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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실]>삼국사기는 언제 조작되었나? (1부)

이성계의 근세조선은 단군이 아니라, 중화인 기자를 조상으로 삼았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4/14 [11:28]

[역사의 진실]>삼국사기는 언제 조작되었나? (1부)

이성계의 근세조선은 단군이 아니라, 중화인 기자를 조상으로 삼았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4/14 [11:28]

본 글은 장문이라 다음과 같이 2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삼국사기는 언제 조작되었나? (조선 초기의 역사테러)
(2부) 삼국사기는 누가 왜 조작했나? (중종반정 이후의 역사조작)

위화도회군(쿠데타)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결국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나 대의명분이 약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부도덕하게 정권을 잡다보니 내부의 인정보다는 강력한 외부의 힘이 필요해 스스로 명나라의 속국임을 자청하고는 자신의 정치기반을 명나라로 하게 된다. 이는 해방 후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들이 제일 먼저 미국에게 승인을 받고 미국을 자신의 후원자로 섬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젊을 때 어진.

 
조선초기의 사대와 역사테러

명나라는 이성계에게 조선이란 국호를 정해주고는, 예전에 지나족이 단군조선에게 지배당했던 역사의 한을 풀게 된다. 즉 그때와 입장이 180도 뒤바뀌어, 이제는 지나족(명나라)이 상국이 되어 속국인 조선에게 역사 보복을 하기 시작한다. 조선 초 삼봉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을 보면 ‘조선’이란 국호가 정해진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  조선 건국의 주역인 삼봉 정도전

“해동(海東)은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朝鮮)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 있었으니, 단군(檀君) 기자(箕子) 위만(衛滿)이 바로 그들이다. (중략) 이들(삼국과 후삼국)은 모두 한 지역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를 침탈하였다. (중략) 단 기자만은 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朝鮮候)에 봉해졌다.

지금 천자(명태조 주원장)가 “오직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고 명하였는데, 아마 주 무왕이 기자에게 명하던 것으로 전하에게 명한 것이리니, (중략)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洪範)을 설명하고 홍범의 뜻을 부연하여 8조의 교(敎)를 지어서 나라 안에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善政)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 명나라 천자의 덕도 주 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 배움과 8조의 가르침이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위 구역질나는 정도전의 글에서 알 수 있다시피, 결국 근세조선이란 나라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인 기자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기자조선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 명나라는 속국을 자청한 이성계에게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줌으로서, <기자조선>이 주 무왕의 제후였듯이 조선은 명나라의 제후국인 소중화(小中華)라는 것을 말하려 함이었다.

▲   삼봉 정도전이 쓴 <조선경국전>.


세종대왕은 국민들에게 성군(聖君)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사실은 고려 이전의 역사를 배척했다. 개국 이래 조선은 중화(기자)의 후예이지, 단군의 후예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명나라 영락제가 죽자 자신은 군신(君臣)관계라 하며 21일간이나 상복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것이 근세조선의 실상이고, 민족의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세종대왕이 민족사를 바라보는 역사관이었던 것이다.    

세조 3년 팔도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안함노.원동중 삼성기> 등의 1백여 권과 <동천록> <마슬록> <통천록> <호중록> <지화록> <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에 널리 효유하라.”고 하였다.

예종 때도 비슷한 어명이 내려진다. “고대서적을 가지고 있는 자는 승정원과 고을 원에 바치도록 하라. 바친 자는 두 계급을 올려주고 바치지 않는 자는 고발하라. 고발한 자는 상을 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

이후로 조선에서는 단군조선과 삼국에 대한 고대서적을 가진 자가 발각되면 엄벌에 처했다. 두 임금의 어명은 조선이 실제 조상인 단군과 삼국에게 저지른 실로 엄청난 역사테러였던 것이다. 아니 조상의 사서를 숨긴 자에게 참형이라니? 원 세상에 이런 나라도 다 있나?

이 고대서적들이란 대륙을 지배했던 위대했던 조상들의 역사서로 주로 단군조선에 관한 책들이었다. 스스로 명나라의 속국임을 자처한 근세조선은 기자를 조상으로 삼고 단군은 남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들(단군과 삼국)이 상국의 땅인 대륙을 지배했다는 역사 기록은 지극히 불충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관련사서의 체포령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세조가 언급한 목록에는 <한단고기>에서 인용한 책들이 많이 보인다. 일제 때 20만권이 넘는 고대 사서를 불태우고 중요한 사서들을 일본으로 가져간 목록이 있는데, 그 목록에 세조가 언급한 사서 중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고대서적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일제와 이병도가 단군을 신화로 만들었으니 이 얼마나 나쁜 X들인가! 그리고 해방 6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군을 신화라고 말하고 있는 사학계도 한 통속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조는 계유정난(쿠데타)을 통하여 집권하고는 결국 조카를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른다. 부도덕한 방법으로 왕이 되다보니 명나라에게 고명(승인)받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명나라에서는 고명을 해주는 대신에 대륙을 지배했던 단군조선과 삼국의 역사를 없애라고 압력을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명을 받은 직후인 세조 3년에 이런 어명이 내려진 것이다. 부도덕한 방법(쿠데타)으로 정권을 쥐면 항상 뭔가 이상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만고의 진리인 것 같다. 

▲  계유정난의 주역으로 세조 때 최고 실권자였던 한명회의 묘

 
중종 25년 1530년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마친 대제학 이행(李荇)은 “우리 조선이라는 나라는 기자(箕子)가 교화를 일으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적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과 함께 중화 사대주의가 극치를 이루는 대목이다.  

김부식은 삼국의 역사를 변질시켰을까?

▲ 현 삼국사기와 대비되는 역사책인 <조선상고사>

조선 세조 때 내린 명령에서 보듯이 이미 민간에 많은 고대사서들이 있었다. 그런데 김부식은 민간에 있던 이 책들을 자료로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다. 참고서적의 목록을 김부식이 쓴 것인지 후대에 <삼국사기>를 조작한 사람이 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도 모화 사대주의 유학자로 주로 중국 사서를 참조했기 때문에 대륙을 지배했던 조상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는 적지 않았던 것 같아 보인다. 단지 사가로서의 양심은 있어서인지 (대륙에 있었던) 360개 지명을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했다.

<삼국사기>는 애초 편찬될 때부터 변질된 역사도 상당부분 있었을 것이나, 지금의 <삼국사기>와 같은 왜곡내용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지금과 같은 내용이었다면, 민간에 고대사서가 많았기 때문에 분명 누군가가 문제(역사의 진실)를 제기했을 것이므로 함부로 임의대로 심한 역사왜곡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기록상으로 <삼국사기>가 최초 간행된 것이 태조 2년(1394년)인데, 이 때도 민간에 많은 고대사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내용으로 간행되었더라면 분명 민간에서 심한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조는 명나라의 지시대로 단군과 삼국의 역사를 말살하려면 먼저 민간에 있는 고대사서부터 거둬들여야겠다고 판단해 명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일제 때 역사왜곡을 위해 <조선사 35권>을 편찬하기 전에 고대사서 20만권을 불태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조선 중기의 사대와 역사말살

분명 현 <삼국사기>는 조선 세조와 예종 때 많은 고대사서를 거둬들인 이후에나 본격적인 조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성종까지의 임금들은 역사기록은 사관들의 고유권한이라며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사초조차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연산군이 봐서는 안될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는 감히 세조임금을 능멸했다며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는 역사조작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선생은 <열하일기>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면 지금의 평양에 도읍했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만주의 봉황성이 평양이었다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만주의 요동 땅에 또 다른 평양이 있었다고 하면 해괴망칙한 소리라고 꾸짖을 것이다. 이것은 요동 숙신 예맥이 모두 조선에 소속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후세 사람들은 영토의 경계를 밝힐 생각도 않고 청천강이나 대동강을 ‘폐수’라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의 땅덩어리는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저절로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탄하셨다. 이 내용은 연암선생이 활동하던 영.정조시대 이전에 이미 역사왜곡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연산군 ~ 숙종 사이에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왜곡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  연산군이 외할머니를 만나 폐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이 장면이 수많은 사대부의 목숨을 뺏는 갑자사화로 이어지고, 결국 갑자사화는 중종반정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데...과연 그럴까?

 
조선시대 벼슬깨나 했던 사대부의 비석을 보면 어김없이 유명조선(有明朝鮮)으로 시작한다. 유명조선이란 '명나라가 있고 그 다음에 조선이 있다.'는 뜻이다. 그들의 조국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이고, 그들의 조상은 단군이 아니라 기자였던 것이다. 결국 조선왕조는 환국 3,301년, 배달국 1,565년, 단군조선 2,096년 합계 6,962년의 역사를 다 말살해 버린다.

게다가 삼국의 대륙지배 사실까지 조작해 버리는 엄청난 패륜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럼 <삼국사기>는 언제 조작되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삼국사기의 조작은 조선왕조 5백년 역사 중 가장 강력했던 임금인 연산군을 반정(쿠데타)으로 끌어내리고 대신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중종조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연재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자들의 역사왜곡 08/04/14 [14:45] 수정 삭제  
  연산군은 민족서적발간과 함께 단군신앙을 부활시키려 했다..
그래서 소중화주의자들이 반정을 한 것이며, 폭군은 소중화주의 세력의 왜곡시켜 놓은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승자들의 역사왜곡의 희생자
http://pluskorea.net/imgdata/pluskorea_net/200804/200804145527428.jpg



동이,단군 그리고 사대주의
 
 
홍사(鴻史)
 
홍사는,중국 안리왕(위나라 제7대왕) 10년,
즉 서기전 267년 공자(孔子)의 7세 후손인 공자순(孔子順)이 서문을 쓴 책으로,
발해 대야발이 단기고사의 서문을 쓴 시기가 서기 729년이므로,
무려 단기고사보다 996년전에 서문이 쓰여진 책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홍사(鴻史) 서문
 
동방에 나라가 있었으니 가로되 동이라,
별의 분포로서는 기미(箕尾)이고 땅은 선비(鮮卑)에 접해 있었다.
 
처음에 단군신인(檀君神人)이 있어,
드디어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니 요(堯)와 더불어 나왔다.
 
우순(虞舜)이 동이에서 났으니 포의자(浦衣子)로부터 수학(受學)하였다.
중국에 들어와서 천자가 되어 백왕을 뛰어 넘는 정치를 했다.
 
광성자(廣成子)는 남보다 월등한 지혜의 도학(道學)이 있어,
황제(황제)가 그의 내문(內文)을 받아 요제(堯帝)에게로 그 대를 이은 임금이었다.
 
소련(少連) 대련(大連)이 거상(居喪) 석달을 게으르지 않고 피눈물로 3년을 잘했으니,
나의 부자(夫子 = 孔子)가 착하다고 칭찬했다.
 
하우(夏禹)와의 도산회의(陶山會議)에서 부루사자(扶婁使者)를 보내어 국경을 정하였다.
유위자(有爲子)는 한얼이 낸 선인으로서 그 빛나는 이름이 중국에 넘쳤다.
이윤(李尹)이 그 문중에서 수학하였다.
 
은나라 탕(湯)이 이윤을 불러 현인(賢人)을 물으니, 동방을 일러,
 
- 그 나라는 국세가 크지만 교만하지 아니하고,
- 그 나라는 군사가 강하나 침략하지 아니하며,
- 그 나라는 풍속이 어질어 가는길을 양보하고,
- 그 나라는 배가고픈 사람에 밥을주어 안굶기며,
- 그 나라는 남녀가 거처를 달리하여 유별하고,
- 그 나라는 남녀가 자리를 한테하여 안 앉으니, 가히 예의바른 동방의 군자국이다.
 
"이런고로, 은태사(殷太師) 기자(箕子)도 주(周)나라에 신하될 마음이 없고, 동이(東夷) 땅(번조선)으로 피해 살았다(기자후손 중에 번조선의 왕이 나왔고, 위만에게 패망하여 한반도-마한-으로 이주하여 청주 한씨가 되었다-이성계 조선은 이 기자를 조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나의 선조인 부자(夫子 = 孔子)도 더럽지 아니한 동이에 살고자 했다.
나의 벗 노중연(魯仲連)도 또한 동해(東海)를 밟고져 하는 뜻이 있었다. 나 또한 동이에 살고 싶은 뜻이 있다. 지난해 동이 사절이 입국하는 늠름한 모습을 보았는데,과연 대국(大國)다운 금도(襟度)가 역력하였다. 대저 동이는 수천여년 이래로 우리 중화와 우방의 우의가 있었다. 백성들이 서로 가서살고, 와서 살아 접하는 기회가 끊이지를 않았다. 나의 선조 공부자(孔夫子)께서도 동이가 더러운 곳이 아니라고 한 그뜻이 여기에 있었다. 고로 나또한 여기에 있었다. 고로 나 또한 느낀바 있어 그 실정을 기록하여 뒷 사람에게 보이고져 한다."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 10년 <주(周)나라 난왕(난王) 47년 癸巳也>
곡부(曲阜) 공자순(孔子順) 기(記) -(出 東國烈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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