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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제 2009/04/0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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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개소문이 나오는 경극4개의 이름에서 고구려의 위치가...汾河, 泥河는 산서,하남유역

    『 구이저우(貴州省) 안순지역의 가면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탈이다. 가면극에서는 당태종을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지만, 용맹스러운 연개소문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중국 당대의 화가 염립본(廉立本:?~673)이 그린 왕희도(王會圖)에 나타난 백제, 고구려, 신라 사신들의 모습. 길이 393cm의 비단 두루마리도 된 이 그림에는 삼국의 사신은 물론 당시 당나라를 방문한 일본, 서역국 등 각국 사신 22명이 그려져 있다.


    바지, 치마, 두루마기를 입은 백제의 사신은 3변째 깃털을 꽂은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은 145번째,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길게 늘어뜨린 신라의 사신은 16번째 순으로 배치됐다.

    ①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은 여러 종류이다.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淤泥河)> 등 확인된 종류만해도 네 종류나 된다. 어니하와 분하만은 독목관과 대강의 줄거리가 비슷하다.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薛仁貴)가 구해준다는 이야기로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연이고, 당 태종이 조연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도망간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포(白袍)를 입은 설인귀가 등장한다. 연개소문은 특유의 비도(飛刀)를 사용해 대항하지만, 설인귀에게 패해 죽는다. 당태종은 위지공(尉遲公)에게 설인귀를 찾게 하는데, 설인귀를 시기하는 상관 장사귀(張士貴)는 그를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설인귀는 산신묘(山神廟)에서 달을 보며 신세 한탄을 하다가 위지공이 몰래와 끌어안자 놀라서 도망가다가 병을 얻고 만다. 당(唐)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들로부터 독목관을 빼앗으려 공격했으나, 오히려 고구려 장군 안전보(安殿寶)에게 장사귀의 아들과 사위가 포로로 잡힌다. 장사귀는 할 수없이 설인귀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는데, 먼저 설인귀의 부하 주청(周靑) 등이 안전보와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자, 설인귀가 병든 몸을 이끌고 출전해 안전보를 죽이고 독목관을 탈환한다."

    경극에 비춰진 연개소문은 용맹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나는 칼'이라는 비도(飛刀)를 차고, 등에 깃발 모양의 고기를 하였는데, 이는 이민족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푸른 빛의 얼굴 화장은 위엄이 있는 그의 모습과 아울러,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경극을 보면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에 대해 두려워 하며, 무술이 뛰어난 인물로 보면서 잔인하고, 사납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일본의 전통극 가부끼에 등장하는 김시민 장군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일본군에게 있어 진주성 대첩은 치욕스러운 전투이고, 그런 진주성 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을 좋게 볼리 없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나, 설인귀가 죽이지도 않은 연개소문을 죽였다는 것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한 중국인들의 심리를 잘 다룬다 하겠다. 연개소문을 두려워 한 그들의 심리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전설의 영웅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이 사용했다는 날아다니는 칼 ‘비도(飛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② 연개소문의 비도(飛刀)와 설인귀의 신전(神箭)

    앞에서 연개소문의 상징 다섯자루의 칼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연개소문의 다섯자루 칼은 고구려 남자들의 일상생활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다섯자루 칼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으니 바로 ‘비도(飛刀)’이다. 송원 때의 『사략』에는 연개소문이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생전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자,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전장에서의 실제 모습을 그린 것이다.

    경극 <독목관>에 등장하는 ‘날아다니는 칼’을 사용하는 연개소문과 맞붙는 설인귀의 무기는 신통력 있는 화살, 신전(神箭)으로 이는 무기를 통해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대립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연개소문의 ‘비도’는 권위용이 아닌 실전용이었다. 사략은 연개소문에 대해 “키는 열 척인데, 진홍색 사복(獅服)을 입고 적규마(赤虯馬)를 타고, 허리에는 두 개의 활집을 매고,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으니, 바로 고려장군 갈소문(曷蘇文)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③ 공포의 고구려 비도술


    『신간전상당 설인귀 과해정료 고사』(新刊全相唐薛仁貴跨海征遼故事:이하 『고사』로 약칭)는 명(明) 성화(成化) 7~14년(1471~1478) 사이에 북경에서 간행된 사회이다. 『고사』에 실려있는 <막리지 비도대전(莫利支 飛刀對箭)>이란 그림은 연개소문이 사용했던 비도술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측 위쪽에 ‘천자’라고 쓴 당 태종이 있고, 아래측 좌측에 신전을 든 설인귀, 우측에 비도를 든 막리지 연개소문이 잇다. 연개소문은 설인귀의 화살에 맞서 칼을 던지고 있다.


    명·청의 전기인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에서 연개소문은 당 태종을 `소진왕'으로 낮춰 부른 뒤 “너의 강산이 아무리 넓다 해도 400개 주에 불과하다. 내가 단지 일개 부대로도 너의 땅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호령하고 있다.

    이 책에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 쫓겨 진흙구덩이에 빠져 곤경에 처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상님이여, 나 이세민을 가엾게 봐주소서.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내가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흐르니, 누가 나를 구해준다면 당나라 땅의 절반을 주겠다. 만약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내가 너의 신하가 되겠노라.”


    신간전상당 설인귀 과해정료 고사』(新刊全相唐薛仁貴跨海征遼故事)』에 묘사된 연개소문의 비도술(飛刀術)

    비도가 일어나 공중에서 춤을 추네
    화살과 비도가 먼지를 일으키며 대적하네
    비도가 화살을 대적하니 노을빛이 찬란하네
    화살이 비도를 대적하니 화염이 일어나네
    공중에서 두 보배가 대적하니
    두 장수 모두 신통력으로 겨루네 -



    ④ 청룡의 화신 연개소문

    경극을 보면 연개소문의 복장을 홍포(紅袍)로 묘사한다. 『사략』에서 연개소문의 복장을 ‘진홍색 사복(獅服)’으로 묘사한 것이나,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에서 연개소문을 ‘문무에 능한 홍포장군’이라고 묘사한 것이 그 예이다. 경극에서도 붉은 색은 긍정적인 인물을 가리키고, 검은색은 지혜로운 인물, 푸른색과 녹색은 민간의 영웅호걸, 금색과 은색은 신이나 귀신을 나타내는데, 연개소문이 홍포로 묘사되었다는 것은 설인귀가 백포를 입고 있기 때문이라 해도 예사롭지 않다.

    경극 <분하만> 서두를 보면 연개소문이 영혼으로 등장해 "나는 본래 청룡으로서 세상에 내려온 것이다"라며 자신을 청룡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설인귀는 백호(白虎)로 등장한다. 청룡과 백호는 풍수나 고대 천문학의 사상(四象)에서 동쪽과 서쪽을 의미한다. 고구려가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점에서 이는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을 동쪽을 지키는 사방신으로 승화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당시 중원의 서쪽과 동쪽이 당과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고사』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온 군영에서 두 장군(연개소문과 설인귀)을 환호하니, 온 세상이 두 사람을 강하게 하네/ 당조(唐朝)가 이 두 장군을 얻는다면 천하가 태평지 않은들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이는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의 신과 같은 무예에 경탄한 나머지, 그를 중국의 장수로 회유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런 마음이 동쪽을 지키는 청룡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경멸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연개소문에 대한 경외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를 청룡의 화신이라 평한 것이다.
  • 성훈 컬럼리스트 2009/04/01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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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태종이 빠진 요택과 어니하는 하남성에 있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도망가다 빠진 요택과 어니하는 하남성에 있습니다.
    요택은 하남성 제원시 동쪽 황하변에 있는 현 지명 황하습지이며, 어니하는 그 근처에 있는 강으로 아직도 그 이름이 그대로 어니하(淤泥河)로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당태종의 퇴각로를 설명할 때 그 지도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 dsfadf 2009/04/0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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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하하하
    경극의 인물들이 색갈로 구분하는것은 맞지만 얼굴색으로 구분을 하지 옷색으로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모르면 좀 공부를 하시든지 허튼소리 치지 말고.
  • 1 2009/04/03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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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승국의 역사의식은 주관적관념론
    임승국의 '제 5 조국론'을 들먹입니다. 전두환을 찬양하고, 군사독재정권과 결탁했다나??
  • 1 2009/04/03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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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중심(수도)은 압록강변과 만주+평양
    고구려 중심지를 근거없이 주관적인 해석으로 하북성에다가 비정하면 고구려를 중국에다 갖다바치는 중국의 동북공정논리다. 중국을 공략하고 한반도.일본을 공략하기 좋은 지역은 만주지역이다. 고구려(대진국) 유적유물은 주로 중국북부지역과 만주.연해주.몽골.한반도지역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다. 소위, 재야사학자들은 문헌비교해석자체가 극히 주관적이고 고고학적 근거자료도 희박해서 설득력이 약하다. 그리고 단군3조선하고 한반도3한도 구분못해서 멋대로 비정해서 고구려.신라.백제의 위치가 뒤죽박죽이다.

    고구려 영역은 만주.중국북부.몽골.연해주.한반도북부로 설정하다 무난하고, 백제영역은 한반도 서남부.중국동해안.일본.동남아지역으로 설정하면 무난하고 신라영역은 한반도 동남부(초기).한반도남부(나당동맹이후 후기)로 설정하면 무난하다. 왜는 백제세력의 남하로 대마도.일본열도로 이주한 한반도남부지역의 마한세력으로 설정하면 무난하고, 지금의 일본은 한반도.만주에서 밀려난 마한.가야.백제.고구려세력의 혼합세력이며,백제멸망이후 일본열도에 백제왕족들이 거주하며 본국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미친 백제세력의 이주로 일본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보면 무난하다.
  • 단군조선지도 2009/04/04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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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시대 요동.요서지역구분기준선은 난하다


    [한단고기]가 증언하는 단군3조선 영역도-[한단고기]에 보면 산동반도아래 양자강지역까지를 회.대라 했으며, 번조선 단군의 관리감독을 받는 지역


    단군조선연구의 권위자이자 고대 갑골문.문헌연구의 전문가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가 설정한 단군조선의 최저 마지노선 영역(난하 위쪽의 중국 하북성지역까지는 단군조선의 영역이다)-국제법을 위반한 일제에 의해 100년 전 대한민국의 영토인 간도를 양도받은중국은 우리민족의 터전이자 단군조선의 영역이였던 하북성.만주.연해주 지역까지는 대한민국에 양도해야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한사군 관련 문제를 보면, 낙랑, 대방, 진번, 현도의 4군을 언급하는데, 이들 땅은 한나라 침입 당시 모두 번조선(번한)에 속하였던 땅으로서, 요동반도 서쪽의 땅이다.

    요동반도 바로 서쪽에 있는 강이 요하인데, 서압록이라고도 불렀다.

    요하의 서쪽 상류를 원래 요하라 한 것이 되는데, 발해만 북쪽에 있으며, 이곳이 요하(홍산)문명의 중심지가 된다. 지금은 내몽골 지역에 해당한다.

    요서와 요동은 원래 요하상류에서 발해만 유역의 남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요하가 있어 동쪽을 요동이라 하고 서쪽을 요서라 한 것이 된다. 요동반도를 기준으로 요동, 요서라 한 것은 요동반도 바로 서쪽에 있는 서압록을 요하라고 하면서 생긴 것이 되고, 요하 동쪽의 반도로서 요동반도라는 말이 나온 것은 곧 후대의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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