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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사 습격 김기종 공판, 검찰·변호인 ‘살해의도 있다 VS 없다‘ 팽팽히 맞서

변호인, '김씨가 살해의도였다면 목을 찌르지 얼굴 그엇겠나'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15/06/17 [18:45]

미대사 습격 김기종 공판, 검찰·변호인 ‘살해의도 있다 VS 없다‘ 팽팽히 맞서

변호인, '김씨가 살해의도였다면 목을 찌르지 얼굴 그엇겠나'

이형주 기자 | 입력 : 2015/06/17 [18:45]
▲ 지난 2월24일 한미훈련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한 김기종(왼쪽)씨. 사진=구글이미지     © 이형주 기자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이형주 기자] 지난 3월5일 아침 07시 40분 경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의 통일포럼 강연 중 마크 리퍼트 미국대사를 과도로 습격해 얼굴과 손목 등을 다치게 한 김기종(우리마당 대표)씨에 대한 본안심리가 17일 오후 2시부터 서울중앙지법 311호 중법정에서 형사합의25부(부장판사 김동아)의 심리로 진행된 가운데 국내 기자 30여명과 시민 20여명이 참관했다.

▲ 김기종씨의 본안심리 공판 안내문     © 이형주 기자

이날 주요쟁점사항으로 떠오른 살해의도가 있었느냐 하는 점에 대해 검사측이 증인신청한 증인 VS 변호인과 김씨가 팽팽한 접전을 벌이며 4시간 동안 진행됐다.
 
첫 본안심리 공판에는 이정빈 법의학자문위원회 위원장(59)이 증인으로 출석해 "김씨가 다치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부위를 위해했고 그 위해의 최종 부위는 목의 동맥부위로 위해를 가하려는 의지는 아주 강했다"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는  "리퍼트 대사가 방어를 하는데도 김씨가 여러차례 위해를 가한 점과 흉기를 두개 준비한 점"이라고 증언했다.

증인은 "김씨가 리퍼트 대사의 목을 찔렀는데 경동맥과 1~2cm 정도로 사망할 수 있는 부위에 칼이 가까이 갔다"며 당시 김씨가 '사망할 수 있는 부위'를 노리고 칼을 휘둘렀다고 말했다.
 
이어서 "김씨는 4회에 걸쳐 찌르고 그리고 떼어놓는 과정에서 제어를 당하면서도 칼을 놓치지 않으면서까지 찔렀다"며 "이는 찌르려는 의지가 엄청 강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리퍼트 대사의 엉덩이 아래쪽에 12cm 길이로 긁힌 상처와 김씨가 칼을 든 오른손 약지와 엄지 아래에 생긴 상처를 근거로 들었다.
 
이에 대해 김씨의 변호인은 "리퍼트 대사의 얼굴 상처 길이가 12~13cm인데 목을 찌르겠다면 더 가깝게 찌르지 않았겠나"며 "김씨가 사망할 수 있는 부위인 목을 겨눠 칼로 찔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반박했다.
 
변호인은 "통상 피해자로부터 피가 튈 경우 가해자는 흥분상태에 빠진다"며 김씨가 리퍼트 대사에게 칼을 처음 휘두르고 나서 사람들이 말려도 계속 칼을 휘두른 행동은 우발적 행동이지 '강한 의지'로 볼 수 없다고 맞받았다.

이날 재판에서는 김씨에게 살인의 의도가 있었는지 여부를 두고 검찰 측과 변호인 측의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검찰 측은 "김씨가 처음부터 살해의 목적을 가지고 범행을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위해 행위로 상대방이 잘못될 수 있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범행을 했다"며 "살해의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변호인측은 증인의 반대심문에서 "과도의 칼끝을 손 엄지쪽으로 들고 리퍼트 미대사의 얼굴 광대뼈 부분을 그은 것인데, 증인은 어떻게 칼끝이 검지 아래로 향해 쑤셨다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니냐?"라고 묻자 증인은 "마음대로 해석하라"고 말했고, 이에 변호인이 "보통 가해자가 칼을 휘둘러 피해자가 피를 흘리면 흥분이 되는데, 처음부터 목을 겨누지 않고 어떻게 얼굴을 그었겠느냐?"고 재차 물었으나 증인은 "쑤셨지 그은게 아니다. (변호인이) 최소한의 법의학 지식이라도 갖고 질문하라"고 호통치듯 임했다.
 
그러자 변호인은 직접 당시 상황을 시연해 보이겠다며 참관하고 있는 공판장에서 참관하고 있던 시민 김종선(인천)씨에게 김기종씨가 사용한 과도와 비슷하게 나무로 제작된 과도를 가지고 미대사의 방어와 반항한 장면과 김기종씨가 과도로 얼굴을 그은 장면을 연출했다. 이 시연을 재판부· 검찰측· 증인은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변호인은 재차 증인에게 “김기종씨는 과거 청와대 앞에서 분신해 새끼손가락이 잘라지고 두 번째 손가락인 검지는 힘을 쓰지 못해 칼을 잡지 못한다. 그래서 칼 끝을 엄지손가락 방향을 향하게 하여 얼굴에 그은 것인데 증인은 목을 찌르기 위해서 칼끝을 약지와 새끼손가락쪽으로 향하게 하여 찔렀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증인은 정확한 답변 없이 “처음부터 살해할 의도로 목을 찌르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다시 “위에서 내리찍는 것과 그은 것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며 “증인이 주장한대로 위에서 내리찍다 싶이 얼굴을 찔렀으면 처음부터 상처부위가 깊이 들어갔어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 사진으로나 수술치료 발표에서도 상처길이가 12cm 중 처음 칼로 그은 자리는 1mm정도이고 제일 밑 턱 부분은 약3cm이다. 이는 증인의 주장과는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데 증인은 정반대로 증언하고 있다”고 지적하자, 증인은 “그은 게 아니다. 내리 찔렀다. 찌른 거지 그은 거냐?”로 맞섰다.

특히 변호인은 미대사가 젊기 때문에 반사적인 행동을 했을 것임을 강하게 주장하며 김씨가 살해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으로 김씨의 손바닥에 난 상처를 보이며 “엄지쪽 손바닥은 1.5cm가 찢어졌고 검지쪽 손바닥은 0.5cm이다. 그러면 증인이 주장하는 칼날끝이 검지쪽이 아닌 엄지쪽이지 않는가?”하고 묻자, 증인은 “그럴수도 있겠다”고 답했다.

이어서 리퍼트 대사의 수술을 집도했던 유대현 세브란스병원 성형외과 교수도 증인으로 출석했다. 유 교수는 "리퍼트 대사의 상처로 볼 때 최소 3회 이상의 위해가 가해졌다"고 증언했다.
 
▲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     © 이형주 기자

김기종은 누구인가, 닉네임 '사울의칼'이 블로그에 쓴 글을 인용 보도한다.
(http://blog.daum.net/paulsong/15862121)
 
김기종(金基宗, 1959년 ~ )은 전직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문화운동단체인 '우리마당' 대표이다. 외교사절인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 대사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 피습 사건을 일으켰다.
 
초기 삶

김기종은 1959년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쌍덕리에서 태어나 광주광역시에서 성장했다. 1978년 금호고등학교, 1984년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통일정책대학원에서 《남한사회 통일문화운동》의 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1980년대 활동

1980년대에 국악모임 ‘한가락’, 극회 ‘벽돌’ 등을 창립하며 문화계에서 활동했다. 그가 소속된 우리마당은 1982년 당시 성균관대 법대 재학 중이던 김기종의 주도로 6개 소모임이 "7천만이 우리되어 전 반도를 마당으로 만들자"는 뜻으로 꾸려졌다. 1
 
983년 10월에 《우리마당》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활동을 시작했고 1984년 3월에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에 공간을 마련했다. 이후 연극 공연, 국악강좌, 탈춤·풍물교실, 문예심포지엄을 주최하는 등 문화활동을 이어가면서 1984년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등 5개 대학 총학생회 집행부와 함께 총학생회장 인정 등 14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민정당사'를 점거하였고,1985년 8월에는 회원 내부 조직을 결성, 미 대사관의 성조기 소각을 시도하는등 시국 사건에 개입하였다.

이에 대해 우리마당은 홈페이지에서 "1986∼1987년 군사정권의 호헌에 맞서 직선제 개헌운동의 중심역할을 수행하며 소위 '6월항쟁'의 참호가 됐다"며 박종철 열사의 49제,100일제 등을 주관집행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1997년이후

1997년에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의 외래교수를 지내다가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을 지냈다.
 
2005년 5월 임기 2년의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으로 위촉된 이후 2007년 4월에 한 차례 연임하여 2009년 4월까지 4년간 활동했으며[5]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민족화합운동연합》이라는 단체의 일원으로 8회에 걸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방문했다.
 
2006년 '우리마당 독도지킴이'를 창립하였고, 이어 그해 5월에는 4주 동안 일본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독도 수호 관련 성명서를 전달했으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공동으로 일본정부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006년 독도를 지키겠다며 동료 6명과 주소를 독도로 옮겼다.



2006년 진보 성향의 시민·사회단체가 주축이 되어 구성한《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의 서대문구 운동본부 대표자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진보 진영과 가까운 거리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특히 2009년 1월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주최하는 《용산참사 추모 집회》에 참석해 "80년대부터 여러 철거민 동지, 노동자 동지와 꾸준히 투쟁한 활동가"라고 본인을 소개하면서 "용산참사는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훌륭한 교훈을 남겼다"며 "투쟁을 영원토록 하자고 감히 제안한다"는 내용의 자유발언을 했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한미군사훈련 규탄 등의 시위 활동을 하면서 《한미 키 리졸브 연습》에 반대하며 "평양 점령을 상정한 쌍용 훈련을 중단하라"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던 김기종이 소장으로 있는 《우리마당통일문화연구소》는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해서 "남북 공동조사를 하자"고 주장했다.

2011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서울 덕수궁 앞 공터에서 분향소 설치를 둘러싼 대치 과정에 보수단체 회원으로 추정되는 10여명으로부터 집단폭행 당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된 것 이외에 2011년 12월26일, 2011년 12월30일, 2012년 2월25일, 덕수궁과 사무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보수성향의 단체인 어버이연합으로부터 "전치 4주의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어버이연합이 입주한 건물 앞에서 폭력집단 어버이연합 해체하라는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했다.

2014년 12월 19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정당으로 해산된 통합진보당, 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등과 함께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2013년 5월 9일 서울시 홈페이지에 한겨레 신문 25주년 행사에 참가 예정인 박원순 서울시장을 상대로 "나는 한겨레 신문 창간을 가장 말 없이 준비했다. 박원순 시장은 한겨레 신문 창간 당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으며, 군사정권 시대 검사를 한 박 시장은 행사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행사에 오시면 저에게 혼납니다”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 미대사 습격 3일전 김기종씨가 페이스븍에 올린 글     © 이형주 기자

다음은 김기종 미대사 습격사건, 왜 이 사건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김용택칼럼니스트의 '미국 모르거든 미대사 가해사건 김기종'씨를 말하지 마라'는 글을 실어 알아본다.
 
미국을 비판하면 종북이 되는 현실…

이런 글을 쓰면 종북으로 또 주사파로 분류돼 욕을 먹을 게 뻔하다. 하지만 이번 김기종씨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는 우리에게 무엇인지 한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기종씨의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가해사건이 온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는 왜 주미대사를 습격했을까? 조선일보는 김기종씨를 일컬어 ‘폭력의 희생자였다가 이제 ‘폭력 괴물’이 되어버린 그‘라고 표현했지만 정치인은 물론 진보적인 인사들까지 그를 ‘정신질환자’취급하는 분위기다. 독도지킴이로 또 일본의 만행에 주일대사에게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던 사람… 그는 이런 일을 저지르면 나타날 사회적 파장이며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몰랐을까?

 

우리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의 실체적인 진실과는 다르다. 미국의 정식명칭은 미합중국(美合衆國 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英國이 잉궈 - 잉글랜드의 ‘잉’으로, 프랑스를 法國(법국) - 파궈 (프랑스의 ‘프’)로, 독일을 德國(덕국) - 떠궈(도이칠란드의 ‘도’)…과 같이 중국식 발음으로 붙여진 이름들인데 왜 米國 - 메이궈 (아메리카의 '메') 米國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 美國이 됐을까?

“미국을 무조건 우방으로 생각하지 말라” 한국 최초의 미국유학생 유길준의 말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테프트 - 카츠라밀약’부터 이해해야 한다.

‘테프트 - 카츠라밀약’… 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이 조약이 을사늑약의 모태가 된 사건이라면 의아해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침략에 나서기 위해 미·영과 타협한다. 미․영과 전쟁을 하기에 힘이 부친 일본은 비열한 로비를 통해 해양세력의 양해를 얻고자 영일동맹과 테프트-카츠라밀약을 맺어 필립빈을 미국에 양도한 대가(?)로 한국을 차지한다.

‘테프트 - 카츠라밀약’이란 필리핀과의 전쟁에 힘이 빠진 미국은 러시아세력의 남하정책과 일본의 필리핀 침탈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먹이감으로 일본에 양보하는 대신 필리핀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자 하여 쉽게 친일, 반한정책으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데 양해하는 밀약을 체결한 것이다.

▲  루즈벨트와  태프트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


“나는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싶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역을 담당하게 될 것이고, 일본은 지금까지의 행위로 봐서 한국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

1901년부터 8년 동안 백악관의 주인이 된 제 32대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의 말이다. 그가 얼마나 한국을 우습게 봤는지 그의 말을 더 보자.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결여하고 있으며,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또 만약 일본이 법과 질서를 유지하여 좋은 정부를 수립해서 유능하게 통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이며 “한국의 민족은 가장 문명이 뒤진 미개한 인종이고, 게다가 한국인의 거의 모두는 자치하기에 전적으로 적합지 않으며, 장래 자치하기에 적합하게 될 아무런 징조도 없다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한국관으로 일본과 맺은 ‘테프트 - 카츠라밀약’…!

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하등의 침략적 의도를 갖지 않으며, 미국의 지배를 확인한다.
②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미․영․일 3국은 실질적인 동맹관계를 확인한다.
③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한다.


‘테프트 - 카츠라밀약’의 골자다. 이 조약으로 한국을 일본에 넘겨 준 공로를 인정받아 루즈벨트는 이듬해(1906) 동양평화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역사의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테프트 - 카츠라밀약’이 없었다면…

한반도에 38선을 누가 그었을까?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 위해 그은 군사분계선은 1945년 7월에 미국 육군부(현재의 미국 국방부) 작전국(OPD)에서 ‘연합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계획안’을 마련했다. ‘테프트 – 카츠라밀약’으로 일본에게 강점을 당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에서 38선도 6·25전쟁도 있을 리 없다. 우리역사의 비극의 씨앗을 뿌린 주인공이 미국이요, 그 장본인이 프랭클린 D. 루스벨트다.

“일본천황과 일본국 정부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그리고 일본 대본영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조인된 항복문서 내용에 따라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로 시작하는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문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 은 자신의 관할에 두고…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미군은 38선 이북을 차지한 해방군(소련)과는 다른 해방군으로 남한을 점령한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수립된 대한민국은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였을까? 

우리헌법은 ‘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 통과…’로 시작하지만 미국이 필요했던 사람은 김구선생이 아니라 이승만이었다. 정치적인 지지세력이 부족했던 미국과 이승만이 필요했던 것은 친일세력이 가지고 있는 경제력과 식민지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일제가 소유했던 재산(남한 지역 산업의 85%이상)을 미군에게 귀속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일제잔재청산을 하지 못한 이유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점령군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권력을 물려준 미국은 우리에게 은인이기만 했을까?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조약문과는 달리 이 조약이 군사주권을 포기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귀하의 휘하에 있기를 희망한다”는 맥아더사령관에게 전한 이승만의 서신 한 장으로 우리의 군사주권은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도 군사주권은 미국이 행사하는 반쪽 주권 국가다.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총 3만 5,800명이다. 이들에게 총 6770만 평(부산과는 거의 맞먹는 크기)에 주요 기지 41곳, 군수 통신시설 38곳, 훈련장 11곳 등 관련 시설은 총 90개가 지원되고 있다. 주한미군 1명씩에게 1891평이나 제공, 한국에서 공짜로 토지를 이용하고 있으며, 각종 세금과 도로통행료의 면제, 공공요금의 감면, 공익시설의 무상사용 등이 제공된다. 지난 해 한국정부가 부담해야 할 분담금이 9,200억 원, 7차 협상 때인 2009년 보다 1,600억 원, 2013년보다 505억 원이나 증가한 수치다. 2002년경부터 은행에 모아 놓은 군사건설비는 1조 원가량으로 이자 수입만 1천억 원이 넘는다는 게 언론의 보도다. 



폭력이란 강대국이 행사하면 ‘작전’이고, 약소국이 행사하면 ‘테러’가 된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노근리의 철교 밑에 피신하고 있던 마을 주민을 미군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300여 명이 살해된 노근리 학살사건.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미군기지 ‘캠프 캐럴’에 맹독성 고엽제인 ‘에이전트 오렌지’ 250드럼(5만 2000여ℓ)을 극비리에 매립한 나라.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효순이 미선이 사건, 심심하면 한 번씩 터지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미군범죄. 제주도에 건설하고 있는 해군기지의 숨은 진실은 무엇인가?

미국을 비판하면 종북이 되는 현실…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돌베개1, 2, 3)를 쓴 박세길씨는 ‘미군정의 종식과 함께 남한은 미국의 직접통치에서 벗어나 점차 독립의 기반을 강화시켜왔다. 이 신화는 결국 미국의 통치방식이 더욱 교활해졌음을 의미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겉으로는 수호천사처럼 행동하면서 교활하게 약소국에 접근해 이익을 챙기는 나라. 약소국을 경제적으로 철저하게 예속시키는 그 교활함에 몸서리를 친다. 

김기종 사건이 터지기 바쁘게 새누리당은 10조 원의 사드(THAAD) 배치논란 카드를 꺼내고 있다. 일제치하에서는 일본에, 미군정시대에는 미군에, 박정희, 전두환 시대는 박정희, 전두환에 만세를 부르는 줏대없는 세력과 언론… 김기종 씨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라도 한 번 할 수 있는 성숙한 모습은 볼 수 없을까? 나는 김기종씨보다 미국에 꼬리를 치는 종미세력들이 더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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