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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제사를 '차례'라고 말하는 것은 틀리다

조선시대에 나온 문집에서도 설날세배가 있을 뿐 제사가 없었다.

려증동 교수 | 기사입력 2007/02/19 [15:29]

명절제사를 '차례'라고 말하는 것은 틀리다

조선시대에 나온 문집에서도 설날세배가 있을 뿐 제사가 없었다.

려증동 교수 | 입력 : 2007/02/19 [15:29]

[관혼상제[(명) 절사의 의례
 
[편집자 柱]제례는 원래 신과 인간의 세계를 매개시켜 주던 종교행위로서 반드시 사제자에 의해서 주재되어 왔다. 그러나 조상숭배 사상이 보편화됨에 따라 죽은 조상이 신으로 추앙되면서 제례를 널리 일반에게까지 시행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제자의 역할은 종손이 제사 때에만 임시로 맞게 된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제례는 삶과 죽음의 세계를 배가시켜 주는 상징적인 종교행위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례의 절차는 크게 신이 내려오시기를 청하는 降神 告祝과 獻酌으로 되어 있는 歆饗 끝으로 辭神의 3단계로 나누어진다. 이때 차리는 祭需는 紅東白西 魚東肉西 左脯右醢 등과 같은 일정한 격식에 의해 陳設된다. 이러한 격식은 정성보다도 형식에 얽매이는 폐단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신을 향한 엄숙한 행위인 까닭에 거의 절대적으로 보수성을 유지한 채 지켜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수는 제례를 거침으로써 신성한 음식으로 바뀌고 그것은 또 음복을 통해서 신의 축복이 전달되는 매개체로서의 의미도 가진다.조상의 제사는 그 내용에 따라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돌아가신 날을 기준으로 하여 밤에 4대조상을 범위로 제청에서 모시는 忌祭 명절이나 일정한 절기에 4대조상을 범위로 낮에 사당에서 올리는 茶禮 4대조 이상의 모든 조상을 대상으로 묘소에서 1년에 한 번씩 낮에 올리는 時祭가 그것이다.
 
◎ 傳統的인 節祀명절에는 제사를 茶禮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節祀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명절 중에서 차례를 가장 많이 지내는 명절은 설과 추석이다. 이밖에도 가문에 따라 사당이 있는 집에서는 대보름날 한식 단오 중양절 동지 등에 차례를 올리기도 한다. 사당이 있는 집일 때에는 사당에서 지낸다. 그러나 사당이 없는 집에서는 마루에서 신주나 지방을 모시고 지낸다. 흔히 사당은 집 뒤쪽에 별채로 1칸이나 3칸의 규모로 건립되어 있다.(참고:제사|절사|차례|건전가정의례준칙|제례)
 
명절제사를 <차례>라고 말하는 것은 엄청나게 틀린 짓이다. <절사>라고 말해야 한다  

조선국 왕이 차이나 사신에게 음식대접하는 것을 두고 일컫는 궁중용어가 다례(茶禮)였다. 다례를 행하는 관청이 태평관(太平館)이었다. 일본사람들이 <茶>라는 글자를 <차>로 읽는다. 조선음은 da였다.

太宗實錄. 太宗元年辛巳三月癸卯條有曰
上如太平館, 與使臣, 行茶禮. <님금이 태평관으로 가서 (차이나) 사신에게 다례를 행했다>로 된다. <如>는 왕이 갈如자다.


차이나 사람들이 평소에 잎을 다려서 마시기에 차이나 사신을 대접하는 음식상 위에는 반드시 잎물(茶水)이 놓여지게 되었다. 조선왕조 궁중에서 중원사신을 대접하는 음식상 위에 온갖 먹거리가 올라가게 된다. 그들 먹거리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잎을 끓인 물이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국 왕이 차이나 사신을 대접하는 것을 두고 다례(茶禮)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그 뒤 만국사신이 오게 되자 <다례> <茶禮床>이라는 말이 없어졌다. 나라를 잃게 되자 다례(茶禮)라는 궁중용어도 없어졌다.

잎을 끓여마시는 풀을 <茶>라고 하고, 그 글자 소리를 da라고 했다. 경북 고령군에 다산면(茶山面)이 있다. 달성군 지묘동에 다천정(茶川亭)이라는 경주최씨 재실이 있다. 정종시대 정약용 호가 <茶山>이다. 차산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다.

광복후 일본고정간첩 리희승이 일본말백과사전 <廣辭苑>을 베끼기하여 <국어사전>이라고 했다. <茶禮>를 <차례>로 적었다. 여기에서 일본소리 <차>가 시작된 것이다. 똥학자는 나라를 망친다.

각설. 을미년에 왕비 민씨가 시해되었다. 비애왕은 민비를 시해한 주동자를 <弘吉淵夏 四賊>이라고 민비 묘지에 기록했다. 홍길연하 4적 가운데서 일본통이 유길준이다. 비애왕은 유길준을 민비시해 우두머리로 지목했다. 유길준 하수인이 자팬 랑인(浪人)이었다. 유길준 무리를 체포해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아주려고 비애왕이 창덕궁에서 아라사공관으로 파천했던 것이다.
 
 유길준은 자팬으로 달아났다. 원수를 갚아야만 민비를 매장할 수 있다는 것이 토왜의병들 요구였다. 2년 동안 빈소를 궁중에 두고, 민비에 대한 특별제사를 별다례(別茶禮)라고 했다. 일본귀족으로 흡수된 리태왕(李太王)이 1919년 1월 22일에 죽었다. 1919년 7월에 리태왕 유고를 출간하려고 총독 長谷川好道가 일본왕에게 <책이름을 어떻게 하오리까>했다. 왜왕이 <李太王 遺著로 하라>고 해서 <李太王 遺著 珠淵選集>으로 출간되었다. 실국시대 조선학자 로석은 <주연선집>을 읽고 <悲哀王遺稿題曰珠淵選集>이라고 하고 독후문을 지었다. 그곳에 <茶禮>라는 말이 나왔다.

고려시대에 나온 문집에 설날 아침에 조부모․부모에게 올리는 세배(歲拜)가 있을 뿐, 제사가 없었다. 조선시대에 나온 문집에서도 설날세배가 있을 뿐 제사가 없었다. 설날 제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고 하니, 1895년 을미년 음력 8월 민비가 시해되고, 유길준 무리가 병신년부터는 음력을 폐지한다고 했다. 양력을 사용한다고 건양(建陽)이라고 했다. 1895년 음력 11월 17일이 양력 1월 1일이 된다고 미리 알렸다.

이때 <음력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집 만이라도 음력을 굳게 지키겠습니다>라는 다짐제사(誓祭)를 설날에 올렸던 집이 나오게 되었다. 경북 성주군 벽진면 징기마을 수촌리 려촌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끌었던 선비가 수촌(守村) 려진규(呂軫奎)였다. <내가 나라를 지킬 재주가 없으나, 우리마을은 내가 지키겠다>고 하고는 자기 호를 <守村>이라고 했다. 세배를 올리고 난 뒤에 다짐제사를 올리고는 이름을 원조절사(元朝節祀)라고 지었다. 세배후 사대합설(四代合設) 무축단잔(無祝單盞)하라고 시켰다. 로석려구연(老石呂九淵)이 수촌문인이다. <로석집二>에 아래와 같은 제목이 나왔다.

1 ◑從陽曆謂之曰建陽, 是可笑也(건양이라는 말은 우섭다)
2 ◑丙申倭曆亂曰捨陰曆而取陽歷之亂(왜달력란)
3 ◑丙申元朝歲拜禮畢後也, 行誓祭家始出焉(다짐제사집이 나왔다)

3번 글에서 <悲哀王三十三年 乃丙申也. 元朝行誓祭家始出焉. 所出處乃星州樹村里也. 是誓祭之儀則歲拜禮畢後, 奉四代合設而行祭也. 始終男女共拜焉. 祝無而矢之曰吾家固守陰曆. 是言, 乃其矢言也. 我師樹村翁, 欲避倭禍而名之曰元朝節祀

나라를 지키지 아니하고, 일본에게 넘겨준 왕을 비애왕이라고 한다. 실국시대 <東國歲時記>라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이 일본간첩이 조작한 책이었다. 실국시대 일본총독이 수촌리(樹村里) 사람이 미워서 마을이름을 해평동(海平洞)으로 바꾸었다. 수촌리 뒷산과 앞내(前川) 모두 바다처럼 평지가 되라는 저주로 지은 이름이 海平洞이었다. 광복후 경북도지사 김상조(金相祚)가 1990년 4월 1일부터 수촌(樹村)이라는 옛날 이름으로 시행한다고 했다. 고마운 도지사였다.

<명절제사>라는 말에서 줄인 말이 절사(節祀)이다. <절사>라는 말이 차이나말이어서 사용하기 싫은 사람은 <설날제사> <설제사>라고 하면 된다. 일본사람 소리 <차례>는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죽기 만큼이나 듣기 싫은 소리가 <차례>이다.세배꾼이 절을 하면 어른들이 답으로 하는 말이 <어른 모시고 과세 잘 했던가>라고 말하기도 하고, <절사를 잘 모셨던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른모시고>는 <세배를 먼저 올리고>라는 말이다.
짐계(斟溪) 려증동(呂增東) 선생 프로필
● 1933년 경북 성주 출생
● 경북대 국어교육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국문학)
● 경상대 국문과 교수·인문대학장
● 現 경상대 명예교수. 前 배달말교육학회장

● 저서 : ‘배달문학통사’ ‘고조선사기’ ‘나라 잃은 시대’외 16권 등
󰊜 플러스코리아 상임고문
진실을 밝히는 뉴스/플러스코리아 최훈영 칼럼니스트 chy2248@yahoo.co.kr
가이드 08/05/12 [12:33] 수정 삭제  
  민비란 말은 일제가 우리를 폄하할려 만든 말입니다.
명성황후나 명성왕후로 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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