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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40)-대한제국의 재정확충과 광업진흥책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6/03/31 [11:27]

대한정통사(40)-대한제국의 재정확충과 광업진흥책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6/03/31 [11:27]

  고종은 웅대한 부국강병의 청사진으로서의 개혁방안을 마련한 데 이어서, 그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조처들을 취했다. 그러나 이십여년간 일제를 비롯한 외세의 침략적이고도 불평등한 무역침탈로 인하여, 정상적인 상업이나 무역행위를 통해서 이윤을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으므로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국가재정은 이미 만성적인 적자구조를 면할 수 없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모든 국제교역 행위를 국가재정에 맡긴다는 것은 언제까지고 적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임을 뜻하는 것이었고, 부국강병의 기초가 되는 재원(財源)조차 마련하기 어려울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인식에 따라서 고종은 국가재정과는 별개로 외국인들이 간섭할 수 없는 황실재정을 독자적으로 운용함으로써, 국가재정의 결손을 보완하면서 남는 여력으로 개혁을 추진하고자 뜻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실 독자적으로 관장하는 전매사업의 확대가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고종은 그 시책의 일환으로 국가재정을 관장하는 탁지부와는 별개의 재정관리 기구인 내장원(內藏院)을 설립해서 황실재정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총책임자인 내장원경(內藏院卿)에는 경제문제에 밝은 충직한 이 용익을 임명해서 모든 업무를 총괄토록 했다. 이 용익은 특히 광산업무에 밝아서 이미 오래전부터 광업진흥에 노력을 기울여 왔으므로 광산의 개발과 운영에 가장 적임자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대한국의 마지막 보고라고 할 수 있는 금광에 대해서 이 용익은 자주적인 입장에서 이권을 열강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종의 명을 받은 이 용익은 즉시 전국의 중요한 광산들을 대부분 내장원에 소속시키고 관리에 힘썼다.

  원래 조선개국 이래로 광산개발은 엄격하게 통제해 왔으나, 개구이후에 피폐해지기 시작한 국가재정을 보조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목인덕이 본격적인 개발을 추진한 바 있었다. 그에 따라서 서1885년부터 광업을 통리기무아문에서 관장하게 되었으며, 서1887년에는 내무부에 광산업무만 담당하는 광무국(鑛務局)을 설치한 바 있다. 또한 서1894년에는 갑오왜란으로 성립된 군국기무처에서는 공무아문(工務衙門)에 광산국을, 농상아문에는 지질국을 설치하기도 했고, 서1895년 3월 21일에는 두 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개편하여 광산국을 설치했던 것이다.

  내장원에서 맡은 광산관리의 중점은 무엇보다도 자주적 관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서 광산사업에 외국인이 간여하는 행위나 외국인과의 합자(合資) 및 외국인 자본을 차용하는 것도 금했다. 다만 채광이 어려운 광산에 한해서는 외국의 최신 기술 도입을 목적으로 제한적으로만 이권 양여를 하기도 했는데, 이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열강의 세력균형을 염두에 두는 정치적 배려로서 각 열강에게 균등하게 양여했다. 이 용익은 서1899년 8월에는 영국인 광산기술자 아담스를 초청해서 국내기술자인 장 봉주와 함께 전국의 광산을 조사시키는 등 서양기술을 대폭 이용하고자 했다. 그리고 외국인의 불법채광도 철저히 단속하여 서1903년에는 수안군에서 불법채광하던 일본인을 내쫓았으나 저들이 사용하던 기계만은 그 효율성을 인정해서 구입한 후 사용하기도 했다.

  고종은 금광뿐만 아니라 석탄광 개발에도 크게 노력했다. 서1896년 6월 18일에 고종은 이 용익에게 평양의 매광(煤鑛)을 운영하도록 했는데, 이 용익은 처음에는 개인이 캐 낸 석탄을 내장원이 구입하는 경영방식을 취했으나, 서1901년 5월부터는 내장원이 매광을 직영하기 시작했다. 석탄광의 경우에도 금광과 같은 '자주적' 관리방식이 채택되었다. 서1903년 1월에는 내장원과 프랑스계의 용동회사 사이에 평양매광 채취계약이 이루어졌는데, 용동회사는 석탄채굴을 전담함은 물론 광산과 관계된 공장기계창 기지도 건설하고자 했다. 이 용익은 같은 해 9월 9일에 매광용 기계를 다량 구입했고, 노일전쟁이 벌어진 서1904년 8월에도 근대적인 석탄관련 기계를 수입했으며, 서1905년 2월에는 프랑스 기사를 해고하고 평양매광을 단독으로 경영하는 등 광산개발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다. 이러한 이 용익의 황실재정 관리는 총체적으로 볼 때 '황실주도의 자주적 근대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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