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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사 김형근, 구속 후 석방 메시지

"다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바라보며 교단에 서고 싶습니다"

리복재 기자 | 기사입력 2008/07/02 [00:28]

통일교사 김형근, 구속 후 석방 메시지

"다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바라보며 교단에 서고 싶습니다"

리복재 기자 | 입력 : 2008/07/02 [00:28]
▲ 김형근 통일교사 국보법혐의 조사와 구속에 항의하는 통일교사와 시민들     © 리복재 기자



▲ 통일학교로 불려진 전북 임실군 관촌중에서 재직 시절 우리 민족의 힘으로 남과북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김형근 교사.  김 교사는 석방되자 제일 먼저 교단에 서고 싶다고 말했다.   © 이 사진은 어느 학생이 휴대폰으로 찍어 놨다가 김 교사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되자  '발 씻어주는 선생님 보셨나요?'라는 글과 함께 공개한 사진이다

이글은 지난  1월 29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구속되어 6월 23일 보석 결정으로 석방된 김형근 군산 D고 교사가 출옥하자마자 제일 먼저 교단에 서고 싶다는 심경을 피력한 글이다.

이는 김 교사가 2005년 5월 28일 전북 순창 회문산에서 있었던 전북 재야 및 시민단체 주최로 2005년 5월28일(토)과 29일(일) 이틀간 ‘남녘 통일열사 추모제 전날 저녁 문화제’에 학생과 학부모와 함께 참석한 이후 1년 반정도나 지난 시점인 2006년 12월 조선일보가 보도하고 관계당국이 조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관계당국은 지난해 4월부터 11월 조사를 마친 후 아무런 수사결과를 발표하지 않다가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전주지방법원에 구속실질심사를 청구, 2008년 1월 28일 오후 1시 구속 승인이 떨어졌다. 

김 교사는 조선일보의 보도와 관계 기관의 조사에 대해 “참가한 사람은 모두 180여명이며 졸업생 40여명, 중학생 110여명이고 나머지는 학부모, 일부 교사” 라며 “ 학생들은 28일 문화제 성격의 전야제만 참석했다”며 전야제에서는 “(조선일보가 주장했던 ‘제국주의 양키 군대를 섬멸하자’ 등) 정치적 구호는 없었으며,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시작을 했고, 학생들의 ‘통일열차 달리기’를 마지막으로 끝난 것”이라고 밝힌바 있다.

당시 조선일보는 ‘전교조 교사, 중학생 180명 데리고 빨치산 추모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 교사를 '내사중'이라고 보도했는데, 당시 김 교사는 내사를 받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그는 “전혀 조사가 없었다”면서 “그런데도 조선일보에서 내사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옛날처럼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자기들의 목적에 유리하도록 계산된 의도인 것 같다” 면서 과거 공안당국의 수법을 이용해 수사하도록 하는 '여론 조성용' 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아래는 김 교사가 출옥소감문으로 보내온 글 전문이다.

다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바라보며 교단에 서고 싶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나오자마자 바로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바로 연이어 재판이 있었습니다.
이번 9차 재판(6월30일)은 이번 사건을 맨 처음 공작(수사)한 국정원 수사관들이 검찰측 증인으로 참석하여 신문을 받는 과정이기에, 질문 준비할 것이 많았습니다.

지난 6월 23일 저녁에 2차 보석 신청 허용으로 풀려나기까지,
5개월 동안 저는 참으로 많은 번민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0.7평 독감방, 가만히 있어도 추워서 이가 덜덜 떨리던 한겨울에 수감이 되어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팬티와 런닝셔츠만 입고 앉아 있어도 땀이 죽죽 흐르던 출감직전의 상황까지, 이곳은 저에게 적막의 도장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벽만 쳐다보며 억장 가슴 쓸어내리고 서러운 한을 삼키기도 하였습니다. 
어찌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처벌 받아야 하는가?
통일해야 할 같은 민족을 적이라 불러야 하는 이 시대의 야만과 황폐함, 아주 못된 쓰레기 같은 국가보안법 하나를 치우지 못했는가 하는 분노와 자책으로 말입니다. 

사대 매국정권 이명박의 당선 이후 맨 처음 구속이었기에, 저는 그 안에서 앞날에 예비된 형극의 길이 가늠하기조차 어렵다고 느껴졌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법정 안팎의 투쟁, 수많은 기도와 원호, 그리고 역사를 뒤로 물리려는 독재정권의 사대 행각에 맞선 촛불 시위 등이 이 나라의 새로운 희망으로 빛을 주고 있었고, 갇혀있던 저에게 까지 재판부에 의해 보석 허용이라는 은전을 만들었습니다. 노력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을 악랄한 법률로 걸어 넣고, 이를 악착같이 단죄하려 하는 재판부가 저를 풀어 준 것이 약간의 선의를 베푼 모습이라 할지라도, 저에게는 지금 느끼는 이 하늘과 땅, 풀냄새, 그리운 사람과 만남, 자유가 소중하기만 합니다. 

이제 더이상 누구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죄로 오랏줄 묶이고 갇혀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더 바짝 경각하여 철저한 설득과 근거로 재판에 임하려 합니다.
최후 승리로 결속 짓는 날까지는 저의 동여맨 신발 끈을 풀지 않을 예정입니다.

50여년 짧지 않은 삶을 돌아보면,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것 같습니다. 꼭 이겨서 교단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가 국보법이란 괴물과 목숨을 걸고 대항하는 힘의 원천이요, 근거입니다.

2008년 7월 1일 김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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