서손으로 연나라에서 벼슬하던 고운을 세워 천왕(天王)이라 일컫고 호태왕에게 보고하니, 호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하고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친족의 의를 말하고 전쟁을 그만두니 호태왕의 북진정책이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후략)  

▲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광개토태왕 비의 현재 모습. 중국에 의해 누각에 갇혀 신음하고 잇다.
 
위 책의 내용에서와 같이 비를 옮긴 장본인은 중국(청나라)으로 고구려가 선비를 정벌한 내용을 지워버리고, 고구려의 강역을 축소왜곡하기 위해 하북성에 있던 비를 집안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비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있었다는 만주소년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에는 비를 옮겨다가 세우지도 않고 그냥 평지에 버리고 간 것을 나중에 집안사람들이 발견하고는 세운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람들이 비를 옮겼기 때문에 당시 비문의 내용 중 자기네와 상관없을 것으로 본 왜와 관련된 내용을 없애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언급된 것과 똑같이 고구려와 연나라(선비족)는 동족(同族) 또는 종족(宗族)이었고, 새로 왕이 추대된 고운은 친족(親族)이라는 사실을 단재선생은 말씀하시고 계시다. 연나라에서 신하였던 한족 풍발이 역시 신하였던 고운을 추대했다고 한다. 연나라 전왕(前王)들이 고씨가 아니면 이는 역성혁명이다. 왕의 성이 달라지면 당연히 다른 왕조이나, 같은 나라로 이어진 것을 보면 연나라는 자고로 고(高)씨의 나라가 맞는 것이다. 모용씨는 나중에 바꾼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만주족은 사실상 고구려-->대진국-->요나라-->금나라-->청나라로 이어지는 적장자인데, 청나라가 뭐 하러 조상인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를 옮기겠는가?”맞는 말이다. 그러나 청나라 초기에는 자신들이 동이족의 후예임을 표방했으나, 중원을 지배한 이후로는 한족(漢族)에 동화되어 그러한 의식이 쇠약해진다. 특히 말기로 내려오면서 그런 의식이 희박해졌고, ‘동치중흥’은 중국을 중흥시키자는 정책이지, 중국인에게 만주족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강조하자는 정책은 아니었다.

▲ 내몽고와 몽고는 민족과 북부여/고구려의 고향
중국은 자신들과 직접 관련된 선비족 정벌의 비문 내용을 없애면서 광개토태왕 6년 북으로 현 내몽고지방의 염수(鹽水)를 정벌하고, 8년 남으로 토곡혼(吐谷渾: 현 티베트)을 순시했다는 내용은 없애지 않았다. 즉 염수와 토곡혼은 자기네 땅이 아니란 이야기이다. 이는 청나라 만주족이 주동이 되어 비를 옮긴 것이 아니라, 중원의 한족(명나라)이 주동이 되어 비를 옮겼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일제와 중국에 의해 비문이 파괴된 상태에서도 광개토태왕 시절 정복한 최대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 유추할 수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과 일제는 광개토태왕에게 염수의 상류와 토곡혼만 정벌 당하고 그 사이에 있는 중국 땅은 정벌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참으로 웃기는 짜장면과 우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호태왕이 군대를 이끌고 토곡혼(티베트) 정벌할 때 공수부대 데리고 비행기라도 타고 갔단 말인가? 

▲  토곡혼(티베트)의 위치. 대륙 서남부까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대륙 동부와 남부를 거쳐 간 것으로 보인다.
하북성에 있던 고구려가 토곡혼(티베트)을 가려면 중원을 가로질러 가던가, 중원에 있던 5호16국을 피하려면 대륙 동부인 산동성을 거쳐 양자강을 지나 남부인 복건성과 광동성을 거쳐 운남성으로 가야 한다. 즉 이는 중국 대륙의 동부(백제와 신라)와 남부(왜)가 다 광개토태왕에게 정벌 당했다는 이야기와 같고, 과학적으로 박창범교수의 일식 기록 분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여하튼 이러한 사실은 중국과 일본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 보인다.

이상과 같이 광개토태왕비가 중국에 의해 옮겨졌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1913년 일제가 하북성 갈석산에 있던 점제현신사비를 평안남도 온천군으로 옮긴 것도 이것과 같은 맥락이다. 점제현 신사비는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을 유물로 입증하기 위해 반도사관 정착의 일환으로 일제가 옮긴 것이다. 점제현은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에 소속된 행정단위였다. 그 신사비가 있었던 낙랑군 점제현을 현 평남 온천군으로 조작하기 위해 옮긴 것이다. 

▲  일제는 갈석산에 있던 신사비를 평남 온천군으로 옮긴다. 원래 사서에 나오는 갈석산은 진장성이 끝나는  황하 동쪽 산서성 태원 위쪽에 있는 백석산으로 보인다.  이미 중국은 산 이름과 신사비 위치를 조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점제현신사비는 북한에서 과학적인 방법(핵분열 흔적법)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이 호태왕비는 현재 중국 땅에 있는 유물이므로 북한이나 우리가 마음대로 조사를 못하고 있다. 만일 조사가 허락된다면, X-Ray 투시로 비가 옮겨졌는지 아닌지 쉽게 판명할 수 있으나, 중국 자신이 옮긴 고구려의 유물이므로 중국정부가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지 않은가!

중국은 광개토태왕비를 하북성 난하 중류에서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겨다 세워놓았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나중에 좁은 집안의 평지에서 15km2 밖에 안되는 곳을 고구려인 수도인 국내성으로 비정했고, 거기서 얼마 안 떨어진 산 정상을 환도산성으로 비정했다. 왜 그랬을까? 광개토태왕비나 점제현신사비나 둘 다 이른바 중국과 일제가 각각 추진한 역사왜곡을 유물로 정착시키기 위한 음모이며 흉계였던 것이다. 
 
▲  중국과 일제에 의해 조작되고, 한국의 강단사학계에 의해 고착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과 환도산성. 그러나 이 거짓말은 과학에 의해 허구임이 명백하게 밝혀진다. 고구려의 수도는 하북성에 있었다.
 
일제에 의한 본격적인 비문 조작

▲   신묘년 기사는 글자 자체를 위조했다는 이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나중에 광개토태왕비를 수중에 넣은 일제는 관동군 정보장교 사케오가케노부(酒句景信)가 가져온 원본 탁본을 보고는 학자들에게 연구를 시킨다. 그리고 비문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훼손하고 조작하고 탁본을 떠서는 만천하에 공개한다. 특히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은 철저히 없애버리고, 신묘년 기사를 위조해 조선 지배의 정통성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임라일본부설을 임의조작하게 되는 것이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의 신묘년 기사에 대한 일본 측 해석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가야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이고, 우리 해석은 고구려를 주체로 하여 (고구려는)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파하고, 백제.가야.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 비에 왜가 주체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일제가 신묘년 기사의 글자를 아예 변조했다는 학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 일본서기의 일식기록을 분석해 보니 초기 왜의 위치는 남지나 해상의 섬이었다. 중국 사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일제가 이 신묘년 기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전에 일본의 조상들이 가야 땅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200년간 지배한 적이 있다는 학설로, 조선의 조상들이 옛날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지금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얼마나 이 이론이 허황된 것인지는 박창범교수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일식기록을 분석하여 일본의 전신인 왜의 위치가 밝혀짐으로서 더 이상 학설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하겠다.

일제의 허구인 임나일본부설로 인하여 조선은 단군 이래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는 재앙 중의 대재앙을 맞는다. 36년 만에 해방을 맞이하긴 했지만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여러 방면에 많이 남아 있다. 물론 해방 후 올바른 위정자를 만나지 못해 친일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이유가 제일 크겠지만, 과학적인 분석으로 임나일본부설이 허황되게 날조된 이론이라는 것을 밝히게 해준 박창범교수에게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한단고기>를 엮은 계연수선생은 1895년에 비를 답사하여 비문의 내용을 적어 놓았는데, 1912년 비를 재답사한 계연수선생은 비문 중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이 크게 훼손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1931년 제자 이유립선생은 계연수선생의 ‘비문징실(碑文徵實)’을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즉 일제에 의한 비문 변조는 1895년에서 1912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제는 계연수선생을 여섯 토막을 내는 육시(戮屍) 후 압록강에 던져 버린다. 일제는 독립 운동했다고 이렇게 잔인하게 토막내어 죽인 적이 없다. 당시 일제의 최고 인물인 이또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장군도 재판받고 처형당한다. 그런데 이렇게 육시까지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계연수선생이 비문을 적어 놓았다는 사실을 일제가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비문을 어떻게 조작했는지는 아직도 연구대상이며, 한일 간 동양사학의 첨예한 대립의 장이기도 하다. 아래는 비문징실의 내용으로 빨간색 부분이 왜와 관련된 이야기로 일제가 없애버린 글자이다. 중요한 내용은 왜가 거국적으로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나와 <한단고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   광개토태왕 비에 비가 내리니 석회로 조작한 곳에서 석회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第2面9行)官兵 跡而越來攻來背 急追至任那 加羅從拔城 城卽歸服安 羅人戍兵 新羅城口城 倭滿倭潰城 (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第2面10行)被我攻口滅 無遺倭遂擧 國降死者十 之八九臣 率來安羅人 戌兵滿假口 口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가00에 가득 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第3面1行) 諸賊謀口口 官兵制先直 取卓淳而佐 軍由淡路島 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 斯諸賊悉自潰 (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第3面2行) 遂分爲郡安 羅人戌兵昔 新羅寐錦未 有身來口口 口國岡上廣 開土境好太 王口口新羅寐錦口口僕勾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   일제가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우리의 고대사서 20만권을 불질렀다는 신문기사
호태왕 비문의 훼손은 일제가 우리의 고대사서 20만권을 불 지르고, 중요한 사서는 일본으로 가져가는 분서갱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의 시조가 되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대륙을 지배했던 천자국의 천손민족(天孫民族)의 후예들을 일개 섬나라가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그 위대했던 조상의 역사부터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일왕 특명에 의한 조선인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위대했던 역사에 대해 항상 열등감이 많았던 섬나라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해서도 사고(史庫)를 불태우고 문화재를 가져가는 등 온갖 역사 만행을 저질렀다. 메이지유신 이후 호시탐탐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노리던 일제는 드디어 그 가능성이 보이자 미리 계획한대로 역사말살 음모부터 개시한 것으로 본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반도사관과 임라일본부설은 이미 <한단고기>와 박창범 교수의 <삼국사기> 일식분석으로 허구임이 백일하에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사학계가 아직도 일제가 만들어준 반도사관에 세뇌되어 위대한 민족사를 밝힌 <한단고기>를 위서(僞書)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학계는 과학적 증거와 명백한 사서의 근거를 손에 쥐어줘도 여전히 일제가 만들어준 망국과 치욕의 국사를 숭상하고 고수하고 있다. 해방 62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일제대신 우리 국민들과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얼을 스스로 말살하고 있는 사학계의 이런 행위는 이제는 고쳐져야 하며 국가의 내일을 위해 민족사학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구려 수도 국내성은 어디에 있었나?’가 게재됩니다. 참고로 광개토태왕 시 고구려의 영토를 상상해 보시도록 중국 지도 하나를 올려 놓습니다. 

▲   중국의 주요 성시. 섬서성 주변 몇개 성을 제외하고는 다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고구려의 영토로 봐도 됩니다.
우리역사 08/03/11 [23:39] 수정 삭제  
  중국과 일본은 자기네 역사 세우느라 남의 나라 역사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데, 우리 나라는 시방 뭐하고 있는겨. 그래놓고도 잘났다고 떠드는 정부와 사학계 다 사직하고 반성해라. 도대체 속이 상해서 더 이상 기사를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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